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不眠) 그리고 호박의 반전

by 은연중애

나에게 잠이 드는 과정은 하나의 의식 절차에 가깝다. 밤 10시경이 넘어서면 잠자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살짝 올라오기 시작한다. 그러면 슬라이스 치즈를 두 장 꺼내 먹는다. 치즈에는 칼슘이 많이 함유되어 있기 때문이다. 칼슘이 마음의 안정을 돕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11시가 넘어가면 꿀차를 마신다. 꿀에 포함된 다양한 성분이 수면을 돕는다. 12시 전후, 잠자리 들기 전에 마그네슘 영양제를 먹는다. 마그네슘이 날카로웠던 신경 이완에 도움을 준다.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잘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복불복이다. 갱년기 신체 주기에 따라서 어떤 수를 써도 잠이 안 올 때가 있다. 낮에 많이 걷고, 운동하는 것이 도움이 되긴 하지만, 밤에 잘 자는 것을 백 퍼센트 보장해주지도 않는다.

그저께만 해도 그렇다. 12시경에 누웠으나 잠은 안 오고, 화장실을 몇 번이나 다녀오고 나니 새벽 2시가 넘었다. 자는 것을 포기하고 두 시간쯤 책을 읽고 나니 정신은 말똥말똥한데 피곤해서 책상에 앉아 있기가 힘들었다. 누워서 할 일은 없고 근육운동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다리를 들어 올리고 열을 세었다. 또 반대쪽 다리를 들어 올리고 열을 세었다. 그러기를 족히 이백 번은 넘게 하고 나니 잠은 안 오는데 피곤해서 더 이상 할 수가 없었다.


불현듯 염려와 불안이 덮쳐왔다. ‘분가한 자식들이 별일은 없을까, 혹시 무슨 연락이 온 건 아닐까.’ 잠을 못 잘 까봐 소리를 꺼두었던 핸드폰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불일 듯 일었다. ‘아니야, 절대 그럴 리가 없어. 절대 핸드폰을 봐서는 안 돼. 쓸데없는 걱정이야’ 마음을 달래었다. 참아내었다.

이번에는 어깨가 시렸다. 상비해 둔 전기 찜질 매트를 어깨에 걸쳤다. 다리 들어 올리기에서 방법을 바꾸어 복식 호흡을 했다. 가만가만 배를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 또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 그리고 누군가에게서 배운 기도문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외웠다.


‘지금 좋습니다. 지금 감사합니다. 지금 사랑합니다. 지금 행복합니다. 지금 잘 되어갑니다. 주님이 원하시면 지금 이루어집니다.’ ‘지금 좋습니다. 지금 감사합니다. 지금 사랑합니다. 지금 행복합니다. 지금 잘 되어갑니다. 주님이 원하시면 지금 이루어집니다.’

그렇게 되뇌다 겨우 잠이 들었다.


그런데!

어젯밤에는 푹 잤다. 새벽에 한 번만 화장실에 갔다. 심지어는 아침에 늦잠을 잤다. 도대체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지?


호박죽 생각이 났다. 남편 친구가 보내온 늙은 호박 세 통이 있었다. 이 며칠 사이에 시어머니 몸이 안 좋으셔서 그중 두 통을 사용하여 죽을 끓였다. 그리고 죽 남은 것이 상할까 봐 어제저녁에 다 먹어 치운 것이다.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호박의 효능 중에 '불면증 해소'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이었구나!’ 마음속 저 아래에서 은근하게 묵직하게 기쁨이 솟아 올라왔다.

그리고 생각났다. ‘나에겐 아직 늙은 호박 한 통이 남아있어!’ 갑자기 호박 요리를 해야겠다는 의지가 불끈 생겼다.


원래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게다가 늙은 호박을 사용한 요리는 더더욱 스트레스다. 늙은 호박은 크고 무겁다. 그 껍질을 까고 자르려면 큰 힘이 필요하다. 한마디로 번거롭다. (다행히 남편이 호박을 자르는데 도움은 준다.)


요리하기 싫어하는 이유에 대해서 변명을 더 보태자면 자식을 위해서 요리하는 것은 어떻게든 열심히 하는데 시어머니를 위해서 요리하는 것은 사실 좀 신이 나지 않는다. 더욱이 그분 입맛은 요즘 바늘이 찌르는 것처럼 날카로워지고 있다.

그런데 그 짐 덩어리 늙은 호박이 갑자기 희망이 되었다. 덕분에 잠을 잘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생겼으니 말이다. (갱년기에 접어들면서 ‘잘 먹고, 잘 자고, 잘 배설하는 것’이 너무 소중해졌다.)


다시 생각해 보니 호박에 담긴 인생의 반전이 보인다. 농사짓는 남편 친구가 호박을 보내왔기에 어쩔 수 없이 요리해야 했다. 그리고 시어머니가 아프셔서 호박죽을 끓여야만 했다. 남은 호박죽 상할까봐 배불러도 다 먹어치웠다. 이 모든 과정에 나의 자발적 의도는 없었다. 오히려 불평이 점철되어 있었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다. 불평의 근원이었던 호박이 잠 안 오는 밤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되었다.


세상일은 알 수가 없다. 끝까지 가봐야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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