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록
2022년 5월 23일의 노트
기억하는 한 아주 어릴 적부터 불면증이 있었음.
물건을 항상 잃어버리고,
초등 고학년쯤부터는 사람말을 잘 못 알아들었음.
느리다는 말을 중학교 때쯤부터 들음.
21살 때쯤부터 습관적으로 늦고,
멍 때리고, 물건들을 잊어서 다시 챙기고, 시간을 전혀 지키지 못하게 되었음.
지금은 나아졌지만,
여전히 멍 때리거나 시간이 훅 가버리거나, 한 가지 일에 집중을 전혀 하지 못함.
청소라던가 정리는 전혀 못함.
할 수 있을 때가 한 번씩 있다면 그때 훅 해버려야지 그때를 놓치면 안 됨.
그나마 먹히는 수법은 음악을 크게 들으며 일을 하는 것이지만 그것도 쉽지는 않음.
잠을 못 자는 날이 며칠 연속되다가 초저녁에 기절하는 날이 며칠 연속되기도 함.
세상으로 나아가던 생생한 봄의 어느 날, 나는 이 글을 메모장에 적었습니다. 그날은 오랜만의 휴가로 아이들과 집에서 소소하게 시간을 보냈던 하루였지요. 귀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아이들과 산책을 다녀왔고 예쁘게 낮잠을 자는 아이들을 잠시 흐뭇하게 바라볼 수도 있었거든요. 뿌듯한 시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제 조금 남았습니다. 밀렸던 청소도 하고 공간정리도 새롭게 하며 시간을 알뜰하게 사용하면 완벽할 테니까요. 하지만 당연하게도 바랬던 그런 날은 없었습니다. 나는 정리하는 재주도 없거니와 무엇인가 유지하는 능력 또한 없었거든요.
"선택과 집중, 최대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보자"
일단 세탁기를 돌리고 나서, 최대한 더러운 것을 쓸고 닦고 식기세척기에 그릇들을 넣었습니다. 싱크대 청소도 하고 작업대도 열심히 닦아 봅니다.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뿌듯했습니다. 하려 했던 정리는 못했고 바닥에 장난감이 좀 굴러다니지만 아이가 있는 집에서 이 정도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죠. 어느덧 퇴근한 J에게 한 소리를 듣기 전 까진요. 뭘 청소했는지 모르겠다며 시작하는 그의 말이 참 속상합니다. 하지만 난 이것도 했고 저것도 했고...
맙소사, 또 식기세척기의 시작 버튼을 누르지 않았네요.
모처럼 얻은 휴가를 의미 없이 보냈다는 생각이 들자 우울감이 밀려들었습니다. 내가 가진 여러 역할들을 제대로 다하지 못하면서 새로운 일만 쫓아다닌 것 같았고 생산적인 대화들과 기분 좋은 산책들은 사치 같았습니다. 커피 한 잔과 함께 담은 희망들은 때마다 나를 일으켜 세웠지만, 일상에서 끊임없이 나에게 보내는 실패 신호들은 모이고 모여 쓰게 날 괴롭힐 뿐 해소되지 않는 답답함은 그대로였습니다.
2. 자각의 임계점
식기 세척기의 가장 곤란한 부분인 그릇을 헹구어 넣는 일을 모두 해 놓고서 시작 단추를 누르지 못한 것은 게으른 걸까요? 주의력 결핍 과다 행동 장애예요
무엇이 더 어이없을 만큼 당황스러울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영상을 알고리즘 덕에 보게 된 순간일까요? 아니면 서른 하고도 세 살이 더 지난 이제야 나의 상태를 제대로 알게 된 일이 그런가요? 사실 ADHD(주의력 결핍 과다 행동 장애)라는 질병에 대해 알게 된 것이 오늘내일의 일이 아님에도 말이죠.
한창 '오은영 신드롬', '금쪽이'가 유행했던 때 육아에 대한 관심으로 영상을 자주 챙겨 보았더니, 댄서 '가비'의 금쪽 상담소 영상도 접하게 되었습니다. 작업기억력이 떨어지고 성급한 언행으로 오해를 받았던 부분에서 나도 설마? 하는 생각을 잠시 했었지만 크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육아와 ADHD 키워드만으로도 위의 영상은 자연스럽게 추천되었을 것입니다. 지나영 교수는 소아정신과 교수이고 심한 ADHD라고 하니까요.
사실 저 영상을 전부 보지도 못했습니다. 앞부분 1분 30초만 보고서 입을 '턱' 틀어막고 30년 동안 완성시키지 못했던 퍼즐이 '척'하고 풀려버렸기 때문이죠. 유레카! 이럴 때 이렇게 외쳐야 하는 건가?
사진: Unsplash의 Greg Rakozy
나의 온 우주를 이해하게 된 사실만으로도 눈앞이 환해진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미 세상에는 솔루션들이 다양하게 많으니 나는 그걸 모두 시도해 보면 되는 간단한 문제가 되어버린 것이라 생각했지요. 인터넷 세상에는 많은 정보가 있는 데다 그중에는 의사, 전문의로부터 생산된 신뢰가능한 것들도 많으니까요. 일단은 나의 행동에 대해 더 중점을 맞추고 개선해 나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하지만 결국엔 병원을 알아보고 예약하게 되었는데,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어요.
누구라도 나의 말보다는 의사의 말을 더 신뢰할 겁니다. 보통 타인에게 나의 상태를 굳이 알릴 이유는 없어요. 하지만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는 양해를 구해야 했습니다. 내가 무언가 하려는데 이해가 필요한 것, 피했으면 하는 말들, 도움이 필요한 부분 모두 솔직하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절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는 유명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의 말은 결정적으로 병원으로 전화할 수 있게 했습니다. 도움받을 수 있는 부분이 분명 있을 테니 가까운 정신건강의학과에 내원하여 도움을 받으라는 그의 말이 마치 마법주문처럼 머릿속을 맴돌며 더 나아지고 싶다는 나의 희망을 자극했습니다.
그리고 길었던 기다림에 끝에 드디어, 2023년 3월 3일 한 정신건강의학과 병원의 문을 열었습니다.
3. 해방의 봄이 오기까지
긴장을 안고 들어선 곳의 분위기는 상당히 밝고 따뜻했습니다. 세련된 인테리어에 읽고 싶은 책이 가득 있고,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주는 음악도 함께였지요. 이런 곳이 회사에서도 멀지 않다니 정말 운이 좋아요.
나의 상태에 대해 깨달음을 얻은 지 몇 개월이 지났습니다. 많이 나아지고 있고 나아졌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꾸준한 운동을 시작한 지 반년 가까이 되었고, 할 일에 우선순위를 생각하고, 물건을 정해진 위치에 놓는 훈련을 한다던지 타인에게는 유의미하지 않을지라도 내 안에서는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진료를 통해서 어쩌면 괜찮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진료실로 들어선 순간 완전히 나를 향해 앉아있는 선생님을 마주하니 그만 조금 얼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어 그러니까 제가 온 이유는 그..."
사실 22년 5월 어느 날의 노트만 읽었어도 됐을 일이지만 그런 노트가 남아 있다는 것조차 인지를 하지 못하고 있었는 데다가 말하려 생각해 온 것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서 더듬더듬 말을 이어갔습니다. 지난 병원의 경험들 때문일까, 의사 선생님이 내 말을 잘 들어줄지 믿어줄지 확신이 없어 불안도가 올라갔던 것 같아요. 30분 정도의 상담시간은 금방 지나가 버렸습니다. 유의미한 말은 하나도 없었던 것 같은데 말이죠.
"이야기 잘 들었고, 일단 간단한 자기 보고식 검사를 해봅시다. 지금 상태를 상담내용이랑 같이 살펴보면 확실히 도움이 될 거예요."
1주 차: 30분 + 10분 정도의 상담과 자기 보고식 검사를 통해 주의력 저하, 충동성, 우울증, 불안 모든 지표가 높다고 함. 기분조절제, 신경안정제를 처방받았다.
2주 차: 30분 + 10분 정도의 상담과 함께 종합주의력검사(간이)를 받게 되었고 결과는 의외로 작업기억력, 간섭선택주의력 등을 포함 모든 부분에서 높은 점수였지만 억제지속주의력(충동성을 억제하는 능력)에서는 저하가 나와 의미 있는 결과라 언급하셨다. 검사결과는 사실 보조적일 뿐 상담결과 만으로도 ADHD 처방이 나오기에 충분하다고도 말씀하셨다. ADHD 약이 처방되었다. (메디키넷리타드 5mg)
1~2주의 치료과정을 겪으며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했습니다. 가장 낮은 용량이라 그런지 약을 먹어도 나아진 것은 모르겠고 연차 휴가를 내면서까지 병원을 다니게 된 것에 대해 회의감까지 느끼게 되었지요. 치료가 도움이 되는 게 맞는 건지, 오히려 나빠지고 있는 건 아닐지, 끝이 없을 치료를 시작하는 것이 맞는지 걱정만이 앞섰습니다.
그리고 3주 차 3일이었던 3월의 어느 날, 시끄러운 줄도 몰랐던 머릿속이 조용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