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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기옥 Mar 02. 2021

옥섭 씨는 아기가 좋아서

워킹맘의 자식은 더 씩씩해야 한다

얼마 전 새로 오신 우리 회사 기획실장님은 홍보 업계에서 대단한 이력을 쌓아 올린 베테랑이다. 다양한 경험에 과감한 추진력까지 겸비해,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카리스마가 넘쳤다. 게다가 아이가 초등학생이란다. 일 많기로 소문난 홍보 분야에서 워킹맘이라니. 며칠 전 새 제안서 준비로 실장님과 야근을 하다가 문득 물었다. 


"실장님, 이렇게 늦게까지 여기 계시는데, 아이는 누가 보고 있어요?"

"집에 혼자 있어." 

"어머, 아직 초등학교 1학년이라면서요, 혼자 있어도 되나요?"

"어쩌겠어? 돌봄 이모 구하고는 있는데, 오후에 파트타임만 하실 분 찾기가 쉽지 않네."


깜짝 놀랐다. 옥섭 씨 같은 엄마가 버젓이 또 있다니! 80년대 옥섭 씨의 육아도 실장님의 시크한 대답과 다르지 않다. 나와 동생은 늘 방치되었다. 옥섭 씨는 아직 걷지도 못하는 나를 끈으로 묶어 방문 고리에 연결해 놓고 일을 했다. 이건 뭐, 하네스를 착용한 강아지와 다를 바 없다. 줄에 묶여 엉금엉금 방문 주위를 기어 다니면서 했던 '나 홀로 창호지 햇빛 놀이'가 내 인생 첫 기억이다. 이렇게 슬픈 스토리가 없다. 


이 외에도 크면서 옥섭 씨에게 서운했던 게 하나 둘이 아니다. 예닐곱 살에 미술학원에 다녔는데, 소풍날 엄마가 동행하지 않은 아이는 나뿐이었다. 대신 할머니가 등 떠밀려 와 주셨다. 그때 설움이 복받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억지로 할머니와 찍은 사진이 남아 있다. 초등학교 때, 하교 시간에 비가 왔다. 친구들은 각자 부랴부랴 우산을 들고 온 엄마와 집에 돌아갔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나는 덩그러니 혼자 남아 있다가 쫄딱 비를 맞으며 집에 왔다. 이 기억은 너무 아파서 아직도 비만 오면 생생하게 떠오른다.


궁금했다. 옥섭 씨는 그렇게 곤궁하고 바빠 죽겠는데, 어쩌자고 애를 셋이나 낳았나. 할머니의 강요였나. 피임이 여의치 않았나. 훗날 장성한 자식들이 부양해줄 것을 기대한 건가. 얼마 전에 내 마음에 오랫동안 품어 뒀던 질문을 드디어 던졌다. 


"엄마는 그렇게 살림이 팍팍하고 애 볼 시간도 없는데, 왜 우리를 셋이나 낳았어?"

"음, 엄마는 말이지, 아기를 좋아해."


하, 고작 그거였다! 나는 첫째니까 그렇다 치고, 동생들이 이 험한 세상에 나올 수 있던 이유는 엄마의 대책 없는 아기 취향 때문이었던 거다. 뭔가 조금은 더 근사한 대답을 기대했지만, 옥섭 씨 솔직함에 피식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갓난아기였을 때에는 옥섭 씨도 나를 품에 안고 이뻐라 했겠지, 하는 추측이 위안이 되었다. 이제 그런 옥섭 씨의 아기사랑은 온통 어린 조카를 향해 있다. 금이야 옥이야 옥섭 씨가 죽고 못 사는 조카가 조금 천천히 자랐으면 좋겠다. 


나는 실장님께 내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할까 하다 그만두었다. '나만 혼자 컸어' 싶었던 오랜 피해의식이 실은 이 땅의 일하는 엄마와 아이들 모두의 문제였다는 걸 새삼 알겠다. 실장님 아이도 나처럼 씩씩하게 자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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