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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밝고바른 Dec 17. 2023

다시, 열두 살이 되어버렸다

이제 다시 시작

1.  안의 그 녀석


지나간 2022년의 봄을 기억한다. 계절이 주는 기대감만큼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날들이 이어졌다. 한창 바쁘던 J를 대신하여 아이를 주로 돌봐야 하는 것도 모두 좋았다. 세상의 모든 일이 나의 관심사인 것처럼 즉각 빠져들곤 했고 꿈틀거리는 내 안의 무언가와 다시 마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안의 그 녀석은 새로운 경험과 좋은 사람과의 대회로부터 영양분을 받아 조금씩 커져가는 듯했다. 하지만 의욕의 시그널이 강한 만큼은 지속되지 않았고, 영향력을 얻기에는 그 녀석의 몸집은 가냘프고 약소했다. 나는 여전히 누구에게도 온전히 이해받기 어려웠다. 부여된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다며 부정당했고 그럴 때마다 우울해지다가도 그 녀석은 울부짖었다. 나 지금 여기에 있다고.

그 해, 여름이 되었다. 나의 그 녀석은 어찌 되었을까. 완전히 부정당하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뛰어다닌 나의 몸뚱이도 지쳤고 그간의 노력들은 허공으로 날아간 것 같았다.



2. 해방의 봄을 지나 여름


해방의 봄이 오기 전까지, 매해 반복된 기분들은 때마다 그저 절망감만 주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의 이상과 달리 따라주지 않는 의지와 체력은 탓할 대상이 아주 가까이에 있었기에 자존감만 더 낮아지고 학습된 실패감은 나의 세상을 작게만 만들었지요.

해방의 봄-다시 열두 살이 되어버렸다

해방의 봄에서 '해방'이라는 단어는 바로 '내 안의 그 녀석'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누군가 나를 비난할 때마다 마지막까지 지켜온, 형태는 알 수 없지만 그곳에 분명 있는 그 무엇이죠. 간단하게 뭐라고 표현할지 알 수 없어 임의로 '에고(ego)'라고 칭해 볼게요.

에고 ego(라틴어): 인식에 있어서의 주관, 실천에 있어서 전체를 통일하고 지속적으로  존속하며 자연이나 타인과 구별되는 개개인의 존재를 가리켜 말한다.


나에게 성인 ADHD라는 병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고 병원에 예약하고 첫 진료를 받고 치료의 효용감을 얻게 된 과정이 약 1년이 걸린 것 같습니다. 그 해의 여름으로부터 무엇인가 얻을 수 있었던 올해의 여름까지 많은 것이 나아지고 또 좋아졌어요.


머릿속 안개가 걷힐 때면 모든 계절은 더욱 선명하게 빛났습니다. 맑게 개인 하늘의 청량함도 비가 오는 날의 무거운 분위기도 모두 전보다 진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주변에서 배려해 주었던 사람들의 마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이 갖는 찰나의 생각이 암묵지처럼 자연스럽게 전달되었어요. '에고'는 이제야 사회로 한 발자국 들어선 것입니다.


봄을 지나 푸른 잎으로 가득한 여름으로 가며 감정들은 점점 더 구체화됐습니다. 예를 들면 전엔 무작정 책이 좋다는 느낌만이 자리 잡았다면 이제는 독서를 하거나 글을 쓸 때 종이의 질감이 좋다던가, 서체가 글의 분위기와 어울린다던가. 보다 세분화하여 감정을 기억할 수 있게 된 거죠. 게다가 약을 먹었을 때 글이 잘 읽히다 보니 많은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에고'는 이제 제법 살집을 불리게 되었습니다.

사진: Unsplash의Blaz Photo


3. 다시, 열두 살이 되어버렸다


우울감이 가끔 몰려올 때면 앞으로 할 수 있는 무진한 가능성을 떠올리기보다는 지나간 일들에 대한 아쉬움만이 자리를 차지하기도 합니다. 전형적인 증상이 평생 함께했음에도 왜 알 수 없었을까. 엄마는 의심한 그때에 나를 병원에 데려다주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생각들. 만약 알게 되었다면 내가 할 수 있었을 것들과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 수많은 밤과 밤과도 같았던 낮의 시간들은 모두 후회나 고통의 색인을 달고 찾아오게 되었어요. 다행히 지금의 회사에 올 수 있었고, 다행히 그를 만나, 다행히 우리 아이들과 만났으니까 하는 생각은 그저 운에 따른 결과라는 생각밖에는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불행하게 어그러진 일들이 훨씬 많았으니까요.


그래서 다시 열두 살이 되기로 했습니다. 나는 시간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다시 돌아간 것입니다. 아직 나의 시간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다시 시작입니다.


오랫동안 알 수 없는 무언가를 그리워했다.
그건 너였을까 나였을까

공기가 무거워져 느릿해진 행동이 좋다.
시간은 마치 멈춘 것 같은데 사실은 빛이 나는 잔상들로 가득 차있다.
빨리 감기를 누른 듯 고정된 나를 두고 부지런히 움직인다.
묵직한 농도의 그 흐름은 포근하게 날 감싼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귓가에 누군가가 속삭였던 것 같은데.

밤은 영원할 것처럼 느리게 갔고
고요하게 나는 시끄러워 눈을 감고 있지 못했다.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했고 등이 아프기도 했다.
잠에 들면 숨구멍이 막힐 것 같아
등에 박힌 묵은 상처가 욱신거렸다.

- 2023년 7월 26일의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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