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보다 해몽 #1 겉과 속, 우리는 무엇으로 사람을 판단하는가?
누군가가 보여주는 표면적인 행동만 보고 내 멋대로 그들을 평가하는 것. 반대로, 나의 겉모습만 보고 날 판단해 버리는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받는 것. 살다 보면 심심치 않게 마주하게 되는 상황들이다.
모두가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은 다르다.
이런 세상에서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우리는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 걸까?
2024년 11월, 영화 《위키드》를 처음으로 보았다. 올해 최고의 영화라며 주위에 열변을 토하며 추천했다. 영화의 OST 가사를 다 외울 정도로 들은 후, 한 번 더 보았다. 그리고 영화관에서 내리기 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보았다. 좋아하는 영화는 가급적 영화관에서 여러 번 재관람하는 편인데, 사운드가 주는 몰입감이 있는 경우에 특히나 더욱 그러하다. 영화관에서만 겪을 수 있는 그 특별한 경험이, 영화를 더 소중하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이미 전 세계적으로 약 7억 5천만 달러, 즉 제작비의 다섯 배를 넘는 수익을 기록했을 정도로 성공한 뮤지컬 영화다. 그 성과만으로도 대단하지만, 당시 이런저런 주변 상황으로 절망하고 있던 나에게 어떤 정서적 성장의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 특별하게 느끼는 영화이기도 하다. OTT 시대에 홍수처럼 밀려드는 다른 영화들, 그리고 멈출 수 없는 시간의 흐름에 부대껴 기억이 흐릿해지기 전에 이 영화에 대한 나의 생각을 남겨두고 싶었다.
*** 스포일러 주의! ***
영화 《위키드》는 러닝타임 내내, 계속해서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무엇을 바탕으로 사람을 판단하는가?
초록색 피부를 가진 주인공 엘파바는 바로 그 피부 색깔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펼쳐지는 노래, “그 누구도 마녀를 애도하지 않는다 (No one Mourns the Wicked)". 이 제목은 노래의 후렴구에서도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다. 이렇게 입을 모아 마녀의 죽음을 축하하는 시민들의 합창만 들어도 알 수 있다. 마녀로 낙인찍힌 엘파바의 죽음은, 애도하는 사람 하나 없이 외롭다.
오히려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에, 마치 축제와도 같은 분위기가 펼쳐졌다. 마녀가 죽었다며, 좋은 소식이라며 모두가 기쁨에 가득 차 외친다. 이 장면이 흥미로운 이유는, 이것이 단순히 극 중 상황을 설명해 주기 위한 오프닝 장면이 아니라, 관객인 우리를 향해서도 교묘하게 장치된 함정이기 때문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시민들 중, 마녀를 직접 만나본 사람들은 몇 명쯤 될까?
함께 노래하며 기뻐하고 있는 사람들 중 대다수는 마녀를 만나본 적도 없이, 그저 소문만 듣고 마녀를 미워했을 것이다. 그리고 관객인 우리들 역시,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죽었다는 마녀가 누구인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아직 알지 못하지만, 영화의 시작부터 흘러나오는 '위키드 위치', '마녀의 죽음', ‘굿 뉴스' 같은 단어들을 들으며 자연스럽게, ‘아, 뭔가 나쁜 사람이 죽었나 보다' 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만약 '초록색 마녀가 주인공이다'라는 정보가 없는 채, 아무것도 모르는 눈으로 이 영화를 보게 된다면 어떨까? 누군가는 어쩌면, 이 영화는 주인공 글린다가 나쁜 초록 마녀를 무찌른 과정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 만나보지 못한 이 사람은, 애초에 정말 '마녀'가 맞기는 할까? 우리가 그녀를 마녀라고 믿게 된 건, 진짜 그녀를 알아서였을까? 아니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받아들인 걸까? 아직 그녀의 얼굴을 본 적도, 목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는데, 그녀의 죽음을 마냥 축하하는 것. 이건 과연 '좋은', 그러니까 '착한' 행동일까? 누군가의 죽음을 이렇게까지 기뻐하며, ‘선이 악을 이겼다’라고 노래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다지 선하게 보이지 않는 이유는 왜일까?
겉으로 주어지는 정보에만 기대어 누군가를 판단하는 것. 우리 모두 쉽게 하는 실수다. 영화가 이제 막 시작했을 땐,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 이상으로 주인공을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의 본모습을 알기 위해선, 영화를 중간에 멈추지 않고, 끝까지 봐야만 한다.
이 영화를 보다 폭넓게 이해하기 위해, 선(善)과 악(惡)의 관계에 대해 집중해 보자.
이 이야기는 세계의 청사진에서부터 완전무결한 '선'과 회생불가의 '악'이라는 진영을 나누어버렸다. 그리곤 사회적 분위기와 군중들을 통해, 각 진영 속에 캐릭터들을 가둬놓는다. 그리고 이렇게 극단적인 구조에서, 글린다는 ‘선함’을, 그리고 엘파바는 ‘악함’을 대표하게 된다. 이로 인해 고통스러운 시간을 겪게 된 각 인물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런 명료하고도 이분법적인 이 세계의 구조 덕분에, 우리는 글린다와 엘파바의 움직임을 따라가 보는 것만으로도 쉽게 선과 악의 아이러니한 상관관계를 경험할 수 있다.
선(善)은 영어로 Good으로 표현되며, 이것은 ‘착하다’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위키드》의 원작이라고 볼 수 있는, 《오즈의 마법사》 속에서 사용되는 'Good Witch Glinda'라는 표현 역시, '착한 마녀 글린다'로 번역되고 있다. 하지만 으레 그렇듯, 한 단어에는 여러 의미가 담길 수 있다. '착함'이 이 단어의 단 하나뿐인 의미는 아니다.
극 중 글린다는 보크에게 부탁하여 다리가 불편한 친구 네사를 챙기는 ‘선함’을 보여주지만, 우리는 모두 알 수 있었다. 사실 이 행동은 보크와 데이트하고 싶지 않아 적당한 핑계로 그를 떼어낸, 글린다의 이기적인 진심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 모습을 지켜본 피예로는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You're Good
이 표현. 'Good'라는 단어를 '착하다'로 해석한다면, 「너는 정말 착하구나」로 번역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의미는 「너 쫌 잘한다?」, 즉, 「너 쟤를 정말 자연스럽게 잘 떼어내네?」라는 뜻일 수도 있다.
해석하기에 따라, 글린다의 배려심에 대한 순진한 찬사처럼 들을 수도, 혹은 그녀의 위선적인 순발력에 대한 칭찬으로 들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 극에서 글린다가 결코 마냥 ‘선'하지 않다는 점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선(善)은 무엇일까? 대체 어떤 게 '진정으로 착한' 것일까?
사회는 다차원적이고, 단 하나의 정답만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누군가에게는 정답인 일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치명적인 오답이 되기도 한다. 마치 어느 국가에서는 전쟁 영웅인 사람이 적대국 입장에선 테러리스트로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 보니 ‘선’은, 보통 다수의 이익을 위해 규정되고 있으며, 그것이 나의 이익과 항상 딱 맞아떨어지지는 않는다. 만약 운이 좋게도 내가 그 ‘다수’에 포함되어 있다면, 문제가 없다. 좋은 가문에서, 평범한 피부색을 가지고 아름답게 태어난 글린다의 경우가 그러하다. 며칠을 굶어 배가 고파 보지도, 특이한 외형으로 왕따를 당해 보지도 않은 그녀가 그녀 본인을 위해 (때론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일은, 대체로 사회 특권층이 이미 만들어둔 허락된 바운더리 안쪽에 위치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다수가 만들어둔 바운더리가 반드시 도덕적인 ‘선함’과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점이, 세상의 선악구분을 오묘하게 만드는 주범이다. 다수에 소속되어 있을 때는 모른다. '우리들' 사이에선 너무나 당연한 일들이, 울타리 바깥의 '저들' 입장에서 보면 부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 아이러니는 이 울타리 바깥에 배치된 엘파바의 사연을 들여다보게 되면 좀 더 명확히 드러난다. 사악한 마녀 같아 보이는 초록색 피부와는 달리, 그녀는 사실 정의롭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글린다를 포함한 평범한 학생들은, 엘파바의 말 한마디 들어보기도 전에, 외모만 보고도 일단 놀라며 경계한다.
슬프게도, 어릴 때부터 초록색 피부 때문에 놀림과 따돌림을 당해온 엘파바에게 이런 상황은 익숙했다. 그리고 자신의 못난 외모가 아름다운 내면을 가리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모두가 자신을 몰라주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에, 엘파바는 본인 역시 아름다운, 아니, 평범한 외모를 가질 수 있기를 바라왔다. 이 지점은 엘파바의 솔로 스코어 "마법사와 나 (The Wizard and I)"에서 잘 드러난다.
"그리고 언젠가, 그가 내게 이렇게 말할 거야. ‘엘파바, 너처럼 뛰어난 소녀는… 이런 아름다운 내면에 어울리는 겉모습도 가져야 하지 않겠니?’”
“And one day, he’ll say to me, ‘Elphaba, a girl who is so superior, shouldn’t a girl who’s so good inside have a matching exterior?”
영화에서 이 가사가 연출된 씬은 특히나 아름답고 영리한데:
노래를 부르던 엘파바는 천정에는 오색의 유리가, 사방에는 색색의 거울이 배치된 공간에 들어서게 된다. 이윽고 엘파바가 온 세상이 초록색으로 보이는 거울 앞에 서자, 그 세상 속에 비친 그녀의 외모는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한편, 천장 유리를 통과한 붉은빛이 엘파바의 초록색 얼굴에 떨어지는 순간, 초록과 빨강이 서로 섞이며 그녀의 피부색은 잠시 평범한 갈색으로 보인다. 그 아래엔 평범한 피부색을 갈망하는 엘파바의 진심 어린 모습이 있다. 영화의 메시지와 캐릭터의 깊이감, 장면의 미적 아름다움까지 모두 한 장면에 함축적으로 녹였다.
엘파바에게는 꿈이 있었다. 하루빨리 마법사를 만나, 나의 빛나는 실력과 아름다운 내면을 인정받고, 그 대가로 이런 평범한 피부색을 가지기를 소원으로 빌겠다는 꿈. 선하면 아름다워야 한다는 생각, 좋은 사람이라면, 겉모습에서 역시 그 ‘좋음’이 드러나야 한다는 기대에서 비롯된 환상이었다.
하지만 극이 흘러 엘파바와 글린다가 친구가 되었을 때, 글린다는 엘파바에게 이렇게 말한다.
"중요한 건 ‘인기’야. 실력 같은 건 문제가 아니고, 사람들이 널 어떻게 보느냐가 전부지. 그러니까 정말 똑똑한 사람이라면, 아주아주 인기 있는 사람이 되는 게 현명해, 바로 나처럼!”
“It’s all about popular. It’s not about aptitude, it’s the way you’re viewed. So it’s very shrewd to be very, very popular, like me!"
글린다의 메인 스코어 "Popular"는 유쾌한 분위기와 달리, 굉장히 복합적인 감정을 담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엘파바를 사회에 더 잘 어울리게 돕겠다는 말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글린다 자신의 그림자가 느껴진다.
글린다는 엘파바와는 달리, 그야말로 ‘인기쟁이’ 그 자체로 살아왔다. 그녀의 천사 같은 겉모습을 보는 사람들은 그녀의 내면도 그만큼 아름다우리라 쉽게 기대했을 것이다. 그리고 글린다도, 어느 정도는 이런 시선과 평가를 즐겼을지 모른다.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며 ‘착한 사람’, ‘완벽한 사람’으로 사는 삶, 그 대신 돌아오는 ‘인기’. 그녀는 인기라는 방식의 주목과 사랑을, 가장 익숙한 보상으로 여겨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녀의 속마음이 겉으로 드러낼 수 있는 모습과 100% 일치했을 때까지의 이야기다. 구김살 없이 즐겁기만 하던 삶조차도, 겉모습과 속마음의 차이가 생기는 순간, 흔들리기 시작한다.
속마음이 그렇지 않은데, '그런 척' 하는 것은 생각보다 더 괴롭다. 누군가를 싫어하지만 좋아하는 척하는 것. 또는 반대로, 누군가를 그다지 미워하지 않는데 나의 안위를 위해 그를 싫어하는 척하는 것.
앞서 말했듯, 우리 사회는 언제나 누구에게나 도덕적으로 공평하게 완벽할 수 없다. 그런 다차원적인 사회에선, 진실되게 선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조차도 길을 잃어버리기 쉬운 법이다. 글린다는 아마도 어느 순간부터 (정확히는, 엘파바를 만난 후,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서 질투 등 여러 종류의 감정들이 휘몰아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녀 내면의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으레 ‘착하다고 여겨지는’ 행동, 즉 ‘다수의 사람들이 기대하는 행동’을 해야만 하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겉으로는 안 그래 보이지만, 사실 글린다는 ‘선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진짜 감정과 생각들을 억눌러 자신을 속이며 살아왔을지 모른다. 어떻게 보면, 그런 글린다의 세계를 엘파바가 의도치 않게 뒤흔들어 놓으면서, 글린다가 예상치 못한 좌절과 성장의 굴곡을 타게 된 걸 수도 있다. 이런 글린다의 변화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기 때문에) 다른 글을 통해 좀 더 심도 깊게 다루어보려고 한다.
여하튼, 글린다의 생각이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의 천사 같은 외형을 보는 사람들은 그녀의 내면도 틀림없이 '그들이 기대하는 방식으로 선할 것'이라 기대했다. 반면 엘파바의 초록색 외형을 보고는, 그녀의 내면이 끔찍하게 악할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글린다 역시 이런 흐름에 어느 정도 합세하기도 했다. 초반부 엘파바와 계속해서 대립하며 그녀를 배척하는 태도에서 엿볼 수 있다. ('정반합(正反合)', 또는 '테제-안티테제-신테제'로 불리는 헤겔의 변증법적 논리 중 '반/안티테제'에 해당하는 갈등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 또한 다음 글에서 더 자세히 설명하겠다.)
누가 보아도 글린다와 엘파바는 서로 반대였다.
하지만, 그들은 사실 정확히 똑같은 프레임에 갇혀 있었다.
"겉모습이 [ ] 하니, 내면도 똑같이 [ ] 하겠지."
-> 글린다 = "겉모습이 [ 선 ] 하니, 내면도 똑같이 [ 선 ] 하겠지."
-> 엘파바 = "겉모습이 [ 악 ] 하니, 내면도 똑같이 [ 악 ] 하겠지."
이 프레임 속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엘파바는, 본인의 내면이 선하다는 사실을 인정받고 싶었다. 그렇기 때문에, 선하고 평범한 겉모습을 가지길 바랐다. 이건 단순한 외모 콤플렉스가 아니라, 세상에 녹아들고자 했던 그녀의 간절한 기대였다. 나 자신에 대한 사랑과 혐오가 공존하던 엘파바. 그녀는 이런 외모의 변화를 원하면서도, 원치 않으면서도,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엘파바의 외모를 한껏 꾸며주던 글린다는 말한다.
세상의 시선은 우리의 겉모습만을 보고 판단할 뿐이야.
그 이상의 모습은 들여다보지 않아.
각자가 가진 진짜 내면에 대해서는 사실 관심이 없어.
엘파바의 외모가 평범해진다고 한들, 그녀가 내면에 가진 모습을 진심으로 들여다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진실. 하지만 내면을 보여주고 싶어서 겉모습을 바꾸는 건데, 정작 아무리 외모가 바뀌어도 나의 내면은 계속해서 외면당한다면, 외모의 변화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럼에도 더욱 잔인한 건, 설령 그렇다고 해도, 외형이라도 바뀌지 않으면 그 내면은 영원히 오해받은 채 그 자리에 그대로 갇혀버릴 것이라는 사실이다. 친구로서 조언해 주는 글린다에게 고마워하면서도 씁쓸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던 엘파바. 그녀의 마음은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복잡했을 것이다.
"Popular"는 단순한 친구들 사이의 makeover송이 아니라, 겉모습 중심적 세계에서 글린다가 겪은 그녀만의 생존 방식이 드러나는 장면이기도 하다. 글린다는 새로운 친구 엘파바에게, 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체득한 방식을 전해주려 한다.
“일단, 아름다워져라! 파퓰러 해 져라!”
좋게만도, 안 좋게만도 볼 수 없는, 우리 사회의 쓴 단면에서 생겨난, 피해자들의 적응법을 유쾌하게 풀어낸 장면이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이런 방식으로 누군가를 바꾸려 했을까. 혹은 내가 바뀌어야만 남들에게 사랑받을 거라 믿으며, 나 자신을 숨겨 오지는 않았을까?
하지만 겉모습이 아무리 변해도 세상이 나의 진심을 들여다봐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떠한 삶의 태도로 임해야 하는 걸까?
이 영화에는 '그리머리'라는 마법책이 등장한다. 겉모습은 낡은 책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아무도 풀지 못한 진실과 권력이 담겨 있으며, 영화의 중후반부 스토리를 견인하는 아주 중요한 존재이다.
그리머리는 '아무도 읽을 수 없는 책'이었다. 언젠가 혼란에 빠진 오즈를 구할 영웅만이 읽을 수 있으리라는 예언만이 전해져내려 왔다. 마법사가 열기구를 타고 오즈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 그리머리를 읽을 수 있는 '척' 함으로써, 오즈 시민들로부터 인정받고 막강한 권력을 얻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사실 이 책을 읽을 능력이 없었다. 이 책 속 문장들을 해독할 수 있는 사람. 선택받은 자. 그건 바로 엘파바였다.
그리고 이 책의 존재는, 고전적인 속담 하나를 직관적으로 떠올리게 한다.
책 표지만 보고 그 내용을 판단하지 말라.
Do not judge a book by its cover.
달리 말하면, 누군가의 겉모습만 보고 내면을 판단하면 안 된다,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속담은, 위키드 전반에 흐르는 메시지를 응축하고 있다. 그리머리는 이 이야기 전체를 압축하는 메타포이다.
겉모습만 보고 내면을 이해한다고 착각하는 것, 일상생활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예컨대 우리는 종종 어떤 사람이 눈을 못 마주치거나, 혹은 목소리가 작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의견이 없다고 오해한다. 이 속담이 아주 오랜 기간 널리 사용되고 있을 만큼, 사회에서 이런 실수들은 만연하다.
그러나 엘파바는 그런 시선을 거슬러 올라가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들어 보려는 사람이었다. 보통 사람은 읽지 못하지만, 누군가는 해석해 낼 수 있는 내면의 진실. 엘파바는 바로 그런 존재였다. 그녀는 말하는 동물들의 겉모습에 편견을 가지지 않고 친구가 되며, 그들 내면의 말들에 귀를 기울인다. 본인 역시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달리 그 내면에는 누구보다 인간적인 마음이 있는 것처럼, 남들에게도 겉모습과 꼭 일치하지만은 않는 내면의 진실이 존재하리라 믿었다.
영화의 초반부, 부모님에게 외면받은 어린 엘파바는 말하는 곰 유모의 손에서 자랐다. 이때까지만 해도 동물들의 권리는 사람의 권리와 유사해 보였다. 그러나 중반으로 흘러갈수록 딜라몬드 교수님을 비롯한 동물들은 교단에 서는 것이 금지되고, 어린 동물들이 말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도록 케이지에 가두는 등, 온갖 차별과 핍박을 받게 된다.
에메랄드시티를 지키던 원숭이 경비병들은, 마법사의 수작에 제대로 된 거절의 의사표현도 하지 못하고 날개가 돋아나게 된다. 하늘을 나는 날개를 가지는 것, 남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좋아 보여도, 속으론 어떨지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원숭이들은 날개를 바라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 듣기 좋아 보이던 ‘날개’는, 사실 마법사의 ‘필요’에 의해 '꾸며낸 선(善)’일뿐이었다. 원치 않는 자에게 강제로 드리워지는 순간, 이것은 더 이상 도덕적인 가치를 가진 '선', 즉 ‘좋음’이 아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엘파바는 드디어 마법사의 진실을 눈치채게 된다.
이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타인의 내면을 들여다볼 줄 아는 인물이 바로 엘파바다. 또한 그리머리를 읽을 수 있는 단 한 명의 영웅 역시 엘파바다. 이 맥락에서, 이 영화 속 '진짜 힘'을 의미하는 그리머리는 '타인의 내면'을 상징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겠다.
타인의 내면을 읽지 않는다 = 그리머리를 읽지 못한다
그리머리를, 그리고 타인의 내면을 ‘읽을 수 없는 자’들의 편견 가득한 시스템. 그들의 판단을 엘파바는 더 이상 믿을 수 없었다. 모든 해석의 열쇠는 ‘읽을 수 있는 자’, 즉 그녀 자신에게 달려있었다. 그 어떤 판단도, 자기 자신이 아닌 남에게 대신 맡길 수 없다는 사실을, 엘파바는 뒤늦게나마 깨달았다.
그 순간부터, 하늘처럼 받들고 선망하던 마법사에 대한 엘파바의 저항이 시작되었다.
그리머리를 읽는다는 건, 아무도 해석하지 못한 세계의 질서를, 이제 스스로 다시 써 내려갈 수 있다는 뜻이다. 겉모습만으로 진실이 결정되고, 허상으로 권력이 세워졌던 이 세계에서, 엘파바만이 그 진실의 본문을 해석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을 확인한 것이기도 하다.
읽을 수 있는 자만이, 세상을 다시 정의할 수 있다.
그리머리는 곧 권력이고, 그건 사람들의 내면을 읽을 줄 아는 자만의 언어로 쓰여 있었다. 그리고 엘파바는 그 언어를 해독하는 유일한 존재였다. 마법사와는 달리, 그녀는 그리머리의 내용, 그리고 타인의 내면을 읽는 진정한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영화의 오프닝에서, 글린다는 엘파바의 죽음에 대해 사람들에게 이렇게 공표한다.
"타임 드래곤 시각에 따르면, ‘녹아내림’은 열세 번째 시간에 발생했습니다. 네… 서쪽의 사악한 마녀는 죽었습니다!”
“According to the Time Dragon Clock, ‘the melting’ occurred at the 13th hour. Yes… the Wicked Witch of the West is dead!"
여기에서 글린다가 재미있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그건 바로 “melting”, 즉 “녹아버림”이라는 단어다. 그리고 이 ‘녹아버렸다’는 말은, 영화 속에서 딱 한 번 더 반복된다. 바로 영화 초반부, 엘파바가 부르던 "마법사와 나(The Wizard and I)"에서다.
"그리고 난 마법사 옆에 서 있을 거야. 이전에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들을 느끼면서. 겉으로 드러내진 않겠지만… 너무 행복해서, 정말 녹아버릴지도 몰라!”
“And I’ll stand there with the Wizard, feeling things I’ve never felt. And though I’d never show it, I’d be so happy, I could melt!"
즉, 이 영화에서 표현하는 melt는 물에 녹아 사라진 엘파바의 죽음을 뜻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엘파바가 마법사를 만났을 때 느끼길 기대하는 행복과 희망의 감정으로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이렇게 같은 단어 안에 두 개의 전혀 다른 정서가 담겨 있는데, 영화의 시작부터 언급된 그녀의 죽음이, 정말 비극적 엔딩을 의미하고 있을까?
'녹아버림’에 대한 중의적 표현은 이 이야기의 끝에서 어쩌면, 엘파바가 행복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게 만든다.
영화의 끝, 엘파바의 메인 스코어 "중력을 벗어나 (Defying Gravity)"에서 이와 관련한 암시를 뿌려두고 있는데, 그녀는 스스로 악을 자처하면서도, 전혀 불행하거나 불안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처음으로 스스로의 운명을 직접 선택한, 아주 단단한 사람으로 보인다. 겉만 보고 멋대로 판단하는 이 세상의 시선을 더 이상 피하지 않고 오히려 정면으로 받아들인 결과였다.
그렇다면, 엘파바와 함께 떠나지 않은 글린다는, 과연 이 세상에 굴복한 걸까?
이 내용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더 구체적으로 다뤄보도록 하겠다.
이 영화는 여러 문장과, 메타포와, 단어와, 캐릭터의 움직임을 통해, 계속해서 일관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겉으로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다.
선함과 악함은 눈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내면을 들춰보고, 고민해서, 해석해 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을 수 있다.
“나는 누군가를 겉모습으로만 판단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착한사람이길 자처하면서도, 누군가의 녹아버림을 축하하고 있진 않은가?”
진짜 마법은, 해석에서 시작된다.
그 진실을 들여다보는 눈이 있다면, 우리는 직접 만나지 못하고 소문으로만 들어온 마녀의 죽음을 마침내 애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1부 끝 - 다음 편에 계속]
# 하선의 꿈보다 해몽 : 영화 《위키드 1》
1️⃣ 오래 보아야 예쁘다 ( ☑️ 방금 다 읽었어요! )
2️⃣ 글린다는 엘파바를 배신했나 [바로가기]
3️⃣ 엘파바가 서쪽 하늘로 향한 이유 [바로가기]
4️⃣ 양철 나무꾼은 어떻게 됐을까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