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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은 Oct 11. 2023

마흔이라는 불치병

노산을 앞둔 엄마들을 위한 글

39살, 늦둥이를 낳았다.

낳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일 때,

요즘 같은 만혼시대엔 쉰 살은 돼서  늦둥이소리도 할 수 있는 거라고 어른들은 말다.

산부인과에서는 둘째와 셋째의 터울 7년이나 되니 셋째는 초산과 같을 거라고 했다.

역시나 경산임에도 예정일을 넘겼고, 유도분만을 위해 입원한 바로 그날 진통이 왔다.

둘째 출산 때부터 덕을 톡톡히 본 무통주사의 효과로 출산과정은 순탄했다.

나의 세 번째 분만은 첫 아이 때만큼 지구가 요동치지도, 이성의 끈이 산산조각 나지도 않고 마무리가 되었다.

나의 침착함에는 이유가 있다.

애는 낳는 것보다 키우는 것이 더 힘들고, 힘들게 낳았든, 쉽게 낳았든 키우는 것이 어든 그보다 더 힘들다는 것을 첫째와 둘째 육아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호들갑을 떨고 싶지가 않았다.

생각해 보면, 큰 애가 여덟 살, 둘째가 여섯 살쯤 된 후에야 한숨 돌리고 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후 2년 남짓도 “야호 애 키우기 끝이다”하고 마냥 편했던 것만은 아니기에  그 고생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라고 생각하니 막막하기만 했다.


몸은 출산부터 빠르게 회복의 길을 걸었지만, 마음은 20년도 더 늙어버렸다.

반드시 무언가가 되어있어야 할 것 만 같은 ‘마흔’이라는 나이와 큰아이 낳고 10년 만에 되돌아온 육아 도돌이표가 내 마음 노화의 주범이었다.

내 나이와 비슷한 주위엄마들은 자기 자신들을 찾을 준비를 해 나갔다.

복직을 하고, 제2의 인생을 위해 공부를 하고, 또는 아이의 학교 일에 발 벗고 동참했다.

그 시간에 나는 셋째의 수유를 하며 ‘이 아이 입학할 때 내 나이 몇일까?”같은 생각으로 마음이 조급해졌다.   

때로는 '엄마 게 살라고 울애기가 와주었구나.'라며 고마웠다가도, '셋째 아이를 갖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내 생활은 어땠을까'를 상상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곤 했다.

모든 일 다 때가 있다고.

틴에이저 큰 애와 초등 갓 입학 한 둘째를 데리고 하는 갓난쟁이 육아 결코 쉬울 리가 없다.

"셋째 아이쯤 되면  육아전문가 언저리쯤은 되지 않나요?"라며, 강 건너 불구경같이 하는 소리를 간혹 듣기도 했다.

그건 남의 일이니 쉽게 하는 소리다.

주니어옷 매장과 공갈젖꼭지 코너 사이에 서서 느끼는 심리적 거리감은 '내가 어쩌다 이러고 있냐'는  헛웃음을 유발다.  

10년 터울육아를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마다 나의 40대는 늙은 엄마로만 채워질 것 같은 우울감에 가득 찼다.


"서른아홉 살이나 마흔한 살이나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더라."


아이가 한 살인데 내가 마흔인 게 너무 싫다는 푸념을 들은 동네 언니가 말했다.

그녀는 41살에 둘째를 낳았다.

당시 마흔이라는 불치병에 걸려있던 나는 그 말에 전혀 공감하지 못했는데, 지나고 생각해 보니 그녀는 옳기도 했고, 틀리기도 했다.

난 내가 늙은 엄마여서 예전과 똑같이 하지 못할 것 같던 신생아육아를 서른 살 처음 엄마가 되었을 때와 같은 방법으로 하고 있었다. 오히려 더 향상된 육아아이템들의 도움을 적절하게 받았다. 과거 이런 '육아용품이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한 것들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검색하면 언제나 인터넷쇼핑몰에 그것들이 존재했다!

두 딸들을 데리고 캠핑, 체험활동, 공연, 여행 등으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참 많이 다녔었다.

'40대 저질체력으로는 30대 젊은 엄마들처럼 아이에게 해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세 아이 데리고 비행기만 10번도 넘게 탔다. 그것도 아빠 없이.

내가 노산엄마여서 예전만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늦둥이육아.

아이에 대한 사랑은 내가 처음 엄마가 되었을 때와 똑같았고, 육아의 질은 그때보다 훨씬 좋아졌다.

내가 막연하게 걱정했던 일들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다.


이제 막내가 8살이 되었다.

"이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할 때 나는 몇 살이 되지?"라고 생각했던 그날이 왔다.

내가 마흔 살 노산 엄마를 선택함으로써 포기해야 했던 기회비용을 생각해 보니 0원이다.

그리고 나는 노산엄마로서 살아온 지난 세월들을 거름 삼아 아이 셋을 키우며 세상을 바라보는 이야기로 글을 쓴다.

이쯤 되면 나는 아이를 낳지 않아서 생기는 기회비용이 더 컸을 것 같다.

아이를 낳기 적당한 나이라는 것은 없다.

노산이라는 단어자체를 없애는 것은 어떨까.

노산이라는 단어에 매몰되어 부질없는 걱정들에 쌓여있는 엄마들이 있다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라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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