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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은 Jan 17. 2024

가슴에 빵을 품은 남자

나의 모든 사랑은 큰 용기가 필요하다

나는 호주로 돌아왔다.


관광비자로 어학연수를 하던 신분을 벗어나, 학생비자로 본격적인 유학생활에 접어드니 합법적으로 파트타임 잡을 가질 수가 있었다.

나는 시드니 시내에 막 오픈을 한 한국식당의 주말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했다.

주중에는 학교를 갔고, 주말에는 오후 5시부터 10시까지 에서 홀서빙을 했다.


본격적으로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는 생활은, 어학원에서 관광을 온 기분으로 각국의 친구들과 자유롭게 어울리던 것과는 다른 생활이었다.

적극적으로 사람들 어울리려 노력하지 않으면, 그저 시간은 반복되는 일상으로 채워질 뿐이었다.


어느 주말, 근무를 하러 나가니 새로운 직원이 들어와 있었다. 그는 주 7일 오후 5시부터 새벽 5시까지 주방 보조로 근무를 하는 젊은 대학생이었다.

그는 근무가 겹치는 날엔 나를 "누나"라고 부르며, 시시한 농담을 걸기도 하는 순박한 청년이었다.

OO아, 내일 나랑 영화나 볼래?   


내가 그에게 이 말을 건넨 순간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가 않는다.

스위스를 다녀온 후, 이별이 정해진 또 다른 인연을 만들고 싶지 않았지만 동생이라는 그의 조건이 나의 경계를 느슨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다음 날 우린 영화를 같이 봤고, 그 후 밥도 몇 번 같이 먹었다.

하루는 약속한 시간이 한참을 지나도 그가 나타나지 않았다. 전화를 거니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상태였고 헐레벌떡 달려온 그는 내게 너무나 미안해했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괜찮았다.

나는 애정을 기대하지 않는 상대에게는 화가 나지 않는 법이라고 생각했다.



전화벨이 울렸다.

시간을 보니 새벽 6시가 안 된 시간이었다.

그 사람이었다. 집 앞이니 문 좀 열어달라는 전화였다.

대충 옷을 챙겨 입고 나가니, 상기된 표정의 그가 가슴팍에서 불쑥 종이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그 안에는 기차역 베이커리에서 파는 빵이 가득 담겨있었다.

이거... 식을 까봐 품고 왔어요.

잠이 덜 깨 그랬는지 얼굴을 가득 채운 그의 웃음이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는 일식집에서 일을 했고, 오후 5시부터 새벽 5시까지 한식당에서 일을 했다. 당시 6인 1실인 백패커가 숙소였는데 그곳으로 가는 시간이 아까워서 새벽에 일이 끝나면 공원 벤치에서 잠깐 눈을 붙이고 다시 일식집으로 출근을 한다고 했던 것이 기억이 났다.

그날은 공원에서 눈을 붙이는 대신 새벽 첫 기차를 타고 나에게로 온 것이다.

나는 달큼한 빵냄새를 느끼며, 안겨보지 않은 그의 가슴도 이 빵의 온기와 같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우리는 그날 둘 다 아르바이트를 무단 결근했다. 그리고 오후에는 나가 커플링을 서로에게 끼워주었다.


그는 관광비자를 연장하며 호주에 머물고 있었고, 일해서 모은 돈으로 뉴질랜드 여행을 , 한국으로 돌아갈 거라고 했다. 그리고 나의 공부는 학기만 남긴 상태였고, 그것이 끝나면 한국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사람이 사랑을 시작할 때, 확실한 해피엔딩만을 결론으로 두고 시작해도 항상 그 결말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하물며 호주에서의 인연은 언제나 그 끝이 헤어짐으로 정해져 있다는 것을 나는 차례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으므로  더 이상 아는 미래에 대해 불안함을 갖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그와의 연애 시작다.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한 날, 그는 미리 발권해 놓은 자신의 뉴질랜드 티켓을 사용하지 않고 나와 함께 한국으로 가겠다고 했다.

우리가 함께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해피엔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서울에서 직장을 다닐 것이고, 그는 대전에 있는 학교에 복학해야만 했다.

그건, 우리는 호주에선 항상 함께였지만, 한국에서는 헤어질 예정을 뜻했다.


왜 나의 모든 사랑엔
용기와 도전이 요구되는 것일까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대체 왜 나에게만?"이라고 생각되는 순간들이 더러 있기 마련인데, 삶은 나에게만큼은 사랑이란 것을 쉽게 내어주지 않는가 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 난 서울과 대전으로 떨어져 있어도 우리가 변치 않는 사랑을 할 것이라는 자신에 차 있었다. 적어도 우린 한국이라는 같은 나라안에 있을 것이고, 그는 나와 함께 하기 위해 뉴질랜드를 포기했으며, 23살, 24살은 사랑이 영원할 거라고  생각할 수 있는 나이였기 때문이다. 



4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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