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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ika Feb 28. 2023

사랑의 중력(1)

흘러가길 바라는 마음.

1)


 살아간다면 언제나 끝을 마주하게 된다. 삶의 끝에선 죽음이, 관계의 끝에선 이별이 기다린다. 이름만 다를 뿐, 헤어짐을 고하는 순간이 찾아오면 우리는 그제야 그토록 유한했던 시간을 깨닫게 된다. 그제야 끝에 서서 자신이 위치했던 공간과 시간의 의미를 반추하게 된다. 상실과 고통의 손자국이 의식 있는 존재에게 커다란 잔흔을 선물하고 나면, 존재의 의식 뒤편에 어떤 좌표가 생성된다고 한다. 끝의 모음. 몇 주 전, 네가 이별을 포장해 나에게 건네주면서부터, 내 소유의 3차원에는 새로운 끝을 의미하는 좌표가 찍혔다.



 돌이켜보니 우리는 숱한 끝을 수면 아래로 잡아당기고 있었나 보다. 마침표를 찍어야 할 상황에 우리는 페이지에 점을 계속 찍어갔고, 결국엔 이야기가 이어져갔으니까. 우리는 지독히도 서로를 배려한 나머지, 차마 서로의 입에서 마지막이란 단어를 뱉지 못했다. 존중하고 이해한다는 명목하에 서운함과 속상함을 묻어두고 상처 주지 않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한 너와 나였다. 그 방식이 언젠가 터질 화약고가 될지도 모른 채, 우리는 서로를 위하며 사랑해 왔다. 관계에 악의가 낄 틈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가 왜 헤어져야 할까. 점점 줄어가던 대화에서 알아차렸어야 했는지, 조금씩 뜸해지던 연락에서 느꼈어야 했는지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난 우리가 안정된 관계로 나아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합리화에 불과했나 싶은 생각이 들어 마음이 복잡하다. 여러 위기를 겪어왔지만 이제는 끝을 마주쳤다는 기분이 든다. 이제 우리의 페이지를 채웠던 점들은 점점 사라지고, 언젠간 생략의 문장 부호로 추억을 줄여가겠지만 아직은 그러지 말아 다오, 시간아.


 각자의 상황에서 우리는 스트레스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고, 서서히 지쳐갔으며 결국 이별이란 책임을 같이 짊어져야 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겠다. 네가 헤어짐이라는 단어를 뱉기 머뭇거렸을 때, 내가 그 단어를 먼저 꺼내야 한다고 느꼈다. 감히 헤어질 순간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지만, 우리 사이에 흐르는 기류엔 끝이 맴돌고 있었으니까. 나는 너에게 이유를 묻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내가 너에게 원했던 것은 이런 종류가 아니었지만 너는 매번 나의 기대와는 다른 것들을 들고 왔었다. 관계의 개선을 위해 대화를 시도하는 행위도 나의 몫이었으나, 이번에는 그러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너는 이별을 통보했으니, 나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너와 헤어졌다는 사실을 공공연히 떠벌리고 싶진 않았지만, 친구들을 만나게 되면 자연스럽게 너의 안부가 나오게 되고 나는 사실을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까지 거짓말을 하고 싶진 않았으니까. 헤어졌다는 얘기를 들은 친구들은 놀라며 이유를 물었지만, 나는 대충 얼버부리며 대답을 매듭지었다. 헤어질만한 특별한 잘못이나 원인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굳이 나의 입장에서 말을 길게 하다 보면, 너의 잘못이라는 뉘앙스가 그들에게 비치지 않을까 싶은 노파심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괜찮아 보이네."

 "그렇긴 해. 아마 관계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 아닐까?"

  관계의 끝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어색한 침묵이 관여할 틈도 없이 주변 사람들은 평을 남겼다. 그럼 나는 나의 상태를 짧게 되돌아보고 그들에게 대답하곤 했다. 괜찮은 척이 아니라, 정말로 괜찮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너에게 쏟았던 시간과 에너지가 나에겐 꽤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나 보다,라고 생각하며 나의 정신적, 신체적 건강을 위해 그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니 오히려 더 괜찮은 하루들을 그럭저럭 보냈기 때문이었다.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힘들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걱정과 위로는 그들의 몫이 아니라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를 속여왔나 보다. 몰려오는 거대한 파도가 두려워 스스로에게 괜찮다고 말하며 눈을 질끈 감아버린 사람처럼, 여태 내가 해왔던 방식대로 또 회피하고 있는 건가, 나는?




  참을 수 없는 외로움이 찾아오면, 사람은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불안과 두려움에 뒤섞인 감정을 벗어나고자 기댈 것을 필요로 한다. 서로를 비스듬히 기대게 하는 것이, 사회적 동물의 습성을 내재한 인간의 방향이니 보통의 인간은 혼자 존립할 수 없지 않은가. 인간의 끝을 조우한 존재, 인간의 굴레를 벗어던진 자만이 고립되어도 고립되지 않은 상태로 서 있을 수 있겠지만 그런 상태는 아직 환상에 가깝다.

 나 역시 환상을 꿈꾸는 사람이지만, 외로움은 보다 현실적이고 아프게 다가온다. 외로움은 생존에 위협을 가하고, 투쟁을 유발하는 방식으로 내가 인식하는 시간의 흐름에 변화를 야기한다. 인식의 시계는 곧 외로움에 의해 잠식당하고 시간은 느리고 지루하게 흐르기 시작한다. 지금부터 시간의 의미는 외로움의 영역이다. 지독하게 고통스럽고 지독하게 어두워서 기대가 사라진 순간의 연속. 

 누군가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고, 순간의 연속이며 이미 존재하는 것이라고 했던가. 시간과 외로움의 일체가 일어나면, 시간은 멈춘 것처럼 느껴지고 나와 타인의 관계가 단절된 것 같은 감각을 유발할지도 모른다. 세상에 혼자 있는 것만 같은 지독한 외로움 속에서도 나와 세상은 존재하지만 타인의 존재는 사라진다. 현실 속에서 실제로 사라지는 것이 아닐진 몰라도, 내가 인식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선 사라진다. 그러다 착각에서 돌아와 현실에서 타인의 존재가 피어오르기 시작하면, 여러 사람들을 거쳐도 결국 한 사람만 커다랗게 남는다. 의식 있는 동물이 만들어낸 것인지 혹은 내재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우선시 되는 생존에 어쩌면 반하게 만드는 감정인 사랑. 내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 그건 바로 너였다.



 너와 함께 보내는 휴가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러지 못하고 혼자 집에 있게 되는 시간이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울지 몰랐다. 타인과의 연결고리에서 벗어나 온전히 혼자 있을 시간이 닥쳐오니 참을 수 없는 외로움이 밀려왔다. 누군가를 만나 외로움의 감정을 해소할 의욕도 전혀 생기지 않았다. 외로움은 외로움에 서로 기대어 살아가는지, 외로움에 뒤덮인 나는 외로움에게마저 소외감을 느꼈다.

 타인뿐만 아니라 세상도 사라진 기분. 철저한 고립감이 몸을 지배하고, 집 밖으로 나갈 마음이 꺾인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지만, 중요한 걸 꺾어버린다. 집 안에 고립되어 있으면 영겁의 시간이 나를 괴롭힐 것을 알고, 일상의 공간이 주체할 수 없는 생각의 범람과 고통으로 가득 채워진다는 사실도 알지만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나를 소외시키는 외로움의 옷자락을 붙잡고, 밑으로 끌어당기는 고립감의 얼굴을 쳐다본다. 누구에게 곁을 내줘야 하나, 한참을 고민하다 문득 내면에서 새어 나오는 감정의 실들이 보인다. 내가 미쳐보지 못했던, 아니면 애써 외면했던 진실한 감정들이 넘쳐나더니 나를 포함한 모든 것들을 삼켜버린다.



 넘쳐흐르던 감정의 물결 속을 쳐다보니 그리움과 미움, 행복과 슬픔이 함께 어우러져 우리의 소중했던 순간을 추억하고 있었다. 너와 나눴던 대화의 내역들과 함께 찍었던 사진들, 같이 놀러 가면서 생긴 기차표와 뮤지컬과 같은 문화표들, 서로 주고받았던 선물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나의 추억이라며, 지우지 못했던 것들. 귀찮음을 핑계로 보지 못했던 것들. 버리면 후회할 것 같은 마음에 정리하지 못했던 것들. 언젠가 무뎌질 것이라며 아픈 마음과 슬픔을 무책임하게 방치했던 나날들. 

 나는 언제나 타인의 앞에서 속마음을 갈무리하고, 괜찮은 척 시늉을 해오며 살아온 게 아닐까. 내면의 깊숙한 곳에 위치한, 내가 진정 챙겨야 할 자신의 감정을 회피하고 무시한 채로 허수아비마냥 사회적인 몸짓과 행위를 세상을 향해 반복해 가며. 타인과 세상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그들보다 더 큰 존재인 네가 사라지고 나 홀로 발 디딜 곳 없이 남아 있었다. 어딜 가든 상실의 끝자락이기에 더 이상 피할 곳은 없어 보였다. 시야에 절망이 가득해지고, 내면엔 공허함이 차올라 기도를 막으려고 할 즈음, 그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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