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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은 Jan 03. 2024

나 같은 딸을 낳으면, 나는 다 용서할게

아빠의 도장을 파서 떠난 호주

나는 그 대학이 지독히도 싫었다.

내 수능성적으로 갈 수 있는 대학이 그곳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3군데 대학의 합격통보를 받은 상태였고, 그중 한 곳은 소위 "인서울"이었지만 학과가 맘에 들지 않았다.

수능성적에 맞춰 담임선생님의 추천을 받아 지원한 학과였다.

차고 넘치는 수능점수를 받아 들었다면, 내가 원하는 대학의 학과를 선택해서 갈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수능이라는 것은 대한민국 대부분의 국민들이 공통적으로 맞닥뜨리게 되는 "꽤 중요한" 인생의 터닝포인트다.

난 경기권에 위치한 대학교의 '경영학과'를 선택했다.

나의 진로와 적성은 고려지 않았고, 당시 내게 주어진 3가지 선택지(경영학과, 유아교육과, 전산정보학과)중 경영학과가 가장 무난하고, 치열해 보다.

물론 경영학과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기에 이런 생각이 가능했을 것이다.

내가 지금 아이들을 키우면서 그들이 가진 재능에 진한 관심을 기울이고, 진로에 대해 유익한 대화를 하려고 애쓰는 것은 나의 경험이 자양분이 된 것은 확실하다.

세상에서 가장 큰 후회를 가져오는 무지는 나 자신에 대 무지이, 그런 사람에게 세상은 다양한 선택지를 주지 않는다.



그 대학을 다니면서, 첫 OT를 제외하면, 다 같이 MT를 간다거나 동아리 활동을 한다거나, 축제에 참여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물론 나의 20대가 무미건조했던 것은 아니다. 나는 나의 대학에서만 즐기지 않았을 뿐, 다른 학교를 다니는 친구들과 그들의 학교행사를 즐겼다.

같은 과에서 단 한 명의 친구와 함께 다녔다. 그녀도 나 못지않게 그 학교를 싫어하는 아이였다. 

우린 만나면 학교에 대 불평불만을 쏟아냈고, 틈만 나면 학교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렇게 2년을 다니고, 3학년이 되자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재수를 했으면 어땠을까
그때 내가 갈 수 있었던
다른 학교를 선택했더라면 어땠을까


잔인한 4월이 되면, 우리나라 대학생들의 2/3 이상이 위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되리라고 나는 감히 예언한다.

가지 않았던 길에 대한 미련을 처음 느끼게 되는 20대 초입의 청춘들.

그들은 젊음이라는 지도를 가졌기에 다양한 길을 선택할 수 있다고 보이지만, 막상 그들이 가진 자유에 비해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일들은 한정적이다. 경제적으로 자립되지 못한 인간은, 자립된 선택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2년간 학교를 다니며 매 해 편입시험을 보았다. 그 학교에 나의 1분 1초가 매몰되는 것이 아까워서 견딜 수가 없었지만 그 말을 부모님께 꺼낼 용기도, 학생이라는 신분을 벗어던질 용기도 없었다.

편입을 한다 해도, 휴학이나 자퇴를 한다 해도 그럴듯하게 내 목표를 채워줄 대체재가 딱히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나는 문득 이 나라를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어디로?'

몇 년 전 고모네 식구들이 모두 호주로 이민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 기억이 났다.

 

그날 이후 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 부모님의 눈치부터 살폈다.

휴학을 하고, 어학연수를 가라고 등 떠미는 부모가 세상에 얼마나 될까.

당시 공무원이셨던 아버지의 학자금 대출로 학비를 조달하며, 매일 받는 용돈으로 생활하고 있는 사람에게 그 일들은 대화와 설득을 넘어서 투쟁하고 쟁취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떠나야겠다는 마음을 먹으니 다른 미래는 보이지가 않았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내 의지로 선택한 길을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그 길 끝에 있는 것만 상상이 된다.   

나는 아버지 이름의 막도장을 팠다. (당시엔 휴학계를 내려면 부모님 도장을 찍은 서류를 제출해야 했다.)

출력한 서류를 들고 행정실로 가는 내내 마음속으로 부모님께 빌었다.


미안.
나 같은 딸을 낳으면, 나는 다 용서할게
그러니 나도 좀 용서해 줘요.


부모님께 휴학사실을 알리고, 호주로 가겠다고 선언한 후 15일째 되는 날, 나는 호주로 떠나는 비행기 안에 있었다.




그 결정은, 생애 처음 비행기를 타고 장장 11시간을 날아가야 하는 외국 생활을 결정한 것치고는 신중하지 못한 것이었을까?

우리는 너무도 원하는 것을 위해 선택을 할 때도 있지만, 너무도 싫은 것을 피하기 위한 선택을 할 때도 있다.

그것을 도망이나 도피라고 함부로 단정 지어서는 안 된다.

도피나 도망은 적어도 내가 왜 피하는지, 이것을 피하면 어떤 안전한 상황에 놓이는지 계산이 미리 서있지만, 견디기가 힘든 것으로부터 무작정 벗어나기 위한 선택은 희망도 계획도 없다. 그래서 더 절박하다.     

구체적인 계획이 없고, 고민한 시간이 짧았다고 그 선택의 결말이 꼭 나쁠 것이라고 생각해서도 안된다.

긴 생각 없이 떠난 나라에서 나는, 연애와 결혼기간 합쳐 23년을 함께 하고 있는 지금의 남편을 만났으니 말이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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