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린다는 엘파바를 배신했나 : 영화 《위키드 1》

꿈보다 해몽 #2 선택의 순간, 우리는 어느 방향을 보는가?

by 하선
‘악한 마녀가 죽었다’는 소식에 모두가 기뻐한다. 하지만 겉모습이 마녀인 사람도, 막상 내면을 들여다보면 사실 악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겉모습에 속지 말라'라는 이 영화의 메시지. 이런 시각을 바탕으로 영화의 첫 장면을 되짚어보면, 우리에게 더 무서운 질문이 남는다.

만약 그녀가 악이 아니라면, 그녀는 왜, 어떻게, 누구에 의해 마녀로 낙인찍힌 걸까?
여기에 숨겨진 진짜 악은 무엇일까?


'선(善)'과 '악(惡)'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초등학생 때 교회에 잠시 다녔던 적이 있다. 그 시절 성경 말씀 시간에 배운 것 중 기억에 강하게 남은 건 "창세기" 속 몇몇 일화뿐이다. 신이 먹지 말라고 경고했던 선악과(善惡果)를 베어 물은 대가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 '선'과 '악', 즉, '좋음'과 '나쁨'을 알게 해주는 과일을 먹은 것뿐인데, 왜 그들은 신과 함께 영생을 누리는 기회를 잃어야만 했을까? '선'과 '악'이 대체 뭐길래?


간단하게 생각하면 답변이 쉽다. 뉴스를 켜면 나오는 수갑 찬 살인자는 악한 사람, 그리고 홍수 피해를 입은 이재민들을 돕는 자원 봉사자는 선한 사람이다.


하지만 한 겹의 레이어를 더 상상해 보자.

만약 그 살인자가 죽인 대상이 가정폭력을 휘두르던 이웃이었고, 그의 죽음으로 인해 온 가족이 구원받았다면? 만약 수많은 나눔을 베풀고 있는 그 자원 봉사자가 사실 학창 시절 친구를 괴롭혀 인생을 파탄 낸 학폭 가해자였다면? 두 사람 중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은 누구일까? 두 사람 모두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사람' 일까? 아니면 명확한 범죄를 저지른 적이 있으니 결국 둘 다 악한 사람일까?


'완전히 선하기만 한 사람'이란, 혹은 '오로지 악하기만 한 사람'이란,
이 세상에 과연 존재할까?

짧다면 짧은 직장 생활을 하면서 인간관계에 대해 배운 몇 가지 교훈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자신의 특징을 적극적으로 설명하는 사람의 말을 쉽게 믿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나는 어떤 사람이다"라고 강하게 선언하는 사람일수록, 그 사람은 그 특징을 전혀 가지지 못했을 확률이 높다. 그 '특징'은 공교롭게도 그 상황에 딱 맞춘 듯이 매력적이거나 절대적으로 긍정적인 경우가 많으며, 보통 '진짜 모습' 보다는 '되고 싶은 모습'일 때가 많다.


무언가가 너무나 필요하지만 가지지 못했을 때, 우린 그것을 더욱더 간절히 원하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오랜 기간 그것을 갈망한 끝에 조금씩 가까이 다가가기도 하지만, 그런 이들은 보통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타고난 나의 모습을 내가 원하는 다른 방향으로 바꾸어 나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찰나의 순간 노력을 게을리하면 얼마나 빠르게 원래의 모습으로 다시금 되돌아가게 되는지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푹신한 침대에 다시 눕도록 날 끌어당기는 중력을 이겨내는 일이 쉬운가? 전혀 그렇지 않다.


노력해 본 이들은 안다. 인간은 유한하며, 닿고자 하는 그 무언가는 눈앞에 보이지만 아무리 달려도 결국엔 잡을 수 없는 태양과도 같다는 사실을. 그렇다고 그들의 노력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아직 갈 길이 멀 지언정, "태양에게 몇 발짝 더욱 다가간 나"는 내 안에 남기 때문이다. 경계해야 할 것은 오직, "난 이미 태양을 잡았어"라고 자신하는 그 오만함뿐이다. 그 오만함은 나로 하여금 나 자신뿐 아니라 주변의 다른 사람들까지도 섣불리 속단하고 낙인찍게 만든다.


《위키드》의 원작 소설에서 보크가 이런 말을 한다.


“스스로 악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사실 우리랑 다를 게 없어... 정말로 경계해야 할 상대는 자기가 선량하다거나, 다른 사람보다 더 착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이지."
“People who claim that they’re evil are usually no worse than the rest of us… It’s people who claim that they’re good, or anyway better than the rest of us, that you have to be wary of.”


《위키드》 뮤지컬/영화는 원작 소설로부터 많은 부분을 각색했기 때문에 구체적인 이야기의 흐름은 다르지만, 이야기에 심어져 있는 선악구조는 동일하다. 그리고 '위악'보다 '위선'을 더욱 경계해야 한다는 이 말은, 소설과 영화를 동시에 관통하는 주제이다.


'위악'이란, 실제로는 그렇게 악하지 않으면서도, 스스로를 ‘악하다’ 혹은 ‘나쁘다’고 가장하거나 선언하는 태도를 말한다. 반대로 '위선'이란, 겉으로는 선한 척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태도나 행위를 의미한다.


'선'과 '악'이 서로 '도덕적인 척도에서의 반대말' 관계에 있음은 확실해 보이지만, 각 개념이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를 뜻하는지 명확히 정의 내리기는 솔직히 쉽지 않다. 그렇다면 영화 속에서 '선'을 가장하는, 즉 위선적인 모습을 보이는 인물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움직임을 한 번 따라가 본다면 어떨까? 이를 통해 '선'이 무엇인지, 또 그와 반대되는 '악'이 무엇인지 구체화 해보고자 한다.




1. 마법사와 마담 모리블의 위선


《위키드》의 세계에서 마법사는 절대 권력을 가진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 하지만 영화의 끝에서 밝혀지는 그 실체는 허상일 뿐이다. 그는 그리머리를 읽을 줄 아는 척 하지만, 실제로는 그럴 능력이 없는 인물이었다.


《오즈의 마법사》를 다시 한번 들여다보면 마법사에 대한 힌트를 조금 더 얻을 수 있다. 그는 열기구를 탄 채 오즈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서커스단의 마술사였다. 그에게는 오즈 버전의 ‘진짜 능력’, 즉, 마법은 없었지만, 마술사 특유의 손재주를 이용한 여러 가지 기계 장치들을 만들 수 있었다. 에메랄드 성에 들어온 사람들을 맞이하는 거대하고 위협적인 얼굴은 물론이고, 글린다가 타고 다니게 되는 공중부양 비눗방울이나, 엘파바에게 보내는 풍선 초대장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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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런 식으로 만들어낸 ‘환상’과 ‘이미지’를 이용하여 사람들을 홀리고, 권력을 얻었다. 진짜 능력이 없어도 시스템을 잘 조작하여 그럴듯한 환상을 만들어내니, 사람들을 통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건 굉장히 상징적인 구조다. 여기에서 마법사가 만들어낸 가장 거대한 환상은 무엇이었을까? 마법사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하나로 뭉치게 만들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딱 좋은 공공의 적을 그들에게 만들어 주는거야."
"The best way to bring folks together is to give them a real good enemy.”


본인의 능력 부족을 숨길 유일한 방법은 바로 무시무시한 환상을 만들어내는 것. 마법사는 사람들이 분노를 표출할 화풀이 대상, “공공의 적”을 만들었다. 이로써 사람들은 진실로부터 눈을 돌리고 그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겉으로 표방하는 이미지는 정의와 질서였지만, 내면은 비겁함과 기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전 글(1편)에서 설명했지만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두가 그렇듯, 마법사 역시 겉과 속이 다른 인물이다. 그리고 오즈는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세계였다. 눈에 보이는 이미지 메이킹의 고수로써, 그가 이 세계에서 사랑받기란, 너무나 쉬웠을 것이다. 마법사는 이 영화에서 가장 확실하고 선명한, 위선적인 인물이다.


마담 모리블은 마법사에 비해 조금은 더 복잡한 캐릭터인데, 우선 그녀는 막대한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고, 학교에서 가장 존경받는 어른처럼 보였다. 엘파바에게 처음으로 따뜻한 칭찬과 기대를 안겨주었던 사람이기도 하다. 그녀는 엘파바가 더 열심히 노력해서 그녀의 능력을 증명하면, 마법사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꿈을 불어넣어 주었다. 이렇게 모리블은, 겉으로는 학생의 꿈과 성장을 지도하는 인자한 선생님처럼 보였을 뿐 아니라, 학생들을 대할 때 굳이 선한 척 행동하지도 않았다. 예컨대, 그녀는 확실하게 본인에게 필요가 있는 엘파바에게는 친절했지만, 글린다에게는 냉정했다. 글린다가 모두에게 사랑받는 아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는 마법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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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블은 숨김없이 오직 본인의 필요에 의해 움직인, 어떤 관점에선 솔직한 인물이었다. 어쩌면 그녀는 나름의 진심을 다해 엘파바를 딱 본인처럼 키우려고 한 건 아니었을지,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모리블 본인이 본인 삶에 만족하고,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만큼, 그것이 진정으로 엘파바에게 도움이 되는, 엘파바의 미래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선생님, 혹은 부모님들이 흔히 해버리는 실수다.


하지만 의도가 무엇이었든, 제삼자가 대신 선택해 준 길 위에서, 우리는 행복할 수 없다.


영화의 후반부, 엘파바가 결국 마법사에게 저항하는 길을 선택한다. 이 모습은 모리블이 보기엔 모리블 본인이 살아온 인생 전체에 대한 부정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과거 언젠가, 엘파바와 마찬가지로 마법 능력을 가진 모리블에게 선택권이 주어졌을 때, 그녀는 마법사에게 복종하는 길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마법사가 다루기 쉬운 도구가 되었고, 그의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충성을 다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모리블이 그런 본인의 뒤를 이을 후배로 여기고 키워온 엘파바는, 그 모든 게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는 셈이었다.


모리블의 입장에선, 엘파바가 반드시 틀려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본인은 선(善), 엘파바는 악(惡)이어야만 했다. 만약 모든 개인에게 한꺼번에 통하는 객관적인 정답이 없다면, 어쩌면 이게 '선'의 진정한 의미인지도 모른다. '나에게 옳은 것'. 마담 모리블의 위선은, 엘파바가 그녀와는 다른 길을 가기를 선택했을 때 시작되었다. 그 후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엘파바를 마녀라고 낙인찍는 방송을 송출해 버린다.


한 때 어쩌면 진심이었을지도 모르는 선생님이자 인생 선배로서의 선의는, 바로 그녀 자신의 두 손에 의해, ‘위선’으로 자리매김해 버렸다. 타인의 선택을 존중하지 않고, 본인과 다른 길을 간다는 이유만으로 ‘악’으로 규정해 버리는 행위. 그건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자신이 ‘선’으로 인정받고 싶은 강한 의지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움직임 자체가, 본인의 '착한 척', 즉, ‘위선’을 증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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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파바는 마법사에게 인정받고 싶었고, 모리블을 존경했다. 하지만 마법사는 ‘공공의 적’이라는 환상을 만들기 위해 약자를 이용하는 지도자였고, 모리블은 그런 지도자에게 바치기 위한 ‘또 다른 도구’를 키우는 선생님이었다. 어떤 방향에서 살펴보아도, 두 사람 모두 위선적인 인물이 맞다.


그런데 여기에서 따져봐야 할 게 있다. 그렇다면 이 영화 속 ‘악’은, 마법사와 마담 모리블일까?

앞서 언급한 살인자와 자원봉사자의 예시와 비슷하다. 그들이 ‘순수한 선인’이 아니라고 해서, 과연 ‘악인’이라고 분류될 수 있을까? 약자를 핍박하여 공공의 적으로 만드는 행위는 분명, ‘선’이 아니다. 타인을 자기 뜻대로 이용하려다가 잘 되지 않으니 매장해 버리는 행위 역시, ‘선’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런 잘못된 방법을 통해 마법사와 모리블이 이루려던 건 결국, 사회의 평화와 안정이다. 그 목표의 선함에 대해서는 그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다시 영화의 첫 장면으로 돌아가, 마녀의 죽음을 축하하는 노래에서, 시민들은 말한다.


“착한 사람은 사악한 자를 경멸하지! 그들의 삶을 통해 우리 아이들은 배울 거야. 잘못된 행동을 하면 무엇을 잃는지”
"The good man scorns the Wicked! Through their lives, our children learn. What we miss, when we misbehave.


비틀려있을지언정, 마법사와 모리블의 체제를 통해 '선한 사회'는 유지되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 ‘사악한 마녀가 되면 안 된다’라는 가르침을 마음에 새긴다. 선한 의도를 이루기 위해 애꿎은 엘파바에게 마녀라는 낙인을 찍은 것, 즉, 과정은 위선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선하다.


모든 걸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대중은, '선한 자'들이 전하는 이야기를 믿을 수밖에 없다. 그들이 진정 선한 자인지, 그들이 전하는 소식이 진실인 지는 중요하지 않다. 결국 알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그 이야기들을 전해 들은 덕분에 다수의 사람들이 선한 삶을 살고 있다면, 누군가를 희생양 삼아 그 이야기를 만들어낸 자들은, 완벽한 악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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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은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마치 흰색과 검은색 사이에 수없이 다양한 밝기의 회색이 그라데이션으로 펼쳐져 있는 것처럼, 선과 악 사이에는 명확한 단계를 나눌 수 없는 넓은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여기에서 ‘위선’은, ‘완전한 흰색이 아닌, 회색임에도 불구하고 흰색처럼 보이려 하는 행동’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는 마법사와 마담 모리블을 제외하고도 또 다른 위선적인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바로 보크와 글린다이다.




2. 보크와 글린다의 위선, 그리고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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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크는 네사와 함께, 이 영화에서 가장 순수하게 착한 인물처럼 보인다. 하지만 보크는 글린다를 좋아하는 마음 때문에, 관심도 없던 네사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게 된다. 그 선택은 거짓된 동기에서 출발했고, 가장 큰 상처는 그중 가장 약자였던 네사에게 돌아간다. 왜 가장 선한 인물들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아야만 하는 걸까?


보크가 글린다를 좋아하게 되는 구도는, 그저 로맨스를 위한 삼각관계가 아닌, 또 하나의 상징으로 볼 수도 있다. 글린다가 이 영화에서 ‘선’을 대표하고 있다는 관점을 바탕으로 접근해 보자.


‘선’을 표방하는 글린다가 보여주는 위선적 면모에 대해서는 지난 글에서 이미 언급을 했었다. 보크의 데이트 신청을 직접 거절하지 않고, 다리가 불편한 네사와의 데이트를 권한 장면. 모두를 덜 상처 입히기 위해 선택한 착한 길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나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모두를 애매하게 상처 입히는 위선적인 선택이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보크는 뭔가 홀린 듯한 얼굴로, 이렇게 대답한다.


“난 너를 위해서는 뭐든 다 할 수 있어.”
"I would do anything for you."


보크가 이렇게까지 헌신적으로 글린다를 좋아하는 모습은, 앞뒤 가리지 않고 표면적으로 보이는 ‘선함’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일반 시민들의 모습과도 겹쳐진다.


글린다는 선하다 = 글린다를 좋아한다 = 선함을 좋아한다


“글린다를 좋아한다”라는 문장에서 '글린다'라는 단어를 '선함'으로 바꾼다면, "선함을 좋아한다"가 된다. 이 프레임으로 보면, 착한 보크의 이 대사는 이렇게도 읽힌다.


“난 [ 글린다 ] 를 위해서는 [ 뭐든 ] 다 할 수 있어."
= "난 [ 선함 ] 을 위해서는 [ 위선적 행동까지도 ] 다 할 수 있어.”


위 대사 때문이 아니더라도, 보크는 분명 선함을 추구하는 인물이었다.


선함을 추구하는 것이 분명히 나쁜 게 아닌데도 상처받는 이들이 생기는 이유는, 이 세상에서 ‘완전한 선함’은 유지되기 아주 힘들고, 그 속에는 누군가의 위선이 섞여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내면을 들여다보지 않은 채 무턱대고 선함을 추구하다 보면, 어느새 표면적으로 보이는 선함을 쫓아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 쉽다. 위선으로 네사에게 상처를 주었던 보크. 우리들도 정신 차리고 보면,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이 되어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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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린다는 못생긴 검정 모자를 줘버릴 만큼 누군가를 싫어하지 않는다면서도, 친구들의 권유에 못 이기는 척, 모자를 엘파바에게 선물로 주며 파티에 초대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선 그것이 나쁜 행동임을 알면서도, 좋은 마음인 척하며 포장한, 위선적인 선택이었다.


‘선’을 표방하던 글린다. 그녀가 해버린 위선적인 행동들의 파급력은 대단했다. 보크는 좋아하지도 않는 네사와 파티에서 춤을 추었고, 엘파바는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쓴 채 파티장에 등장했다.


그리고 “사실 보크를 거절하고 싶었던” 글린다의 진심을 깨달은 보크는 자신이 바보가 된 걸 알면서도, 눈앞에 있는 네사에게 상처 주는 나쁜 사람마저 되기는 싫었던 모양이다. 그는 마치 처음부터 진심이었던 척, 네사에게 춤을 신청하는 위선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파티 이후로도, 보크의 시선은 언제나 글린다를 향해 있었다.


하지만, 엘파바는 어땠을까?

“사실 엘파바에게 창피를 주려 했던” 글린다. 그런 그녀의 진심을 깨달은 엘파바는, 오히려 정공법으로 대응한다. 창피를 당할지언정, 그녀의 본모습 그대로를 보여주며 홀로 춤추기를 선택한 것이다.


곤란한 상황에서 위선만큼 쉬운 선택은 없다. 착한 이미지를 유지하고 싶었던 글린다는 특히 자주 그래왔다. 그리고 이 달콤한 해결책은 바이러스와도 같아서, 옆 사람의 위선을 목격하는 순간, 나 자신도 죄책감을 덜어내고 편승하기 쉽다. 보크의 선택이 그러했다.


그러나 같은 상황에 놓인 엘파바의 선택은 달랐다.


위선과 가식이 넘쳐흐르는 곳에서 굵직한 진심을 드러내는 것. 누가 보아도 바보 같은 선택이다. 그런 환경에서 진심은 곧잘 무시당한다. 그러나 만약 그 군중들 속에 딱 한 명이라도, 껍데기에 숨겨진 진심을 갈망하던 사람이 있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한 사람의 진심이 담긴 용기는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고, 또 다른 용기가 만들어지는 전환점이 되기 마련이다. 창피함에 정면 승부를 걸었던 엘파바. 그 모습은 글린다의 마음을 울렸다. 글린다는 그녀를 골탕 먹이려 했던 본인의 과거 선택을 후회했고, 엘파바만큼이나 큰 용기를 내어 함께 춤을 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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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쟁이인 글린다가, 사람들이 조롱하던 무대 위에 등장해서 분위기를 바꾸었다. 남들에게 사랑받는 것만큼 중요한 게 없었던 그녀에게 이건 굉장히 어려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내면의 진심을 더욱 우선시한 선택. 이것이 글린다가 변화하기 시작한 전환점이자, 성장의 첫걸음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엘파바가 있었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지점은, 글린다가 태도를 바꾸자 주변의 친구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날을 기점으로, 엘파바에게도 그녀를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봐주고 응원해 주는 친구들이 생겨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선한 이미지’라는 권력을 가진 사람의 영향력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똑같은 말이라도, 나와 비슷한 사람보다는 나보다 더 좋은, 착한 사람의 주장이 더 옳아 보인다. 왠지 '착한 사람'의 의견은, 모두를 위한 이타적인 관점에서 나왔을 것 같다는 환상 때문이다. 결국 '선한 영향력' 역시 '환상'으로부터 나온다.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 사람일수록,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가? 마법사가 힘을 얻게 된 과정과 매우 유사하다.

마법사도, 글린다도, 마법 능력이 없다. 하지만 각자 어떠한 '환상'을 바탕으로 힘을 얻는다. 그리고 마법사는 군중의 환상을 통해 얻은 권력을, 거짓과 이기심을 위해 활용했다. 좋든 싫든 비슷한 길을 걷고 있는 글린다. 그녀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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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마지막 순간, 엘파바는 글린다에게 함께 떠나 세상을 바꾸자며 손을 내민다. 그러나 글린다는 제안을 거절한다. 글린다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마법사와는 달리, 글린다는 엘파바와의 우정을 통해 '내면을 들여다보는 방법'을 경험했다. 완벽하진 않지만, 그녀의 내면은 '진정한 선'을 향하고 있다. 그녀의 선택은 엘파바를 배신한다거나, 세상에 굴복하려는 마음에서 나온 결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 글린다는 날아오르는 엘파바를 지켜보며, 친구의 든든한 우군이 될 수 있는 그녀만의 방법을 고민했을 것이다. 그리고 글린다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녀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즉, 선한 이미지라는 힘을 더욱 단단히 만들어 활용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이 힘만 있다면 글린다는 언젠가 엘파바가 돌아올 때, 마치 오즈더스트 무도회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 앞에 다시 한번 나서서 친구를 안아줄 수 있다. 그것이 이곳에 남기로 한 그녀의 선택에 대한 결과이자 보상이 될 것이다.


‘선함’은 타고나는 성격이 아니다.
그건 모든 순간에 이루어지는 선택들이고,
그 선택에 대해 행동으로 책임지는 태도로 완성된다.


글린다는, 극 중에서 이런 책임을 실천하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이 영화에서 진정한 '선함'을 깨달은 유일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글린다였을 것이다. 그녀는 한 발 한 발, 선함에 가까워지는 선택을 해 나간다.


영화의 파트 1이 끝나기 전, 네사는 이미 보크의 진심을 눈치채버렸다. 과연 보크는, 영화의 파트 2에서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3. 악한 마녀는 서쪽 하늘에 있다.


마법사와 마담 모리블에 의해 ‘악’으로 낙인찍힌 엘파바. 어떤 관점에서 보면, 이 영화 속에서 엘파바가 맡고 있는 역할은 바로 '진실'일지도 모른다. 캐릭터들이 엘파바를 만나면 진실을 마주하게 되고, 결국 서로 다른 선택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글린다의 경우, 오즈더스트 무도회장에서 엘파바를, 즉, 진실을 마주했다. 그리곤 그전까지의 위선을 반성한 후 진정으로 선한 선택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법사와 마담 모리블은 엘파바로부터 위선을 지적받았을 때, 글린다와는 다른 선택을 했다. 마법사와 모리블은 자신의 행동들을 되돌아보거나, ‘무엇이 옳은지’를 다시금 살펴보지 않았다. 되려, 엘파바를 '악', 그 자체로 규정해 버리는 선택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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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관점에선, 이 시스템이 가장 '좋은 것'.
즉, ‘선’이었다.


그들이 쌓아 올린 사회 체제는, 무너져서도 대체되어서도 안 되는, 성역이었다. 그리고 그 시스템에 녹아들지 않는 이들은 ‘악’이었다. 처음엔 이 '악'이라는 자리에 동물들을 놓으려 했지만, 엘파바가 그걸 막자, 바로 그녀를 그 자리에 함께 배치해 버렸다. 하지만, 이렇게 불공평하게 짜여버린 구조에서, 엘파바는 타협하지 않는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악'을 자처하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자처했다'라는 단어가 굉장히 중요하다. 엘파바는 처음으로, 타인에 의해 명명된 것이 아닌, 본인이 직접 선택한 길을 가기로 했다. ('선택'이 가지는 의미에서 파생되는 자유의지, 그리고 선과 악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볼 내용들이 있는데, 이건 다음 글에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겠다) 엘파바가 선택한 그 길은, 마법사와 모리블이 그렇게 이름 붙였기 때문에 '악'이라 불리지만, 다르게 말하면 '그들과 반대되는 방향'일뿐이다.


이쯤 해서 다시 초반의 질문으로 되돌아가 보자.

'악’은 무엇일까? 반대로 '선'은 무엇일까?


앞서 설명한 ‘선함’이 그러하듯이, ‘악함’ 또한 타고나는 본성이 아니다. '선함'이라는 건, 순간의 선택과 그에 대한 책임감 있는 태도가 모여, 조금씩 만들어지는 것이라 이야기했었다. ‘악함’ 역시 마찬가지다. 선택의 순간이 주어졌을 때, 좋은 혹은 나쁜 선택이 계속 쌓이다 보면 향하게 되는 그 ‘방향’. 위키드가 이야기하는 ‘선악’은 바로, '방향'이라고 볼 수 있다.


극 중 피예로가 주도하는 스코어 "춤추듯 인생을 (Dancing Through Life)"에서 등장하는 사다리 구조물이 이 컨셉을 메타포적으로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처음에는 방향을 바꿀 수 없는 고정된 사다리처럼 보였지만, 레버를 내리니 빙글빙글 돌며 움직이기 시작한다. 모두가 고정된 구조에서 경직된 상태로 살아가야 하는 줄만 알지만, 사실 인생의 방향은 생각보다 쉽게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거라는 표현.


스크린샷 2025-09-13 오전 2.03.24.png 레버를 내리기 전에는 일자로만 고정되어 있던 사다리
스크린샷 2025-08-06 오후 3.33.24.png 사실 자유롭게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사다리였다.


온전히 선하거나 온전히 악한 사람은 없다. 모두가 어느 정도의 선함과 악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고, 선한 방향으로 가려고 하는 의지와 행동 없이는, 쉽고 무책임한, 악한 길로 빠지기 쉽다. '난 선한 사람이야' 내지는 '난 악한 사람이야'라는 확신에 빠져 아무런 변화도 시도하지 않는 것. 조금 상징적으로 머릿속에 그려보면, 사다리 레버를 내려보지도 않고 '이 사다리의 방향은 바뀌지 않아' 라며 그 자리에 잠식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위키드》는, 선악의 '방향' 역시 이 사다리들처럼 마구 바뀔 수 있다고 전하고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 사이에서 춤추듯 인생을 살아가며 나만의 방향을 잡아가는 것뿐이다.


결국 선과 악은, 흑백의 기준을 바탕으로 나뉘는 명확한 대상이 아니다. 무수히 많은 밝기의 색깔 사이에서,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하는, 화살표일 뿐이다. 하지만 그 선택들이 마음속이 아닌, 겉으로 드러나게 되었을 때 생기는 ‘이미지’. 우리는 그 이미지 자체를 ‘선’과 ‘악’이라 착각하곤 한다.

마치 글린다와 엘파바의 겉모습만을 보고 그들의 선악을 넘겨짚었던 수많은 사람들처럼 말이다.


마법사와 마담 모리블이 지키려고 하는 '사회 체제'. 그리고 그들이 낙인찍어버린 ‘공공의 적’ 또한 마찬가지다. 여기에서의 '선함'과 '악함'은 모두, 그들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낸 '환상', 그리고 '이미지' 일 뿐이다. 앞서 ‘환상’과 ‘이미지’를 만들어내어 막대한 권력을 얻은 사람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바로 마법사다. 마법 능력이 없다는 비밀을 숨긴 그에게 필요한 것은 복잡한 진실이 아닌, 명확한 이미지였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주어진 재능을 마구 활용했다.


‘이미지’로서 형성된 선과 악은, 명확한 ‘절대선’과 ‘절대악’으로 자리 잡아버리기 쉽다. 마치 '글린다', 그리고 '엘파바'가 수년간 고통받았던, "얜 무조건 착할 거야", 내지는 "얜 무조건 나쁠 거야"라는 프레임처럼. 또한, 시스템의 유지가 ‘절대선’으로 설정되어 있는 이상,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타당성을 질문하며 시스템의 유지를 위협하는 모든 것들이, 전부 없어져야 할 ‘절대악’이니까.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엘파바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 나를 찾으려거든, 서쪽 하늘을 봐!"
"So if you care to find me, look to the Western 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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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마녀를 자처한 그녀는 서쪽 방향의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전까지의 에메랄드 시티는 ‘선’ 그 자체로써, 모든 방향의 중심, 정 중앙에 위치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디에서든 그저 노란 벽돌길만 따라가면, 도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부턴 다르다. 에메랄드시티는 엘파바가 날아가고 있는 서쪽 하늘의 반대 방향에 위치하게 되었다. 결코 기존의 시스템을 절대적인 기준점으로 삼지 않겠다는, 엘파바의 저항이 상징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이다.


그녀로 인해, 선함의 위치는 더 이상 고정된 좌표가 아니게 되었다. 계속해서 고민하고, 찾아 나서야 하는.

결과가 아닌, 과정 그 자체가 된 것이다.


엘파바의 저항, 그리고 자유의지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더욱 자세히 다루어 보기로 하고 넘어가겠다.




4. 그 뒤에 남은 사람들


영화 <위키드>는 우리에게 묻는다.


“이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왜 했는가?”


지금까지 오즈에서의 모든 선택은 결국, 마법사와 마담 모리블이 만들어놓은 이분법적인 구도, 즉 ‘악한 마녀 대 선한 시민’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 프레임 안에서 누군가는 좋은 이미지로 살아남기 위한 위선적인 선택을 했으며, 다른 누군가는 본인의 실수를 책임지기 위한 용기 있는 선택을 하기도 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속마음과 상관없이 부정 혹은 방관을 통해 책임을 회피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끝에서 누군가는, 희생자로 남거나 마녀로 낙인찍혀 버린다.


이러한 구조는 실제로 우리가 속한 조직이나 사회, 특히 기업 같은 집단 안에서도 종종 반복되곤 한다. 구성원이 기존 질서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불편한 진실을 드러낼 때, 많은 조직은 그 사람을 문제적 존재로 낙인찍고 고립시키는 방식으로 반응한다. 겉으로는 ‘선함’과 성장을 추구하고 합리성과 협업을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기존 시스템을 위협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만, ‘선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진짜 문제 해결보다, 시스템을 유지하고 명확한 구도를 지키는 일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경우 특히 더욱 그러하다. 그것이 많은 수의 사람들을 통제하면서 공동의 목표를 이루어낼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안에서, 우리들 모두가 엘파바처럼 서쪽 하늘로 날아오르지는 못한다. 그것이 물론, 사회 통념적으로 추구해야 할 ‘선함’이라고 여겨지고 있지도 않다. 살아남기 위해, 우리들은 진심을 가리고 포장해야만 한다. 그 과정은 우리들을 점차 위선에 빠져들게 만들며, 결국엔 우리가 방향을 잃고 ‘선한 선택’으로부터 멀어지도록 한다.


엘파바가 떠나버린 뒤 노란 벽돌길에 남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 걸까?

보크와 네사는, 그리고 피예로는, 이분법적으로 나뉠 수 없는 선과 악의 무지개 사이에서, 과연 그들만의 답을 찾아낼 수 있을까? 선택의 순간에 그들은, 우리는, 어느 방향을 보고 있을까?



[2부 끝 - 다음 편에 계속]




# 하선의 꿈보다 해몽 : 영화 《위키드 1》
1️⃣ 오래 보아야 예쁘다 [바로가기]
2️⃣ 글린다는 엘파바를 배신했나 ( ☑️ 방금 다 읽었어요! )
3️⃣ 엘파바가 서쪽 하늘로 향한 이유 [바로가기]
4️⃣ 양철 나무꾼은 어떻게 됐을까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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