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중의 힘
"대충 정리하고 먼저 사장님께 전화부터 드려. 너 오면 바로 연락하라고 당부하시더라."
일 년이 넘도록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긴 시간 이역만리 길을 다녀온 딸에게 할 말이 얼마나 많을까. 그런데 옥섭 씨는 내가 가방을 풀자마자 곧 사장님 얘기부터 꺼냈다.
"사장님? 왜? 아니, 싫다고 때려치운 회사 사장님한테 왜 귀국 인사를 해?"
어이없는 상황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곧 옥섭 씨는 휴대폰을 꺼내 그간 사장님과 주고받은 메시지를 보여주었다. 사원 엄마와 연락하는 보스가 다 있나? 더군다나 퇴사자 엄마와? 모든 것이 의아스러웠지만, 둘은 이미 꽤나 돈독한 듯했다. 오히려 내가 회사를 다녔던 기간엔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던 사이였다.
'서울에 오면 꼭 회사에 들를 것'이라는 사장님의 메시지를 받들어, 나는 한두 달 더 신나게 놀다가 방문했다. 재입사를 권하시리라 예상했는데, 그대로였다. 사실 좀 회의적이었다. 개처럼 일하던, 제안서의 노예처럼 지냈던 곳 아닌가. 다시 돌아가면 큰 꿈으로 돌아다녔던 세계여행은 무슨 의미였던가.
옥섭 씨는 말했다.
"사장님이 너 칭찬 많이 하더라. 어쩜 그리 딸을 잘 키웠냐고 하는데, 내가 기분이 참 좋더라고. 어차피 회사가 다 거기서 거기 아니니? 그냥 다시 들어가면 좋겠네."
사장님은 말했다.
"내가 안 차장 어머니랑 통화해보니까, 참 강단 있고 훌륭한 분인 것 같아. 목소리에서 확 느꼈지. 그 엄마의 그 딸 아니겠어? 엄마 닮았으니 안 차장은 뭔가 꼭 해낼 거야."
여행 가서 돈도 다 떨어진 차에, 양쪽 두 어른이 어르고 달래니 팔랑귀인 나는 종잇장처럼 날아갔다. 그렇게 다시 재입사를 하고, 벌써 이 년이 훌쩍 지났다. 전과 똑같은 제안서 압박에 중추신경, 말초신경이 매 순간 곤두선 삶이다. 팬데믹이 아니었으면 또 때려치울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내가 존중을 배워가고 있다는 점이다. 직접 만난 적도 없고, 살아온 배경이나 환경이 전혀 다른 두 여성이 내 인생의 양쪽 끝에서 신뢰와 배려를 주고받는 상황은 이 땅에 정 붙일 곳 없이 살아온 나에게 큰 안도와 연대의식을 심어주었다.
사장님과 옥섭 씨는 여전히 나를 매개체로 안부를 묻고, 존경을 표한다. 두 분의 덕택에 나는 내일 또 월급을 받는다. 이래저래 상생의 관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