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보다 해몽 #3 중력을 이겨내고 일어서는 힘
서쪽 하늘로 날아오른 마녀. 오즈에 남아 마녀를 올려다보는 남쪽의 글린다. 엘파바가 빗자루를 타고 날아오르기 전, 그녀에겐 '악한 마녀'라는 낙인이 찍혔다.
엘파바는 '악함'이라는 방향으로, 글린다는 그 반대인 '선함'이라는 방향으로 달려간다. 두 친구의 서로 다른 선택으로 인해, 선과 악의 화살표는 팽팽하게 유지된다. 각자 선과 악을 대표하는 아이콘이 되어버린 이상, 세상의 척도는 그들의 움직임을 중심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엘파바와 글린다, 그들은 어떻게 이런 힘을 가지게 된 걸까? 그들의 관계를 통해 성장과 저항, 자유 의지에 대해 생각해 본다.
영화 초반, 엘파바와 글린다는 룸메이트가 되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아주 싫어한다. 그 감정의 소용돌이는 "What is This Feeling (이 낯선 느낌)"이라는 두 사람의 듀엣 스코어에 잘 담겨 있다. 하지만 그 가사를 잘 따라가 보면, 이 노래에 단순히 '혐오'의 감정만이 담겨있는 건 아니라는 걸 느낄 수 있다. 오히려 이 노래는 두 사람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타인'을 강하게 인식하고, 감정을 느끼기 시작하는 순간을 그리고 있다.
"Loathing, unadulterated loathing"
"밥맛, 순도 백 퍼센트 밥맛"
후렴구에서 주요하게 반복되는 단어 'loathing'은 한국말로 '밥맛'이라고 번역되고 있다. 번안 뮤지컬의 특성상 한국어로 발음해도 찰진 단어를 찾다 보니 다소 귀엽게(?) 표현된 것 같은데, 사실 loathing이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는 '밥맛'보다는 조금 더 강하다. 오히려 '혐오', '경멸'에 가까울 정도로 아주 강력한 부정적 감정을 나타내는 단어다.
그리고 unadulterated(순수한,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라는 단어의 사용도 재미있는데, 그 이유는 '불순물이 섞인 상태를' 의미하는 'adulterated'라는 단어에서 'adult', 즉, '성인'이라는 단어가 함께 들리기 때문이다. 두 단어가 비록 어원은 다르지만 철자와 발음이 유사하다 보니, 이 노래에서 활용되는 unadulterated는 '아직 어른이 되지 않고 순수한', 즉 '미성숙한'이라는 의미로도 느껴진다. 서로를 향해 느끼는 미성숙한 혐오의 감정. 두 사람이 아직 사춘기를 겪는 소녀들처럼 행동하며 서로를 향한 강한 감정을 교류하고 있다는 점도 이 관점을 강화하고 있다.
위 컨텍스트를 바탕으로 노래를 다시 들어 보자.
이게 무슨 감정이지? 불길처럼 뜨거워. 이 감정에 이름이 있을까?
그래, 밥맛. 순도 백 퍼센트 밥맛.
What is this feeling? Fervid as a flame. Does it have a name?
Yes. Loathing. Unadulterated loathing.
근데 이런 완전한 혐오 속에서 묘한 희열이 느껴져.
순수하고 강렬한 느낌. 갑작스럽게 찾아온 감정이지만 왠지 아주 오래갈 거 같아.
너는 정말 밥맛, 내 평생토록 밥맛일 거야!
There's a strange exhilaration in such total detestation.
It's so pure, so strong. Though I do admit, it came on fast, still, I do believe that it can last.
And I will be loathing, loathing you my whole life long!
그 이름을 모를 정도로 처음 느껴보는 강렬하고 뜨거운 감정. 당장은 '혐오(loathing)'라는 단어로밖에 이 감정을 표현할 수 없지만, 그 안에서 '묘한 희열(strange exhilaration)'을 느끼는 두 사람. 그 감정이 과연 이들이 노래하는 대로 '완전한 경멸'일까?
가만히 듣다 보면, 이 가사는 흔한 로맨스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처음 만난 두 주인공들이 서로를 강하게 싫어하는 것처럼 행동하면서도 지나칠 정도로 상대방을 신경 쓰는 상황. 사실은 서로에게 이끌리고 있지만 그 감정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일단 부정한다. 이 노래는 혐오의 감정을 과장해 표현하면서, 실은 그 속 깊숙하게 숨어있는 호기심과 긴장, 감정적 반응을 드러내고 있다.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음에도, 겉모습 때문에 사회적으로 미움받으며 살아온 엘파바. 그녀 입장에선 내면의 선악과 상관없이 겉모습만으로 사랑받는 글린다의 존재는 불공평의 상징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반대로 사회적 규범과 시선에 끊임없이 자신을 맞추며 '좋은 사람'으로 평가받기 위해 노력하던 글린다. 그녀는 그 모든 틀에서 벗어나 언제나 미움받는 길을 선택하는 엘파바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상황만 놓고 보면 이들은 서로를 싫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면서, 처음으로 자기 감정이 혼란스럽게 요동치는 걸 느낀다. 왜였을까?
정 반대의 특징을 가진 두 사람.
'혐오'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던 부정적인 감정은, 실제로는 나의 내면을 직선으로 꿰뚫어 보는 상대방에게 느낀 강한 거부감이었을지도 모른다.
룸메이트로서 함께 지내며, 엘파바는 글린다가 보기만큼 선하지 않다는 사실을, 글린다는 엘파바가 보기만큼 악하지 않다는 사실을 느꼈을 것이다.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위선적인, 혹은 위악적인 행동을 하던 두 사람. 정 반대의 상황에 놓인 상대방을 바라보며 가장 처음 드는 감정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나의 세계에서 나의 규칙으로 살아가던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느낄 수밖에 없는, 본능적인 거부 반응이다. 감정적으로, 철학적으로, 위선과 위악은 이렇게 교차하며 서로를 인식하기 시작한다.
분명 상대방에게 향하며 시작되었던 이 감정은, 결국엔 '내가 숨겨두던 내 모습'으로 향하게 된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느낀 '혐오'의 감정을 통해,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있던 자기 자신을 마주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 뒤바뀐 렌즈를 통해 서로를 다시 바라보게 된 순간, 화해의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그동안 선한 '척'하며 살아온 글린다. 그녀는 온전히 선하기만 한 사람이 아니었다. 글린다가 작정하고 엘파바와 경쟁하거나, 따돌리거나, 험담 하는 과정에서 그녀는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결코 선한 행동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러나 글린다는 찰나의 잘못된 선택으로, 엘파바에게 못생긴 모자를 선물하며 파티에 초대해 창피를 주려 한다. 그리고 그 직후, 엘파바가 글린다를 위해 마담 모리블에게 무리한 부탁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글린다는 눌러오던 양심을 더 이상 숨길 수 없었다. 이때 글린다는 심한 죄책감과 함께 아주 복잡한 감정을 느꼈고, 결국 모두가 조롱하던 엘파바의 춤에 동참하기를 선택한다. 그건 단순한 사과가 아니라, 새로운 관계의 시작을 받아들이겠다는 선언과도 같았다.
엘파바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그동안 미움받는 데에 익숙해진 나머지, 오히려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공격적으로 반응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그녀 역시도, 글린다만큼이나 사랑받고 싶은 한 사람일 뿐이었다. 사람들 앞에서는 위악적으로 행동할지언정, 그녀의 내면은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엘파바의 눈엔 보였을 것이다. 그녀가 그토록 혐오하는 글린다의 위선은 결국 '사랑받고 싶은 마음'에서 생겨났고, 엘파바 본인의 위악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이. 여기에서 엘파바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동생 네사를 통해 글린다의 또 다른 위선을 예감하지만, 동생의 부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글린다를 믿어보기로 했던 엘파바. 그 기대가 오즈더스트 무도회장에서 배신당했을 때에도, 엘파바는 흔들리지 않고 본인의 진심을 내보이는 선택을 했다. 그건 아마 엘파바가 글린다의 마음속 숨겨진, 선한 진심을 조금은 엿보았기 때문에 내딛을 수 있는 걸음이었을 것이다.
엔딩 직전, 엘파바는 글린다에게 함께 떠나자고 손을 내밀지만 글린다는 이를 거절한다. 앞선 글에서 설명했듯, 이 장면은 '단절'이 아니라, 서로가 자신의 역할을 독립적으로 선택하는 순간이다. 엘파바는 '악'이라는 이름을 수용함으로써 본인이 직접 사회적 낙인의 기준점이 되길 선택하고, 글린다는 자신의 위치에서 '선'을 책임지고자 했다.
이 우정의 흐름은 존재의 유무(有無), 즉 '있음'과 '없음'에 대한 형이상학적 메시지를 떠오르게 한다.
무언가가 '있음'은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없음'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으면 '있음' 역시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무언가가 '없다'라는 상태를 설명하지 않고서는, 그것이 '있다'라는 상태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빛과 어둠, 선과 악 역시 이와 마찬가지의 관계에 있다.
'선'은 '악'이 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다. 반대로 '악'도, '선'의 존재를 통해 정의된다.
극의 마지막에 각자 '선'과 '악'의 자리를 선택한 글린다와 엘파바. 그들은 서로를 강렬하게 마주하고 교류하며 갈등한 덕분에 자기 자신을 또렷하게 이해할 수 있었고, 비로소 각자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즉, 엘파바가 '악'을 직접 자처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었던 이유엔 글린다가 있었고, 글린다가 더 '좋은', 즉, 선한 선택을 내릴 수 있게 된 기반엔 엘파바가 있었다. 서로의 존재를 통해 자신의 자리를 정의 내린 셈이다.
《위키드》는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진짜 성장과 변화는 혼자 이루어내는 것이 아니라고. 가장 날카롭게 부딪혔던 존재와 감정을 주고받는 것. 우리는 그 과정에서 진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글린다와 엘파바는 서로를 통해 스스로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 둘의 선택은 정 반대 방향을 바라보고 있지만, 완벽히 평행하다. 우정이란 결국, 같은 곳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세계를 보면서도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곁을 내주는 일이다. 서로를 통해 선과 악을 그들의 문법으로 다시 정의해 낸 이 두 사람의 관계처럼.
극 중 피예로는 중반부까지 그저 느슨하고 무책임하게 살아가는 사람처럼 보인다. 노래 "Dancing Through Life (춤추듯 인생을)"을 통해 그러한 자신의 가치관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아는 것 말곤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아.
그냥 인생일 뿐이야, 그러니 춤추듯 흐르자!
Nothing matters but knowing nothing matters.
It's just life! So keep dancing through!
피예로는 이렇게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노래를 부르고 있지만, 이전 글(2편)에서도 언급했듯 그는 고정되어있던 사다리의 레버를 내려버림으로써, 멈춰있던 사람들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는 글린다와 엘파바 각각에게도 감정적 거울처럼 작용했다. '자유'를 쫓는 그의 태도는 두 사람을 가두어두던 '선'과 '악'이라는 구분선을 흐트려놓았고, 이를 통해 글린다가 느낀 순간적인 해방감은 그녀로 하여금 사회적 긴장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였다. 글린다는 아주 자연스럽게, 이 흐름에 합류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반면, 엘파바는 이런 피예로에게 끌리면서도, 그가 상징하는 '세속적인 무책임함'에 쉽사리 섞이지 못했다. 엘파바는 글린다와는 달리, 춤추기를 시작하는 것조차 서툴렀다. 그가 제시하는 '자유'는 엘파바에게 역시 매력적이었지만, 동시에 본인이 가질 수 없는 이상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피예로는 글린다와 가까워지고 있었고, 엘파바는 그 관계를 보며 점점 더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 그 마음은 또 다른 노래 "I'm Not That Girl"을 통해 표현되고 있다.
너무 먼 꿈을 꾸지 마, 네가 어떤 모습인 지 잊지 마.
Don't dream too far, don't lose sight of who you are.
부드러운 곡선의 금빛 머리칼. 그는 그런 소녀를 선택할 거야.
그리고 내가 그 소녀가 아니란 건 누구나 다 알지.
Gold hair with a gentle curl. That's the girl he chose.
And Heaven knows I'm not that girl.
엘파바는 '사람들은 나 같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라며 스스로를 낙인찍어둔 채 살아왔다. 그런 엘파바가, '머리를 비우고 흐르듯 살자'라고 노래하는 피예로의 말에 완전히 공감할 수 있었을까? 흐르듯 사는 건 아름다운 글린다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엘파바의 '흐름'은, 자연스럽게 찾아오지 않았다. '변화하겠다'라는 그녀의 결심, 즉 '선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첫 번째 선택은, 오즈더스트 무도회장에서 홀로 시작한 서투른 춤이었다.
이 외로운 춤은 글린다의 마음을 울렸다. 그리고 이들의 변화는 글린다가 엘파바의 춤에 합류하는 선택을 함으로써, 비로소 완성된다. 글린다와의 듀엣을 통해 엘파바 역시, '춤추며 흐르듯'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한 걸음을 내디뎠다. 이렇게 오즈더스트 무도회장에서 벌어진 두 사람 갈등의 폭발, 그리고 화해를 그리며 이 노래는 끝이 난다.
춤을 추자, 즐겨봐 오즈더스트. 먼지로 돌아갈 인생이잖아!
신기하지. 춤추다 보면 우리 인생은 이만큼이나 달라질 수 있어!
Dancing through life, down at the Ozdust. If only because dust is what we come to!
And the strange thing: Your life could end up changing while you're dancing through!
세상에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머리를 비우자던 이 노래는 사실, 우리 모두 변화할 수 있다는 희망을 노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희망은, '선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누군가를 정의하는 주체는 언제나 사회였다. 하지만 그 정의가 틀렸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그《위키드》는 그 질문에 이렇게 답하고 있다.
스스로를 정의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짜 자유를 가진다.
이전 글(1편)에서 다루었듯, 엘파바는 처음엔 외모를 통해 받아들여지는 것이 곧 자기 존재의 완성이라고 믿었다. 그녀는 사회가 요구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바꾸면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는 환상을 가졌지만, 마법사를 만나 진실을 깨닫게 되며 모든 기대는 무너진다. 마법사는 마법을 쓰지 못하고, 동물들을 억압하고자 하며, 허상으로 권력을 유지하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를 존경했던 엘파바는 곧 깨닫는다. 자신이 꿈꾼 '구원자', 혹은 '보호자'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걸. 한때 자신을 구조해 줄 것이라 믿었던 세계는, 사실 자신을 구속하고 통제하려는 구조일 뿐이었다.
그 안에서 번쩍 눈을 뜬 엘파바는, 더 이상 자신을 증명하려 하지 않기로 마음먹는다. 엘파바는 세상이 정한 '악'이라는 낙인을 정면으로 받아들였다. 이것이 이 영화 속 엘파바의 두 번째 선택이었다.
내 안의 뭔가가 변했어. 더는 예전 같지 않아.
이젠 그만둘 거야. 다른 이들을 위해 놀아나는 것.
Something has changed within me. Something is not the same.
I'm through with playing by the rules of someone else's game.
이젠 중력을 벗어날 거야. 나 한 번 중력을 벗어나 볼래. 날 끌어내릴 순 없어.
It's time to try defying gravity. I think I'll try defying gravity, and you can't pull me down.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노래, "Defying Gravity (중력을 거슬러)"는 단순한 반항이 아니다. 그녀가 만들어갈 그녀의 정체성에 대한 선언에 가깝다. 그녀는 더 이상 사회의 기준에 자신을 끼워 맞추지 않고, 오히려 그 기준의 부당함을 역이용한다. 이건 단순한 태도 변화가 아니다. 그동안 피하고 싶었던 낙인을 스스로 끌어안고, 그 안에서 새로운 자아를 세우는 과정이다.
"그래, 내가 '악'이야.
그러니까 이제부턴 내가 직접 정의할게. 진짜 '악'이 뭔지."
그리고 엘파바는 서쪽 하늘로 자유롭게 날아오른다. 중력을 거슬러서.
중력(Gravity)은 물리적 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속한 세계의 규범, 억압, 기대의 상징이기도 하다. 엘파바는 그 힘에 저항하면서도, 그 중력을 이겨내고 더 높이, 자유롭게 도약하는 선택을 했다.
그렇다면, 자유란 무엇일까? 앞서 학생들에게 '자유'를 설파하던 피예로는, 우리에 갇힌 새끼 사자를 구하는 과정에서 엘파바와 교류하게 되면서 중요한 진실을 깨달았다. 각자의 자유를 억누르는 규범과 중력의 무게가 모두에게 동일하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사회적 규범은, 피예로나 글린다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손쉽게 지키고 한 번쯤은 가벼운 일탈처럼 어겨볼 수도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엘파바, 혹은 말하는 동물들처럼 겉모습으로 인한 오해와 핍박을 받던 이들에게는 더더욱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자유에 대한 재미있는 사실은, 얼마 만큼의 '중력'이라는 억압이 존재할 때에 비로소 발휘될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그 중력의 힘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이 힘을 추친력으로 전환했을 때 더 강력한 동력이 탄생한다. 이 역설적인 구도는 중력과 만물의 과학적 관계성에 기반하고 있는데, 앞서 언급했던 유무(有無) 또는 선악(善惡) 관계와도 이어진다.
좀 더 쉽게, 예를 들어서 생각해 보자. 우리는 어떻게 하면 바닥에서 일어날 수 있을까? 바로, 바닥을 밀어내는 힘과 의지를 통해서다. 여기까지만 생각하면, 우리를 땅으로 끌어당기는 중력은 우리를 '일어날 자유'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나쁜 힘이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일어날 수 있다'는 것만이 자유의 전부는 아니다. 단지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론 진정한 자유를 가졌다고 보기 어렵다는 말이다. 정말 자유로우려면, 우린 자리에서 일어난 후, 원하는 방향으로 걸어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만약 우리를 땅바닥으로 끌어당기는 중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린 과연 걸을 수 있을까? 중력이 존재하지 않는 우주에서 우리는, 나의 의지만으론 그 어느 곳으로도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영화 《그래비티 (2013)》에서 이 지점에 대해 아주 구체적이면서도 감동적이게 연출했는데, 이 내용에 대해선 언젠가 별도의 글을 통해 다루어 보겠다.)
요점은, 우리를 땅으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힘을 딛고 일어설 수 있다는 이야기다. 보이지 않는 힘에 끌려가듯 밑바닥에 쓰러질 것 같은 그 순간이, 바로 가장 큰 반동을 만들어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라는 말이기도 하다. 날 끌어내리는 중력을 '방향'으로 전환해 내는 의지와 용기가 있다면, 우린 쓰러지지 않고 앞으로 걸어 나갈 수 있다. 만약 중력이 없다면 우리는 어느 곳으로도 나아가지 못한 채 허공 속에 멈춰 있을 수밖에 없다. 그 중력을 자유자재로 이용할 수만 있다면, 더 강한 중력일수록 더 강한 추진력을 만들어내기 마련이다. 엘파바가 성장을 코앞에 두고 먼저 넘어야 할 산, 즉 사회적 편견이, 바로 이 중력이었다.
억압이 있어야 저항이 가능하며, 저항이 있어야 비로소 의지와 선택이 탄생한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의 의미이며, 영화의 마지막 순간, 엘파바는 이것을 깨달았다. 이 주제는 이전 글(2편)에서 언급한 성경 속 '선악과(善惡果)' 이야기와도 연결되고 있다.
신이 먹지 말라고 경고했던 선악과(善惡果)를 베어 물은 대가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
'선'과 '악', 즉, '좋음'과 '나쁨'을 알게 해주는 과일을 먹은 것뿐인데, 왜 그들은 신과 함께 영생을 누리는 기회를 잃어야만 했을까?
신은 선(善)이다. 그리고 그에 반하는 모든 것은 악(惡)이다. 신의 뜻을 따르는 천사는 '선'하고, 그들을 신의 규범으로부터 멀어지도록 유혹하는 악마는 '악'하다고 규정된다. 신이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했다는 말은, 신은 그들이 선악을 직접 판단할 수 없기를 바랐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선과 악을 판단하고 규정하는 건 신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는 절대적 존재인 신의 뜻을 거슬러 선악과를 베어 물었고,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오직 신만이 그 기준점이었던 선과 악을 인간이 직접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건, 다르게 말하면 "선과 악의 판단 기준이 인간의 머릿수만큼 늘어났다"라는, 즉, 더 이상 선과 악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이 사라졌다는 의미다. 더 나아가면, 이 선택을 통해 인간 개개인이 작은 신과 같아졌다는 뜻으로도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 만큼 '자유'라는 힘은 세상 그 무엇보다도 강력하다. 이 선택은 신을 노하게 했지만, 그와 동시에 인간에게 이 막대한 힘을 부여했다. 결국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야 했던 이 형벌은, 신의 눈높이에 이르는 힘을 얻게 된 그들이 받아야 했던 대가였던 것이다. 그렇게 된 이상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할 지는 아무도 가르쳐줄 수가 없다. 그것이 바로 '자유'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인간에게 달려있을 뿐이다.
자유의지는 어떠한 제한을 거스르는 선택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 '선택' 뒤에는, 필연적으로 그에 합당한 대가가 따라오기 마련이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던 신의 제약은, 어떠한 관점에선 엘파바가 하늘 위로 날아오르지 못하도록 땅으로 끌어당기던 중력과 같다. 혹은, 엘파바를 핍박하고 옥죄던 사회 시스템과도 유사하다. 하지만 신의 뜻을 거스르고 일어서는 힘, 즉, 자유의지가 있다면, 우리는 땅을 딛고 일어나 서쪽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다. 우리가 '떨어지는가' 아니면 '날아오르는가'는 우리의 '일어설 의지', 즉 중력에 대한 자유의지에 달려있다.
절대적 규범에 반(反)하여 스스로 선택함으로써 비로소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 된 아담과 하와처럼, 엘파바 역시 사회가 부여한 금기를 넘어서며 자기 자신을 정의한다.
이 장면은 단순히 마녀가 날아오르는 장면이 아니다. 한 개인이 사회의 시선을 해체하고, 그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장면이다. 우리가 진정 싸워야 하는 대상은, '너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멋대로 규정해 버리는 세상의 말들이다.
그 말들에 맞서 내가 나를 스스로 규정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주체가 된다.
엘파바는 그 과정을 룸메이트 글린다와의 갈등을 통해 한 차례 배웠고, 이를 통해 한 발자국 나아가본 경험이 있었다. 그녀의 용기있는 선택은 우정이라는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역시 그것이 진정한 학교의 역할이다!) 엘파바는 그 경험이 있었기에, 세상을 상대로 한 번 더 똑같은 싸움을 걸어볼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영화의 끝에서 엘파바는 이 모든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스스로의 방향과 존재를 선언하는 인물이 되어 있었다.
엘파바와 등을 지게 되는, 정반대 방향의 길을 선택한 글린다. 그녀는 엘파바가 정의하는 '악'의 구도에 맞서는 '선'의 얼굴이 되었다. 여러 차례 언급했지만, 이건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을 인정하고 절대화하려는 선택이 아니었다. 두 개의 극단을 통해 오히려 그 사이의 균형점, 즉 새로운 '합'으로 나아가기 위한 정반합(正反合)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합(合)'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정(正)'과 반(反)'의 갈등이 필연적으로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글린다의 결정은, 스스로를 '온전히 착한 사람'이라고 믿는 사람이라면 절대 내릴 수 없는 선택이었다. 오히려 자신이 '선하기만 한 존재'가 아닌 만큼, 상대편 역시 '악하기만 한 존재'가 아니란 사실을 인정해야만 낼 수 있는 또 다른 방식의 용기였다. 만약 글린다가 여전히 '착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엘파바가 함께 떠나자고 제안했을 때 그 요청을 명확히 거절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혹은 교묘히 빠져나갈 여지를 남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순간, 엘파바의 손에 이끌리는 대신, 분명한 자신만의 입장을 취했다. 그 장면에서 글린다의 내면은 복잡하게 흔들리고 있었지만, 그 모든 감정과 책임감을 받아들이고, 감정이 아닌 의지에 기반하여 선택을 이끌어냈다. 또한, 그 선택은 그녀 스스로를 직접 규정하며 주체가 되는 선언이기도 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글린다의 분명한 성장을 확인할 수 있다.
엘파바도, 글린다도, 각자의 선택과 움직임을 통해 동일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나를 규정하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다.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가장 위대한 선택이다.
이건 초록 마녀의 이야기이자, 완벽하지 않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
엘파바는 '악'이라는 이름을 '지명당한' 것이 아니라, 직접 선택했다. 글린다 역시, '선'이라는 무거운 역할을 직접 선택했다. 그리고 어떤 이름이든 본인의 의지로 직접 선택한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절망의 낙인도 가식적인 허영도 아니다.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은 두 손에 주체성을 쥐어주며, 판을 뒤집을 수 있는 열쇠가 된다. 더 이상 주도권이 타인(마법사 혹은 마담 모리블)에게 있지 않기 때문이다.
주어진 환경에 의해 정 반대에 위치되어 자라온 엘파바와 글린다. 그들은 서로 교류하고 마찰하면서 우정을 피워냈다. 그리고 또 한 번, 본인들의 선택으로써 다시 한번 정 반대에 서게 되었다. 그 선택은 각자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진심에서 비롯되었고, 서로를 등진 채 달려 나가는 발걸음에는 언젠가 다시 마주 보고 만나리라는 희망이 담겨 있다.
이 영화는 두 소녀의 세계가 서로 충돌하고 더 나은, 더 큰 세계로 진화되어 가는 아름다운 과정을 그렸다.
이런 생각 끝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What is This Feeling?"과 "The Wizard and I"의 장면(이전 글에서 설명)을 비교해 보면, 뭉클한 기분이 든다. 엘파바의 얼굴에 내리쬐던, 엘파바가 그렇게 싫어하던 글린다의 핑크색 조명이, 그녀의 초록색 얼굴을 평범한 피부색으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글린다와 함께일 때, 엘파바는 평범한 소녀일 뿐이었다.
스스로를 정의할 수 있는 사람만이 이 세상을 다시 정의할 수 있다.
그리고 나 자신을 정의하는 힘은, 나와는 정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생겨난다. 이건 정해진 답이 없는 질문이자, 한 번에 끝낼 수 없는 숙제다. 우리 모두는 춤추듯 흐르며 언제나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만간 개봉할 영화 2편에서 엘파바와 글린다가 어떤 문법으로 세상을 정의해 나갈지 기대해 본다.
[3부 끝]
# 하선의 꿈보다 해몽 : 영화 《위키드 1》
1️⃣ 오래 보아야 예쁘다 [바로가기]
2️⃣ 글린다는 엘파바를 배신했나 [바로가기]
3️⃣ 엘파바가 서쪽하늘로 향한 이유 ( ☑️ 방금 다 읽었어요! )
4️⃣ 양철 나무꾼은 어떻게 됐을까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