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이 끝난 1953년, 한국 GDP는 13억 달러, GNP는 65달러(1955년)였다. 세계 최빈국 수준이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2020년이 왔다. IMF의 2019 한국 예상 GDP는 1조 7,208억 달러를 기록했다. GNI는 3만 달러를 넘었고 UN, IMF, 세계은행, OECD에서는 한국을 이제 선진국으로 분류한다.
우리의 이러한 역동적인 역사는 세계사, 아니 인류사에서조차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쇄국과 경술국치를 거쳐 좌우 갈등과 6.25 전쟁을 겪고 지속적인 안보 위협 속에서도 산업화에 성공했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로버트 루카스 교수는 이를 보고 '기적'이라 표현했다. 그러나 아직이다.
경제에 빨간불이 켜졌다.
통계청에 의하면 한국은 9년 뒤, 인구 ‘자연 감소’ 국가가 된다. ‘인구절벽’인 것이다. 인구가 줄면 생산과 소비가 감소하고 경제 규모도 쪼그라든다. 그런데 경제는 이미 쪼그라들고 있었다. GDP 디플레이터, 소비자물가지수, 생산자물가지수 등 주요 물가지수는 모두 마이너스를 보이며 사실상 디플레이션에 진입한 것이다. 그런데 정치는 갈등과 분열을 낳고 있고 신뢰 자본도 소진되고 있다. 정책도 문제다. 반(反) 시장 정책이 난무하고 노동시장은 점점 뻗뻗해 지고 있다. 각종 규제들은 새로운 산업 출현을 가로막았다. 새로운 혁명적 변화가 전방위로 확산되는데, 타다 앞엔 빨간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 여기에 무역전쟁, 홍콩 시위, 수출규제 등 대외적 악재까지 겹쳤다. 한국은 인구·생산·수출·투자·소비 등 모든 면에서 활력을 잃어가는 ‘수축 경제’에 진입했다. 이대로라면 정말 위기다.
대한민국은 이제 성장지향적 패러다임이 더 이상 작용하지 않는 상황에 이르렀다. 우리는 중요한 전환기를 맞았다. 2020년 대한민국은 또 한 번의 도약을 요구받고 있다. 역사적 분기점에 선 우리는 단지 이 위기를 견뎌내는 데에만 그쳐서는 부족하다. 훨씬 더 강인해져야 한다. 1인당 소득 3만 달러대에서 주저앉고 말 것인가. 아니면 소득 5만 달러대 선진국으로 도약할 것인가. 국제사회의 거대한 도전은 우리에게 나태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페달을 밟지 않으면 쓰러지는 자전거처럼, 여기서 주저앉는 것은 곧 다시 중진국으로 추락하는 것을 뜻한다. 이제 앞으로 나아갈 새로운 동력을 찾아야 한다.
급격한 노화를 겪는 한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초(超)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신성장동력, ‘소프트파워(Soft Power)’를 개발해야 한다. 소프트파워는 강제력보다는 매력의 힘으로, 군사력이나 경제력과 같은 하드파워에 대응하는 파워이다. 과거는 부국강병을 토대로 한 하드파워, 곧 경성(硬性) 국가의 시대였지만, 앞으로는 문화를 토대로 한 소프트파워, 곧 연성(軟性) 국가가 주도하는 시대가 올 것이다. 즉, 창의력과 혁신을 바탕으로 한 소프트파워는 '제2의 도약'을 위해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다음 국가적 과제인 것이다.
다행히 우리나라는 이 소프트파워를 잘하는 듯싶다. 영국 브랜드파이낸스 국가브랜드 2019 보고서에서 한국의 국가브랜드는 2.1조 달러, 세계 9위로 역사상 최고 기록을 냈다. K-Pop덕분이다. 실제로 문화체육관광부와 해외문화홍보원이 발표한 대한민국 국가이미지 조사를 보면, 한국에 대해 가장 많이 접하는 분야는 ‘현대문화(36.2%)’로, ‘경제(18.1%)’, ‘안보(17.8%)’, ‘문화유산(10.7%)’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았다. 이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핵심어’는 K-Pop(22.8%)인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문화(19.1%), K-뷰티(14.2%)가 그 뒤를 이었다. 우리가 영국을 신사의 나라, 프랑스는 에펠탑을 떠올리듯, 이제 외국인들은 한국을 ‘K-Pop의 나라’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미국 시카고조사위원회(Chicago Council Survey)가 실시한 미국인 여론조사 결과에서 한국은 ‘미국인이 인식하는 세계에서 영향력이 큰 국가’ 중 7위를 기록했다. 역시 소프트파워 덕분이다. 이처럼 K-Pop은 명실상부 국위선양 중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보신각 급인, 美 타임스퀘어에서 2020 새해 연 BTS, '한국어 떼창' 영상 , 출처:MBC 특히 BTS의 활약이 눈부시다. BTS는 미국 CNN 선정 '2010년대 음악을 변화시킨 10대 아티스트'에 선정됐다. 비욘세, 켄드릭 라마, 프랭크 오션, 레이디 가가, 드레이크, 메트로 부민, 테일러 스위프트, 솔란지, 카니예 웨스트 등과 함께 톱 10에 뽑힌 것이다. CNN은 BTS에 대해 "K팝을 미국에 대중화시켰다"며 "K팝을 주류음악(mainstream)으로 이끌었다”라고 밝혔다.
빅히트의 기업가치가 2조 원에 달하는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가운데, 미국 포브스는 2019년 10월, BTS가 약 5.5조 원의 GDP 창출 효과를 낳는다고 분석했다. 이는 세계은행의 2018년 한국 명목 GDP, 1924조 원의 0.2%에 해당하는 규모이다. 한국경제원이 발표한 '방탄소년단의 경제적 효과'라는 보고서에서는, 방탄의 연평균 국내 생산 유발 효과와 부가가치 유발 효과를 연간 약 5.5조 원으로 추정했다.
BTS의 인기가 K-Culture와 수출 경제에 미치는 영향도 대단하다. 방탄신드롬이 ‘고속도로’를 만든 것이다. 이제 고속도로에는 크고 작은 K-Pop그룹들이 BTS를 따라갈 것이다. K-Pop뿐만 아니라 K-Culture(푸드, 패션, 뷰티, 관광, 언어)와 인재, 유학, 자본 등이 활발하고 더 매력적으로 이동할 것이다. 실제로 한국 경제원은 BTS 인지도가 1포인트 증가할 때 주요 소비재 수출액 증가율은 의복류 0.18%, 화장품 0.72%, 음식류 0.45% 포인트에 이른다고 분석했다. 또 3개월 이후 관광객 수 증가율은 0.45% 포인트에 달한다고 분석했다. 이렇게 BTS는 한국의 가치를 높이고 있다.
덕분에 외국인들은 우리나라의 생활 방식에 호감을 가지고 동경을 하게 된다. 그리고 한국인들의 상호 관계나 정(情) 문화 등에 대해 매력을 느낀다. 더 나아가 한국을 관광하고 한국인과 사귀고, 한국에 살고 싶어 하는 자기동질화에 이르게 된다. 실제로 지난 2019년 한 해 우리나라를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 수는 1750만 명에 이르며 사상 최고 기록을 경신했다. 직접적인 관광 수입 25조 원에다 생산 유발과 취업 유발 효과가 각각 46조 원과 46만 명에 달한다는 추산이니, 내수 활성화에 크게 기여한 것이다. 매우 고무적이다.
이렇게 BTS를 통한 한국 문화와 언어의 체험은 나아가 우리의 국제정치적 활동의 폭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특히 동남아권에서 그렇다. ‘전쟁을 이겨내고 산업화와 민주화를 모두 달성하고 K-POP과 같은 매력적인 문화 콘텐츠를 만들어 내는 롤모델 국가’ 지난 9월 아세안 정상회담에서의 한국에 대한 평가였다. 태국 총리 라윳 짠오차는 문재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K-POP을 선호한다. 한류가 인기"라며 "앞으로도 K-POP 등 문화교류가 활성화되기를 기대한다"라고 말했다. 미얀마의 아웅산 수지도 정상회담 언론 발표에서 "한국문화에 익숙하다"라고 언급했다. 라오스 총리 통룬 시술릿은 “한국은 존경스러울 정도"라며 "특히 한국에 대해서 많이 배우고 싶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모두 한 나라의 정상들이 한 말이다. 이렇게 대중예술은 국가의 품격을 높여주고 있다.
하지만 국위선양을 하고 ‘평화와 사랑’을 이야기하는 이들이 군대에 가 총을 잡게 될 처지다. 작년 정부는 ‘병역 대체복무제도 개선 방안’을 발표했다. 기존 체육·예술 분야 대체복무를 유지하는 대신, 대중 연예인은 포함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저출산으로 병역자원이 부족해 특례 범위를 늘릴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다시 말해 병역자원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대착오적 발상이다. 인구절벽으로 인한 병역자원 부족에 따라 대체복무 확대가 불가하다는 주장은 잘못된 접근이다. 물론 국방은 매우 중요하다. 국방력의 우열이 국가의 존망을 좌우할 수도 있기 때문에, 평화 시에도 충분한 국방력을 유지해야 한다. 평화 없이는 아무것도 안 된다.
하지만 국방력은 외형과 산술적 숫자로만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적은 수로도 충분히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고, 다른 힘으로 레버리지(지렛대)하여 평화를 유지할 수도 있다. 예로부터 이스라엘이 아랍을 상대하고 자주 국방력으로 버팀목이 되고 있는 것은, 숫자가 많고 가 아니질 않은가. 특히 국력이 강한 나라들은 국력만 잘 유지해놔도 잠재적인 군사력을 유지할 수 있다. GDP 대비 국방비 순위에서 100위권에도 없을 정도인 일본(1% 남짓)이 GFP 2019년 군사력 순위 6위를 기록한 것만 봐도 국력의 국방적 힘을 보여준다. 백수가 건강과 능력만 잘 유지해놨다면 언제든 나가서 직장을 구할 수 있듯이, 국가도 국력만 잘 유지해놨다면 여차하면 언제든 군력을 끌어올릴 수 있다.
시대가 변하면서 대중예술이 국력이 이바지하는 힘이 어마어마해졌다. 대중예술로 인해 생기는 경제적 효과, 산업에 미치는 영향력, 국가 브랜드 이미지 제고 등 긍정적 요인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BTS의 경제적 창출 효과는 한국 명목 GDP의 0.2%에 해당한다. 이런 표현이 썩 좋지는 않지만,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기엔 ‘군대에 간다’보다는 ‘국력 손실’이라는 용어가 더 와 닿는다. 영향력 있는 대중예술인의 기회를 버리는 것은 스스로 국력을 잃고 위기를 앞당기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대중예술문화 분야에 대한 병역 대체복무 제도의 전향적 검토는 반드시 필요하다.
병역법 시행령에 따르면 올림픽 3위, 아시안게임 1위 그리고 순수예술 분야에서 국제경연대회 2위 이상 입상자 등에게만 예술체육요원으로 복무할 기회가 주어진다. 현재로선 대중가수가 병역특례를 받을 방법은 없다. 다만 예상 못한 변수로 인해 종종 예외를 반영하는 일은 있어 왔다. 1994년 이창호 9단(바둑)에게 병역특례가 주어졌고 2002년 한일 월드컵과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4강에 진출한 선수들에게도 병역특례가 주어졌다. 예외적으로 말이다.
한국이 군사·경제력으로 미국, 중국, 일본을 뛰어넘는 주도적인 나라가 되기는 어렵다. 강대국 사이에서 살아남고 지금의 경제 위기를 극복하려면 초(超) 부가가치 소프트파워를 키우는 것이야말로 우리 모두를 위한 국가적 과제다. 다행히 지금까지 싹을 잘 키워왔다. 민간 덕분에 무럭무럭 잘 자라왔다. 그리고 빌보드 1위까지 했다. 그런데 이제와 정부가 다 큰 싹에 물을 주지 않으려 한다. 더 쑥쑥 성장하라고 영양제를 줘야 할 판에, 썩으라는 것이다. 군대나 가서 말이다.
2020년이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 같은 시대착오적 ‘악(惡)’은 과감히 제거해야 한다. 유연하게 생각하자. 소프트파워를 옮아 매는 과거의 낡은 규칙을 타파하자. 2020년 현실에 맞게 걸림돌은 치우자. 그러므로 산업을 활발히 성장시키고 국가경쟁력도 확보하자. 결국 다 같이 잘 살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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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재영 전략가(Strategist)
브랜드경험 디자이너·컨설턴트.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시각디자인과를 졸업했으며 홍대 대표 홍보모델을 겸했습니다. 2017년 위디딧(wedidit)을 설립해 기획재정부, 행정안전부, 포스코, 교육부, SK 등과 작업했으며 홍익대, 서울시, 차의과대, 청운대 등에서 활발히 강의했습니다. 매일경제 칼럼니스트이며 YTN생생경제, SK 공식블로그, 조선비즈 등에서 소개되었습니다. 성공적인 디자인은 ‘전략’에서 나온다고 생각하며, 전략기획과 디자인을 함께 하는 '전략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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