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래리 Sep 11. 2022

비가 올 땐 운동화를 신자

폭우에 기분까지 침수될 수는 없어


2022년 여름은 태풍과 장마로 특히나 비가 많이 왔었던 것 같다. 누수를 방지하는 차수판 주문건수도 평균 대비 10배로 폭증했다고 하니, 적어도 예전 같지만은 않다는 거다.


난 여름을 좋아하지 않는다. 선천적으로 땀이 많아 덥고 습한 날씨엔 금방 꼬질 해지는 것이 이유 중 하나다. 

하나 더, 비가 올 때의 그 먹먹한 공기를 들이마실 때면 온도가 높은 사우나 수정방에 오랫동안 있는 느낌이 들어서이다. 


올해엔 여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게 된 이유 하나가 더 추가되었다. 그것은 내 운동 루틴을 방해하는 장마와 폭우였다. 올해는 특히 버킷리스트 중 하나인 바디 프로필을 준비하느라 7월 내내 하루에 5km 이상을 달렸는데, 폭우가 내리는 날이면 그마저도 할 수 없었다. 헬스장도 누수로 인해 영업을 중단하는 날이면 어쩔 수 없이 유튜브에 '층간소음 없는 유산소 운동'같은 것들을 집에서 틀어놓고 따라 했다.


사람을 꼬질꼬질하게 만드는 더위, 습기를 한껏 품은 공기 덕분에 컨디션이 떨어진 상태에서 비까지 쏟아진다면 아득해지는 정신을 잡기가 여간 쉽지 않았다. 올해 7월도 그런 날이었다. 예정된 행사 준비로 8시 출근, 22시 퇴근을 반복하며 내 체력은 굵게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주룩주룩 다운된 상태였다. 하지만 운동을 포기할 순 없었다. 8월 말에 예정된 바디 프로필마저 포기해버린다면 올해 전체 패배감이 나를 덮칠 것만 같았다. 일에 찌든 직장인이 되긴 싫었다. 


창밖을 보니 비가 우직 우직 떨어지고 있었다. 포기를 할 참이었다. 23시경 장대비가 부슬비로 바뀌는 것을 보기 전까진 말이다. 비가 다시 쏟아지기 전에 운동화 끈을 조여 메고 밖으로 나가 스마트워치로 달리기를 클릭하며 몸을 앞으로 끌고 나갔다.


좋은 선택이었다. 달리기를 시작하니 배배 꼬였던 컨디션이 풀리고, 머리가 맑아졌다. 출근시간 강남역 사거리 교차로처럼 복잡하던 나의 머릿속이 새벽녘 숲길을 거닐 때처럼 평온해졌다. 일에 치이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7월의 반이었는데, 부슬비를 맞고 달리면서 남은 7월의 반을 잘 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리는 부슬비에 땀에 젖은 몸과 정신이 중화되었다.


요즘 "바쁠수록 루틴 하게"라는 말을 자주 되뇐다. 내가 맡은 역할을 잘 수행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전에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기분과 나의 일상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이다. 내 일상과 기분을 지키는 것은 무엇일까 많이 생각해보았다. 생각해보니 별것 없더라. 달리기, 무화과 호밀빵 먹기, 운동 후에 맥주 마시기 등이었다. 그런 작은 것들이 나의 일상의 기분을 지켜주고 있었다. 


그래도 난 여전히 장마를 싫어한다. 하지만 이제 싫어하는 것들에 기분을 침수당하지 않는 방법 하나를 안 느낌이랄까. 예전엔 맞서기 두려운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내 기분을 잘 지켜낼 수 있다는 믿음 정도. 내년에도 덤벼봐라 장마야.


매거진의 이전글 올해도 매미가 울기 시작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