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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디대디 Feb 04. 2023

사랑과 우정사이

사랑이 별거냐.

아내와 한창 연애하던 때,

약속시간이 지난 지 이미 3시간, 카페 문이 열리고 아내가 걸어온다.

"미안 내가 좀 늦었지?"

"아니 괜찮아. 공부하면서 기다리느라, 뭐 먹을래? "


아내는 내 첫사랑이다.

‘키 크고 늘씬한 공대생 여자를 만나게 해 주세요!’

라는 나의 간절한 기도가 먹힌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 이상형에 가까운 아내를 만난 건 우연이였다.

손만 잡아도 온몸에 피가 솟구치고, 주말 동안 짧은 만남이 아쉬워 어떻게 던 월요일 아침에 얼굴 한 번 보자고 졸라댔던 시절이 있었다.


요즘 넷플릭스에서 드라마 ‘사랑의 이해’를 재밌게 보고 있다. 주인공들의 가슴 시린 이야기가 흥미로우면서도 씁쓸하다. 드라마에서 처럼 애절한 사랑은 아니어도, 가슴 뛰는 사랑을 했던 우리는,

이제 함께 있어도 서로의 얼굴이 아니라, 각자의 핸드폰을 보는 것이 익숙하다.


아들하나 있는 맞벌이 부부의 아침은 분주하다. 매일 누가 어린이집에 등원을 하고 하원을 할지가 네이버 캘린더에 정리되어 있고, 일정에 따라 각자 등원 준비 그리고 출근 준비에 바쁘다. 내가 먼저 출근을 하는 날에는 오후 5시 즈음해서 퇴근을 해 아들의 태권도 학원으로 향한다. 태권도를 마친 아들을 받아 집으로 가는 길. 자동차 뒷 자석에는 저녁용으로 산 반찬이 서서히 식어가고 있고, 아들은 졸린지 눈을 비비고 있다. 마음이 급해 엑셀을 더 강하게 밟는다. 졸려서 안아 달라는 아들을 들쳐 메고 서둘러 집으로 들어온다. 희미하게 온기가 남아있는 반찬을 대강 접시에 담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햇반과 함께 아들 저녁을 먹인다.


"이제 그만 먹을래" 반찬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지, 그만 먹겠다고 선언하는 아들을 보면서 짧게 한숨이 나온다. 혹시라도 아빠를 닮아서 키가 작지는 않을지 걱정이 앞서지만, 엔간히 맛있지 않고는 입이 짧은 우리 아들을 이 이상 먹이는 것은 쉽지 않다. 더 먹일까 하다가 이내 포기하고 아이가 남긴 반찬과 밥을 대충 입으로 넣어 처리하고는 목욕물을 받는다.

"쏴 아"

 물이 잘 받아지는지 대강 살핀 후, 물이 식을까 염려되어 욕실문을 닫는다. 짧게 식사를 마친 아들은 어느새 거실 소파에 걸터앉아 있다. 손에는 까만 리모컨을 쥐고선, 방금 욕실에서 나온 나를 보고는 머쓱히 웃는다. 속에 영감이 들은 건지, 부모가 눈치를 너무 줘서 그런지 몰라도 눈치를 자주 보는 우리 아들을 위해 마음에도 없는 말로, 상냥히

"봐도 돼~ 대신 물 다 받으면 아빠랑 목욕하자"

'뭐, 티브이가 바보상자라고 해도 설마 우리 아들이 바보가 되겠어. 아들도 퇴근했으니 좀 쉬어야지. '그냥 내 마음대로 자위하며, 티브이를 보게 내 버려둔다.

 

사실, 아까부터 거실 바닥에 뒹굴어 다니는 온갖 장난감들과, 포켓몬 카드들 그리고 종이 접기의 흔적들이 눈에 거슬려 미치겠다. 빨래 바구니에는 어제 건조기에서 꺼내놓고 미쳐 개지 못한 빨래 들이 가득 차 있고, 싱크대에는 오늘 먹은 것들이 제멋대로 쌓여있다. 또 짧은 한숨이 새어 나온다. 아들 앞에서는 한숨을 쉬지 않으려고 하는 편인데, 나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한숨은 어쩔 도리가 없다. 뭔 일인가 아들이 잠시 내 눈치를 보지만 이내 티브이로 눈을 돌린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깔깔 웃어대는 아들을 보면서, '그래, 일하자 일, 내 일이니까' 속으로 신세한탄을 하면서 하나 둘 어지러운 것들을 정리해 나간다. 마지막 식기를 대충 헹궈 식기세척기 안으로 집어넣고 물기가 고무장갑 안으로 들어갈까 조심스럽게 장갑을 벗어 싱크대위에 가지런히 걸쳐놓는다. 목이 탄다.


물 한잔 마시고, 욕실문을 열어 목욕물을 확인한다.

"자 이제 티브이 끄고 들어오세요"

"아니 이거 하나만 본다고 했잖아"

나는 분명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없는데, 오늘도 어김없이 아들의 18번이 나온다. 일명 "이거 하나만" 스킬.

“그래 그래. 그거 하나만이다"

어차피 말려봐야 실랑이만 벌어질 것 순순히 인정해 주고 달래어 겨우 아들을 욕조에 집어넣는다. 보통 아들만 욕조에 넣고 나는 따로 씻는 편인데, 아들과 함께 욕조에 들어가 씻는 날이면 욕조에서 장난감 상황극이 벌어진다. 한바탕 놀고 나면 1시간이 지나갈 때도 있다. 목욕을 하는 건지, 욕실에서 노는 건지. 어린 아들에게는 모든 것이 놀이어야 하고 재밌어야 한다. 아들의 몸을 닦아주고 나면, 머가 그리 급한지 욕실 밖으로 뛰쳐나가는 아들을 잡아 로션을 바르고 옷을 입히느라 또 한바탕 술래잡기가 벌어진다. 욕실에서 대충 닦고 속옷도 못 입은 채로 아들을 쫓아다니는 일은 하루 일과의 하이라이트다. 벌거숭이 남자 둘이 거실을 뛰어다니는 일이 가능한 것은 빈틈없이 시공된 거실 암막 커튼 덕이다. 덕분에 야경볼 일은 없다. 사실 정신이 없어서 야경 감상할 시간도 없다.


이 즈음되면, 오전에 아들을 등원시켰던 아내가 지친 몸을 이끌고 회사에서 집으로 복귀를 한다. 대강 오늘 하원 후에 있었던 일을 설명하고 나면 아내가 대강 씻고 아들 옆에 앉아서 오늘은 어땠는지, 짧은 대화를 나누곤 한다.

"우리 한글 한번 써보자"

올해가 가고 나면 벌써 초등학교에 진학해야 하는 아들 덕분에 아내는 피곤하지만 아들을 앉혀놓고 잠시라도 한글공부를 해보려고 애쓴다. 옆에서 뭐라도 도와야 하나 망설이지만 마음뿐. 몸은 벌써 식탁에 앉아서 핸드폰을 보고 있다.

"... 참 잘했어요. 우리 아들 잘하네. 자 이제 이 닦고 자자. 아빠~"

벌써 끝났나 보다. 뭔가 아쉽다.


더 놀고 싶다고 떼쓰는 아이를 잘 달래어 이를 닦이고 세 식구 모두 침대에 눕는다. 침대 위에서 책을 두어 권 읽고 나면 어느새 아들의 쎄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리다. 진짜 퇴근을 알리는 알람소리다. 고요한 침대 위, 아내와 나는 말없이 서로의 핸드폰을 보다, 보다, 보다, 잠이 든다.


그러다 가끔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가만히 자고있는 아내의 얼굴을 보다, 슬그머니 침대에서 기어 나온다.글을 쓰거나, 드라마를 보면서 시간을 죽인다.


추운 겨울, 따듯한 집에서 배불리 밥을 먹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이렇게 지낼 수 있음에 감사하다. 나를 둘러싼 모든 환경을 생각하면 행복감에 충만해진다.

그런데 왜 가슴 한편이 허 한 게, 답답한지.

우리는 아직 서로를 사랑하고 있는 걸까?

가끔씩 헷갈린다. 사랑인지 우정인지.


따듯하게 껴앉고 온기를 나눈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난다. 하루하루를 살아가기가 바쁘다는 핑계로, 육아와 일을 제외한 모든 일은 등한시된다. 매일매일이 전투다. 애가 조금만 크면 나아지려나 싶지만 막상 인생선배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것마저도 힘들단다. 애가 크면 또 손이 많이 가는 다른 일이 생긴다고.


에라 모르겠다.

예전같이 가슴 떨리는 사랑은 아니더라도,

이것도 사랑이다. 사랑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에효.  사랑, 따위가 뭐라고. 사랑이 뭐 별건가.

사랑타령 그만하고 잠이나 자자. 벌써 새벽 두 시다.


이제는 장모님 딸이 된 아내에게,

다음 주에는 휴가 쓰고 둘이서 데이트하자고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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