스포 가득한 개인 기록용 감상문
2025.02.28.
무려 3년이나 기다린 봉준호 감독의 신작. ‘미키7’을 22년 10월에 읽었으니 2년 반 정도 기다린 셈이다. 봉준호 감독이니까 원작을 그대로 따라가지 않을 거라고 당연히 생각했고, 영화도 당연히 다르다. 원작을 읽어본 사람은 원작을 알고 있다고 우쭐거릴 수 있다는 것 빼곤 다른 관객과 다를 바가 없다.
기본 설정은 같다. 미키가 모종의 이유로 우주 이민선의 익스펜더블 자리를 꿰차고, 각종 실험체로 쓰인다는 것. 이것과 나샤와 연인인 것 빼고는 인물 관계가 다 다르다. 봉준호 감독답게 익스펜더블이 되는 이유를 현실적이고 극적으로 바꾸었고—사채 빚을 갚지 않기 위해서 이민선에 오르고, 높은 탑승 경쟁률을 뚫기 위해서 익스펜더블에 지원한다—, 유일한 친구 티모, 총사령관 마샬은 원작보다 훨씬 밥맛으로 나온다. 그외 추가된 인물들이 많고, 이것저것 인물 지형이 완전히 다르다. 미키를 익스펜더블—소모품이란 이름에 걸맞는 대우를 하는 것도 그렇고. 크리퍼와의 에피소드도 상당히 다르다. 원작에서는 미키가 흘린 반물질 폭탄을 회수하는 내용이라면, 영화에서는 우연히 이민선으로 들어온 새끼 크리퍼를 구하기 위해 크리퍼 일족과 엮인다는 점이다. 이외에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차이점이 많을 것이다. 2년 반이나 전에 읽었으니 세세한 부분은 날아갔으니 말이다.
결말에서, 크리퍼가 블러핑하는 장면은 원작에서 미키가 사건을 해결하는 방식을 따왔다. 원작에서는 미키가 거짓말—블러핑을 하는데, 영화에서는 새끼 크리퍼를 살리기 위해 마마 크리퍼가 소리를 지르면 인간들의 머리가 터진다,는 거짓말을 한다. 이런 식으로 원작을 비트는 것도 재밌다.
자꾸 말을 빙빙 돌려가면서 하게 되는데…
영화, 재밌다. 배우들 연기도 출중하고, 로버트 패티슨이 연기를 잘하는 걸 이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1인 다역까지 훌륭히 소화할 줄은 몰랐다. 17과 18의 그 미묘한 차이라고 할까. 첫 등장은 확연히 다르지만 뒤로 갈수록 둘의 경계가 옅어지는데 그걸 미세하게 캐치해서 표현한 것이 무척 좋았다. 총사령관 마샬로 분한 마크 러팔로는 커리어 첫 악역이라니 놀랍다. 영화에서 악역이지만 멍청해서 악역처럼 느껴지진 않는다. ‘가여운 것들’에서 연기한 그 느낌과 비슷해서 악역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뭔가 좀 재미없다. 아까 재밌다고 했는데 이상하지 않냐고? 맞다. 재밌는데 재미없다. 맛으로 치자면 맛이 없다, 랄까. 그 ‘맛’이 없는 게 아니라 그냥 ‘맛’이 없다. 밍밍하지도 않고. 그냥 ‘무’. 전작 ‘기생충’ 때문은 아닌 것 같다.
SF 장르의 문제라고 하기엔 그건 또 아니다. 앞서 관객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엄청나게 많은 양의 정보를 주지만, 대충 가지를 다 쳐내면 ‘미키는 죽어도 이전 기억을 가지고 다시 살아날 수 있다’—이건 예고편에서도, 광고에도 숱하게 나온다—, ‘동시에 두 명의 익스펜더블이 존재해선 안된다. 즉, 멀티플이면 안된다’ 이정도 설정만 알고 있으면 된다. 그래서 설정 탓을 할 순 없다. 전개에서도 딱히 걸리는 게 없다. 미키가 왜 익스펜더블이 되었고, 이 이민선에서 어떤 위치이고, 나샤와는 어떻게 만났고, 이민선의 분위기—마샬의 정책 방향, 크리퍼와 어떻게 엮이고, 그들과의 충돌, 해결까지 스무스하다. 근데 뭔가 뭔가 슴슴하다. 사건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인물이 재미없는 것도 아니고, 배우 연기가 어색한 것도 아니다. 연출이 이상하냐? 그것도 아니다. 모두 평균 이상이지만 뭔가 슴슴하다. 웃긴 건 아쉽다는 느낌도 들지 않는다는 거다. 영화를 보다가 안 좋거나 삐끗하면, 아, 여기서 다르게 갔어야 했다. 배우가 아쉽다. 뭐 이런 관객 나름의 ‘만약’을 붙이는데, 본 영화는 그런 것도 없다. 어디를 고쳐야 하지? 라고 물으면, 잘 모르겠다.
내가 생각하기에, 봉준호 감독은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미묘함을 누구보다 섬세하게 캐치하는데 능한 사람인데, 굳이 내가 재미를 느끼지 못한 이유를 붙이자면, 영화의 배경인 니플헤임 행성과 마샬이 꾸린 이민선이란 배경 자체에 크게 공감하지 못한 것 같다. 그 안에서 인물들이 행동하는 이유를 알겠는데, 그 행동 이유에 공감을 못하겠다는 느낌? 외국 배우를 써서 그렇다? 그건 아니다. ‘설국열차’와 ‘옥자’는 재밌게 봤다. 두 영화도 완벽하다고 할 수 없지만—몇 개의 영화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영화가 그렇다— 나름의 강점이 있었다. ‘설국열차’는 그 열차만이 가지는 시스템과 그 한계,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물들의 차이, 그리고 결말이 좋았다. ‘옥자’는 동화 같은 분위기, 그렇지만 현실적인 잔인함, 옥자와 주인공의 사랑과 연대, 그리고 시스템화한 육식 공장에 대한 재고 등 느끼는 바가 많았다. 하지만 ‘미키 17’은 그렇지 않다. 정말 먼 미래, 먼 행성에서 일어난 이야기처럼 ‘아, 그렇구나’ 정도만 느꼈다. ‘익스펜더블’이 불쌍한 건 오케이. 근데 멀티플이 왜? 이민선이니까 식량 조절해야지. 근데? 사이코패스 이야기? 그런 걸로 멀티플 금지? 생물학적, 철학적, 윤리적 문제? 음…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뭔가 탁 와닿는 점이 없다. SF가 다 그렇지 않아? 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아니다. 하드 SF라도 그건 장르의 구분이지, 이야기와는 다른 문제다. 봉준호 감독에게 기대한 바가 너무 컸기 때문일까?
그래도 봐서 좋았다. 오랫동안 기다린 영화인데다 SF라니. 최고다. 배우들 연기도 좋았고. 다만 기대가 높았나봐. ‘기생충’ 다음이고, 결이 너무 다르잖아. 현실에서 우주라니. 내가 그 낙차에 내 멋대로 실망한 거다. 이렇게 말은 했지만 별 5개 중 3.5점이다. 평타 이상은 친다는 말이다.
잘 되었으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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