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신건강을 치료하는 과정
유일하게 여리했던 대학 시절, 감기에 걸리면 어지럽고 쓰러지기까지 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감기가 걸리면 빈혈이 심해지는 것 정도로 생각했었지요. 시간이 흘러 이비인후과 진료를 받게 된 후에야 귀에 생긴 염증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감기에 걸릴 때마다 내과에서 받은 독한 항생제 때문에 고생했었는데, 귓속에 연고를 바르니 더 효과적으로 낫더군요.
정신건강을 치료하는 과정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숲에 가려진 주요한 원인에 해당하는 질병을 찾아낸 후에야 비로소 치료가 시작되는 것이죠. 이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다고 합니다. 서로 다른 질환의 증상이 모두 조금씩 닮아 있기도 하고, 질환이 오래 이어져 온 경우 마치 합병증과 같은(혹은 관계없이) 동반질환이 주된 질환처럼 드러나는 경우도 있다고 하네요. ADHD라는 자각 없이 병원에 방문했다면, 상담 위주의 병원에 가지 않았다면 어쩌면 우울증을 먼저 의심했을지도 모릅니다. 우울증 증상에도 부합하기 때문이죠. 아마 그랬다면 오랜 치료 기간에도 나아지지 않는 상태를 보며 많은 자책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성인 ADHD는 꾸준히 관리하여 완치가 되는 질환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도움받을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치료에 임할 자신이 있었습니다. 아주 어릴 적부터 불면증이 있었다는 점과 다른 사람의 말을 못 알아들었던 경험, 항상 물건을 잃어버리는 습관 등 전형적인 증상들을 ADHD 확진에 분명 도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생각만큼 간단하지는 않더군요. 바로 조울증(양극성 정동장애)이 의심된다는 의사의 소견 때문이었어요. 가장 흔한 증상이 모두 나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면에 대한 욕구 감소
평소보다 말이 많아지거나 계속 말을 하게 됨
사고의 비약 또는 사고가 연달아 일어나는 주관적인 경험
주의 산만
목표 지향적 활동의 증가 또는 정신 운동성 초조
조울증 증상과 ADHD 증상도 서로 겹치는 부분이 있어 약을 조금씩 쓰면서 추이를 살펴봐야 했습니다. 게다가 ADHD 치료약이 조울증 증상 중 조증을 자극하기 때문에 어쩌면 효과적으로 약을 쓰는 것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죠. 맙소사, 정말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절대 아니구나.
2. 조울증과 공존하기
2주 차: 가장 약한 ADHD 약(메디키넷리타드 5mg) 처방. 바로 뒷 날 경조증 삽화(episode) 경험
우려했던 경조증 삽화는 약을 처방한 바로 뒷 날에 찾아왔습니다. 그날은 기다리던 홀로 여행이 계획된 날이었죠. 오랫동안 좋아했던 가수의 콘서트 관람을 겸하여 서울에서의 일정을 빼곡히 채워놓았던 주말이었어요. 바쁘게 움직인 하루에 비해 잠은 불과 3시간 정도밖에 자지 않았지만 전혀 피곤하지 않았습니다. 그 뒷 날에도 아무런 지장 없이 부지런히 다녔죠. 그것이 이상하다는 자각은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잠을 적게 자는 것은 평소에도 있는 일이며 오히려 적게 잘 때 더 개운하고 힘이 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던 적도 있었으니까요.
"주말은 정말 기분이 좋았어요. 조금이라도 보람되게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일정을 가득 채워 놓았거든요. 그런데 모두 할 수 있어서 더 좋았어요."
약 처방에 망설이는 선생님을 앞에 두고서도 두려운 마음보다는 내가 다스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 이 또한 경조증 증상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지만, 잠을 적게 자고 활동을 많이 했다고 경조증이라고 말한다면 잠을 규칙적으로 조절하면 되는 것일 테니까요.
"그래요. 그럼 지난번 처방한 약이 매우 저용량이긴 하니까, 약을 추가해서 한 주 더 상황을 봐봅시다."
3주 차: ADHD 약(메디키넷리타드 10mg), 기분조절제 처방. 차분해지고 머리가 조용해짐을 느낌!
순전히 운일지도 모르지만 나아질 수 있다는 의지 덕분에 포기하지 않았더니 한 줄기 빛이 보였습니다. 시끄러운 줄도 몰랐던 머리가 조용해진 겁니다.
이렇게 조용하다고?
적막감마저 느껴질 정도로 조용해진 머릿속은 비 온 후 맑게 개인 날씨와도 같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이 귀로 잘 들어왔고, 일을 순차적으로 할 수 있게 된 겁니다. 병원에 가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진짜 저 너머에서 살고 있었구나. 이제야 이곳으로 왔구나.
3. 우울증이 낫는 순서
현대의학의 발달을 찬미하며 기분이 좋았던 나를 보면서, J는 성격이 너그러워졌다 표현하는 동시에 어째서 아직도 왜 정리는 잘 못하는 것인지, 나아진 것이 이 정도인데 계속 병원에 다닐 필요가 있는지 솔직히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첫 술에 배부르기를 원하는 그에게 난 아직 맞는 용량을 찾아가는 중이고, 나는 정말 효과를 느끼고 있으며, 당신이 아닌 나를 위해 병원에 다닌 것이라 말했습니다.
단호하게 말했던 나의 의지와는 다르게 가끔은 걱정이 되었습니다. 약을 먹는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거든요. 사람들의 말이 잘 들리고 업무효율이 높아진 반면에 약효가 떨어지는 시간이 되면 짜증도 많아졌고 급작스러운 우울감이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면 육아나 집안일에 소홀하게 되었던 것도, 무엇을 위해 병원을 다니는 건지 회의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회복이 정체될 때 오히려 더 힘들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분들에게 우울증이 어떤 순서로 나아지는지 말씀드리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러다 우연히 영상하나를 보게 되었습니다. 우울증 환자들의 약 70% 정도가 어떠한 과정을 겪는다는 이야기였어요. 치료를 시작하고 바로 좋아지는 부분이 있는 반면에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 부분도 존재하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는다는 말이었죠. 완전히 제 얘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J에게 들었던 말이 사실은 대부분의 환자들이 듣거나 스스로 질문하게 되는 주제였던 것입니다.
"분명 나아진 것 같은데, 나는 원래 이 정도구나"
"너 좋아졌다더니, 이 정도로 되겠어?"
"아, 나는 이제 그전으로 돌아갈 수 없나 보다"
용기를 얻고 의사 선생님께 솔직히 말하며 도움을 구했습니다.
"저는 집안일이나, 가족에게 시간을 쓰고 싶은데 퇴근하고 집에 오는 시간이 되면 약효가 떨어져서 그런지 더 힘든 것 같아요."
의사 선생님께 말씀드리자 미처 배려하지 못했던 부분이라며 지속시간이 더 길고 좀 더 안정적인 약으로 바꾸는 것을 권하셨습니다. 새로운 약으로 바꾸는 것이 쉽지만은 않겠지만 그만큼 시도해 볼 가치가 있을 거라며 격려해 주셨죠.
정신건강이 나아지는 과정은 꼭 학습곡선 같았다. 결과는 좋았습니다. 특정 시간대에 약효가 갑자기 떨어지는 느낌도 사라지고 기분장애도 좋아진 것을 느꼈습니다. 거의 평생을 ADHD와 살았으니 불편한 부분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더니 많은 것이 나아졌습니다.
《우울증이 낫는 순서》
▪︎1~2주: 식욕, 수면의 정상화
▪︎2~4주: 불안한 기분, 신체증상 사라짐
▪︎4~6주: 무기력감, 의욕저하 사라짐
▪︎6~12주: 기억력, 집중력 회복
포기하지 않으면, 분명 좋아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