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지은 Jan 10. 2024

누구에게나 영화 같은 사랑이 한 번은 찾아온다

길 위에 잦은 이별은 언제나 당연하므로

3개월을 목표로 떠난 호주에서의 유학생활이 1년을 넘기고 있었다.

어학연수를 다녀온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공감을 하겠지만, 3개월의 단기어학연수로 영어실력의 큰 성장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 정도의 기간은 견문을 넓혀주는 조금 긴 여행일 뿐이다.

3개월 만에 되돌아가기엔, 문서를 위조(?)하면서까지 떠나온 면죄부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기간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발견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나는 사립어학원에서 시드니대 부속 어학원으로 옮겨 아이엘츠(IELTS, 영어인증시험) 테스트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TAFE이라는 호주전문대에 들어가서 IT관련 공부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당시는 여러 인터넷 포털사이트들의 태동기였다. 홈페이지를 만들어주는 업체들이 따로 있었고, 개인들도 도메인을 사서 개인홈페이지를 구축하는 시기였다.

지금이야 카페나 블로그, 인스타그램 등으로 개인이 활발한 SNS활동을 할 수 있지만, 당시엔 마땅한 것이 없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 싸이월드가 생겼다.)


나는 웹디자인과 개발(Web design and Development) 학과에 들어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어린 시절, 엄마는 무슨 선견지명이 있으셨는지 다른 자매들이 피아노를 배울 나이에 나만 컴퓨터학원에 보내셨다. 그 이후에 꾸준히 컴퓨터 관련 자격증을 따두었던 것이 내가 TAFE에서 공부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이었지만, 실습시간이 많아 나 같은 유학생들도 무난히 수업을 쫓아갈 수 있었다.

메인 수업 중, 드림위버라는 웹개발 프로그램으로 코드를 짜서 웹사이트를 구축하고 제출하는 것이 있었는데, 배운 내용을 바탕으로 혼자서 시간을 들이면 되는 것이었으므로 내 적성에도 맞았다.

나는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것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새로운 것을 창작하는 것은 좋아했다.

 



호주에서의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알던 사람들이 모두 떠났다.

단기어학연수로 온 한국사람들은 한국으로 돌아갔고, 휴가로 온 유럽친구들은 각자의 나라로 돌아갔고, 서핑하러 온 일본친구들도 비자가 끝나면 돌아갔고, 차이나타운을 주름잡던 중국친구들은 상급학교로 진학했다.

떠나는 친구들을 배웅하러 공항으로 가는 이들의 수는 점점 줄어들었고, 마지막까지 남는 이는 어쭙잖은 사교력을 발휘한 내가 유일다.

그때의 기억 때문인지, 지금까지도 공항은 나에게 여행 전 설렘을 주는 장소이기보다 이별의 장소로 더 각인되어 있다.

외로움이 짙어지고 있었다.

이국의 정취와 새로운 시도들은 날이 갈수록 평범한 일상이 되어 공허함 속으로 사라졌다.


어학원에서 나올 무렵 좋은 감정을 갖게 된 사람이 있었다. 스위스 사람이었다.

그는 휴가차 온 호주에서 나를 만났고, 3개월의 휴가가 끝나자 본인의 나라로 떠났다.

무슨 인연이었는지, 곧이어 그의 누나가 호주를 방문했고 난 그의 누나와  좋은 친구가 되었다.

그들이 떠나고, 그와 그의 누나의 초청으로 스위스로 날아가 한 달의 시간을 함께 보냈다.

머무는 동안 그의 부모님도 만났고, 국제결혼을 한 친구커플도 소개를 받았지만, 내 마음은 항상 공항에 있는 느낌이었다.


'어차피 우리는 헤어질 사람들이다.'


비행기를 타야 하는 사람은 정해져 있었고, 헤어져야 할 시간은 다가오고 있는 익숙한 시드니 공항의 냄새가 나를 움켜쥐고 있었던 것이다.

국제연애라던가, 원거리 연애 같은 낯선 길을 선택하기에 22살의 내가 참고할 수 있는 경험은 너무나도 적었다.

다시 호주로 떠나오기 전날, 대화보다는 침묵으로 더 많이 채워진 그날, 나는 ‘우리가 너무 일찍 만났다’고 생각했다.

순간, 과거에 같은 생각을 한 기억들이 떠올랐다.


고등학생 때, 학원가 주변을 활보하며 어설픈 고백과 애정을 주고받다가 연상의 누나에게 가버리기 전, 그 녀석도 같은 소리를 내뱉었고, 대학생이 되어 서로의 학교를 오가며 만나다 군대로 간 사람에게 나 역시도 같은 말을 남기고 호주로 떠났다.     


우린 너무 일찍 만났을까?
우리가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더라면,
어떠한 선택에 있어 낼 수 있는 용기의 크기가 더 컸을까?


일찍 만나게 되는 모든 인연들은, 남은 날들이 가져다 줄 큰 보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별하였던 게 아니다.

인생이 주는 시련에 너와 나는 피해자 일 뿐이라고 유체이탈 화법을 구사한 것뿐, 솔직히 말하면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연상의 누나가 너보다 더 좋아졌다고 말할 용기가, 군대 간 너를 끝까지 기다릴 자신이 없다는 용기가, 내가 아무것도 될 수 없는 이곳에서 너만 믿어도 되냐고 물어볼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때의 내가 스물두 살이 아니고, 서른두 살이었다고 해도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야'라는 마음속의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리고 다음 날, 취리히 공항은 나에게 시드니 공항만큼 슬픔이 가득한 장소가 되었다.


년 후, 내가 한국으로 돌아와 직장생활을 하고 있을 무렵, 그로부터 이메일 한통이 도착했다.

캐나다 여행을 가기 전  한국을 경유하게 되었다며, 서울에서 잠깐이라도 만날 수 있는지 묻는 내용이었다.

안될 인연은 길목을 지키고 서있어도 못 만난다고 했던가.

나는 마침 그날 오전에 동생과 함께 베이징으로 떠나기로 되어 있었다.

그렇게 수많은 날들을 한국에 있었는데, 그가 한국에 머무는 고작 5시간 동안 나는 한국에 없을 예정이었다.

인생길 위에서 "인연"이란 때소름 돋을 만큼 확실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그의 이메일을 받은 날, 난 우리의 인연 똑똑히 목격했다.


드라마 <도깨비>에 이런 말이 나온다.

신(육성재): "운명은 내가 던지는 질문이다. 답은 그대들이 찾아라."


그날, 신은 나에게 질문했고, 내 답은 '예정대로 베이징행 비행기에 오르는 것'이었다.




요즘은 국제결혼을 한 커플들도 흔하고, 장거리 국제연애를 하는 커플들도 주변에 많이 보인다.

그들을 볼 때마다 어쩌면 나의 모습일 수도 있지 않았을까 가끔 생각해보곤 한다.

내가 그때 스위스에 남았더라면, 중국에 가지 않고 그를 한국에서 만났더라면 내 인생길은 또 어느 곳으로 휘어졌을까.

외국에서 나와 전혀 다른 모습의 사람과 사랑에 빠졌던 일은 이별로 마무리되면서, 내 인생  편의 영화 같은 일이 되었다.


  


3편에 계속.

이전 02화 나 같은 딸을 낳으면, 나는 다 용서할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