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디톡스가 필요할 때

미련에 과감히 안녕

by 안기옥

토요일 아침, 눈 떠보니 6시 15분이었다. 강박적 사회생활에서 배태된 올바른 훈육의 결과다. 비몽사몽간에 둘러보니 코딱지만 한 방안은 일주일간 숨 가쁜 생활의 이면을 고스란히 끌어안고 있었다. 굴러다니는 맥주캔과 책 가지, 속옷, 겉옷, 결국 제자리를 못 잡고 구석에 쓰러진 기타 씨와 우쿠 녀석. 하아,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유통기한이 있는 이유,

썩은 것은 무용하니까


어차피 겨울옷도 꺼내야 하는 판이어서, 청소판이 커졌다. 이제야말로 버리자, 라는 새로운 강박을 마음에 심고 독하게 결정을 내렸다. 가죽재킷, 몸에 착붙어서 몸매도 드러내고 스타일리시하지만 겨울엔 춥고 가을엔 더워서 일 년에 한두 번 입을까 말까 한다. 과감히 아웃. 십 년도 더 된 가방. 오래됐지만, 추억이 많은 녀석이라 쓰지 않아도 간직했었다, 그러나 이제 안녕을 고하자. 한창 마라톤을 할 때 유용했던 러닝백도, 멋 부리기에 여념이 없을 때 샀던 초미니팬츠도 다 재활용 봉투로 직행했다. 결정의 순간마다 30초 정도의 망설임과 작별 인사가 뒤따랐다. 한때 내 욕망과 열정을 주었던 놈들이다. 기억과 마음을 잘라내는 행위는 상처 딱지 떼기보다 아프다.


냉장고에서 유통기한 한창 지난 스팸의 잔재와 쭈글쭈글 주름진 사과, 대체 언제 넣어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통닭을 비웠냈다. 썩은 것들이 내는 토악질나는 냄새와 추악한 면면들을 꼼꼼히 살폈다. 이리될 줄 알았으면서, 어쩌자고 이 지경까지 방치했던가. 욕실 청소할 때는 락스와 퐁퐁을 강하게 풀어 구석구석 닦았다. 이사 온 지 석 달만에 처음이었다. 묵은 때는 벌써 타일과 변기와 완벽히 한 몸이 되어 닦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나는 한 마리의 세균도 남기지 않으리라는 각오로 박박 문질러댔다. 세제의 독성에 머리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그러나 절실한 과정이었다.


마음이란 여전할 수 없는 것


지난 월요일 K에게서 연락이 왔다. 수요일에 한국에 들어오는데 만나자고 했다. 그 메시지 하나로 잊고 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우린 공식적인 연인관계는 아니었다. 그러나 내 자의식이 나락으로 곤두박질쳤던 때, 큰 힘이 돼주었고 여러모로 애틋했다. 그 K가 온다니! 아, 요즘 밤낮 야근으로 뱃살이 붙었는데, 젠장. 눈가에 주름 좀 생겼다고 놀라진 않을까? 평소에 관심도 두지 않던 외모에 신경이 쓰였다. 새로 준비하는 프로젝트 때문에 정신없이 바쁜데, 망할 마감으로 시간을 못 내는 건 아닌지, 약속 시간을 언제 잡아야 하는지 불안불안했다. 나답지 않았다. 왜 이러지? 아직 그 아이에게 미련이 있던가?


광화문에서 그를 기다렸다. 헤드폰 볼륨을 높였는데도 무슨 음악을 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예전엔 인사로 뽀뽀를 했었는데..., 오늘도 만나면 키스를 할까? 내년에 한국을 뜰 거라는 얘길 할까 말까? 또 나답지 않았다. 원래 내가 이렇게 초조해하는 사람이었나, 오히려 반문했다.


내 퇴근시간이 늦었기 때문에, 한밤중까지 문을 여는 종로 뒷골목으로 갔다. 그간의 일들, 예전에 함께했던 나날을 이야기하며 밤늦도록 소주잔을 기울였다. 소소하고 훈훈한 대화의 끝에 그가 말했다.

"넌 여전하구나."


그의 호텔 바로 가서 늦도록 술을 더 마셨다. 그의 냄새, 말투, 웃음소리 뭐하나 변하지 않았다. 내가 아는, 내가 좋아라 했던 그 모습 그대로.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설레지도, 그와 뭘 하고 싶다는 바람도 생기지 않았다. 내 마음은 여전하지 않았다. 새벽에 집에 오는 택시 안에서 나직이 혼잣말을 했다. 이제 정말 끝이구나. 새벽 공기가 전에 없이 스산했다.


미련, 어쩌면 미련한 마음

Be free from all the attachment


사실 어제 아침 청소는 USB 하나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시작하게 됐다. 지난주 컴퓨터를 정리하면서 몇 년에 걸쳐 쌓아뒀던 사진이며 음악, 그동안의 미디 작업을 다 몰아넣었는데, 그게 사라졌다. 그것만큼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아침저녁으로 둔 곳을 체크했는데...,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하루를 걸쳐 대청소를 했지만 기어이 나오지 않았다. 속이 탔다.


그러나 천천히 돌이켜보니, 쌓아두기만 했지, 꺼내보지도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지 않았던 것들이다. 떠나보냈어도 인생에 아무 문제가 없는 무용한 것. 왜 붙잡고자 했을까, 덮어두기만 할 것을. 감정도 사물도 떠나보내야 할 때가 있다. 묵은 것은 퀴퀴해지기 마련이니. 싹싹 문질러 지워버리기는 매우 아리고 힘든 과정이긴 하다-가죽 재킷은 괜히 버렸나..., 조금 아깝다. 그러나 비워야 채울 수 있는 것 아닐까.


일과 감정과 기억과 쓰레기로 엉망진창이던 한 주가 끝이났다. 주말의 청소는 일종의 의식이었다. 덕분에 어제오늘 내방은 피죤과 퐁퐁 냄새로 향긋하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