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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 은 Mar 08. 2019

멈춰서 귀 기울여봐

메리 올리버의 시

한 편의 시가 수십 권의 철학서적을 대신할 때가 있다. 한 편의 시가 수십 편의 드라마보다 강렬히 심금을 울릴 때가 있다. 한 편의 시가 지금 시중에 널린 수많은 ‘힐링’ 서적보다 내 마음을 더 따듯하게 만져줄 때가 있다. 우리가 시를 읽는 이유 중 하나이다. 시가 죽은 아이를 살려내거나 복직을 시켜주고 밥을 먹게 해주진 않는다. 시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각의 순간, 시가 존재한다. 여기 시 한 편이 있다.   


   착해지려 할 필요 없어.

   참회의 심정으로 무릎으로 기어

   백마일 사막을 건너려 하지 않아도  돼.

   다만 네 몸이라는 그 연약한 동물이

   하고 싶은 걸 하도록 내버려 둬.

   네 절망을 말해 봐. 그럼 내 절망을 말해 줄게.

   그러는 사이에도 세상은 굴러가고

   그러는 사이에도 태양과, 말간 자갈돌 같은 빗방울들이

   풍경을 가로질러 가겠지,

   대초원들과 숲 속 깊숙이 들어찬 나무들,

   산, 그리고 강을 지나서.

   그러는 사이에도 기러기들이 청아한 저 창공을 높이 날아,

   집으로 다시 날아가는 거야.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세상은 네가 상상하는 대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너에게 소리쳐 말하지, 기러기들처럼 달뜬 목소리로 꽥꽥거리며-

   네가 있을 곳은

   이 세상 만물이 모인 가족의 품이라고.

                                     -- 「기러기 Wild Geese」


시의 첫 문장 “착해지려 할 필요 없어”는 우리의 상식에 도전한다. 선함과 올바름이라는 가치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보통 사람들에게 이 문장은 전복적이다. 흥미롭게도 당연하다고 믿어온 일반적 가치의 이러한 전복이 우리를 위로한다. 시는 착해지려 하지 말고 절망을 얘기해보라고 속삭인다. 우리가 절망을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세상은 알아서 잘 굴러가고 철새는 정해진 자연법칙에 따라 제 집 찾아 길을 떠난다. 그러니 착해지려고 안간힘을 쓰고 자책하지 말라고 한다. 어깨에 짊어진 삶의 무게 - 원칙과 규범, 관습과 도덕, 책임과 죄의식 등- 를 가끔 ‘다 내려놓고’ 싶을 때가 있지 않은가. 숨이 턱에 차오르는 것 같을 때 잠시 쉬어가도 좋다고 누군가 말을 걸어온다. 시의 역할이라는 게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괜찮다’고 다독여주는 손길 말이다. ‘착해지려 할 필요 없다’는 한 문장으로 우린 비밀스러운 위안을 느끼게 된다. 그러니 이제 정말 우리는 절망에 대해 얘기를 나누어 봐도 좋겠다. 이 시각에도 절망할 일은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으니 말이다.

  

이 시는 미국 시인 메리 올리버(Mary Oliver)의 대표작이다. 메리 올리버는 1935년 오하이오 주에서 태어나 매사추세츠 주 프로빈스타운에 50년 이상 살다가 플로리다로 이주했다.  1984년 퓰리처상을 받고 1992년에 전미도서상을 받은, 미국 현대 시인 중 가장 대중적인 작가이다. 그녀의 시는 반세기 이상 오하이오 주와 뉴잉글랜드 지방의 자연을 다루어 왔다. 시집 시장이 침체된 지 오래되었는데도 올리버의 시가 사랑을 받는 이유는 목가적 자연을 향한 독서 대중의 향수와 갈증 때문인지 모른다. 게다가 올리버의 소위 ‘자연시’에는 자연에 대한 명징하고 날카로운, 때로는 신랄할 정도의 정확한 관찰과 사색이 담겨있다. 여기에 더해진 시적 화자의 서정적 목소리가 독자를 친밀하게 부른다. 산책을 즐기는 올리버는 숲과 들판을 걷던 중 받는 영감을 그때그때 메모하기로 유명하다. 늘 공책을 들고 다니는데, 펜과 종이가 없을 때를 위해 지정된 나무에 연필을 감추어 두기도 했다고 한다.


올리버의 자연에 대한 애착과 집중은 영미시의 낭만주의 전통에 닿아있다. ‘산책하는 시인’으로서 18세기 영국 수필가의 면모도 엿보인다. 실제 올리버는 수필가로도 유명하다. 대중적으로 얼굴을 알리기보다는 은둔생활을 즐기는 점에선 소로우와도 비견될 수 있다. 그 외에도 휘트만, 에머슨, 디킨슨 등 19세기 미국 시인들과도 종종 견주며, 특히 몇몇 시에선 인간과 자연의 분리에 관한 프로스트의 현대적 감성도 엿보인다.


이렇게 영미 양쪽의 시 전통을 잇고 있다고 해서 올리버가 그저 그런 아류 시인이란 뜻은 아니다. 올리버의 시는 특유의 시적 정서를 담고 있다. 가령 인용된 시 「기러기」에서 기러기의 울음소리는 절망에 빠져있는 인간에게 세상이라는 가족의 존재를 알려주는 신호다. 낭만주의 전통에서 자연이 인간사와 떨어진 어떤 초월의 세계로서 시인이 도달하고 싶은 이상향 같은 것이었다면 올리버의 ‘기러기’는 무심하게 진행되는 생명의 법칙을 따르는 생물이면서 동시에 인간과 한 가족을 구성하는 존재이다. 올리버의 시에도 인간과 자연 사이에 간극은 존재하지만 자연이 인간의 고통을 대체할 이상적 관념은 아니다. 올리버의 자연은 인간 역시 불가피하게 귀속되어있는 생명의 순환과 객관적 법칙에 다름 아니다.  



필자가 처음 올리버를 접한 것은 시가 아닌 수필이었다.「부엉이 Owl」라는 제목의 수필에서 올리버는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복합적 감정과 인상을 서술한다. 수필의 화자는 한 밤중 숲 속을 산책하면서 다른 생명체들이 자는 동안 먹이사냥을 하는 부엉이를 상상한다. 화자가 부엉이를 상상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캄캄한 밤이기 때문이다. 오직 부엉이의 소리만을 들을 수 있는 시간에 잠에서 깨어나 배고픔을 채우려는 부엉이의 날개 짓과 할강 소리는 화자에게 공포심을 일으킨다. 한 밤중의 부엉이는 전혀 온순하지 않다. 또한 화자는 수천 송이 장미가 핀 들판에 서서 울긋불긋 화려하게 장미가 천지인 풍경을 감당하기 어려워 실신 지경에 이른다. 감정의 극대치까지 몰아세워졌기 때문이다. 장미는 한 송이 일 때와 달리 군(群)으로서는 화자를 쓰러뜨리는 공격성을 담지하고 있다.  

  

이 글에서 올리버는 자연이 우리를 치유한다는 값싼 대중적 감수성을 내세우지 않는다. 올리버의 시에서 자연은 자연 그대로 존재한다. 이 ‘자연 그대로 존재’한다는 말은 인간화된 자연과는 다른 뜻이다. 부엉이의 세계는 피비린내 나는 생존의 나날이다. 부엉이의 한 밤중 포식은 인간이 마주하고 싶지 않은 자연세계의 먹이사슬에서 벌어지는 약육강식을 상기시킨다. 시인이 겪는 공포는 부엉이의 잔인함 때문이 아니라 먹이사슬의 피라미드 꼭대기에 인간이 위치해 있다는 사실이 부엉이의 사냥에서 상기되기 때문이다. 앞 시에서도 마찬가지다. 기러기가 우는 소리는 거친 불협화음이다. 기러기의 원초적 꽥꽥거림이 알려주는 사실은 인간 내부의 동물성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연을 통해 인간이 치유된다는 세간의 믿음은 반쪽의 진실이 아닐 수 없다.


 장미처럼 화려하고 눈부신 꽃도 예외가 아니다. 자연의 아름다움이란 간혹 인간이 감당하기에 지나칠 때가 있다. 극대화된 자연의 미는 인간에게 공포심을 일으킨다. 이를 올리버는 “무시무시한 아름다움(terrible beauty)”라고 표현한다. 이는 철학적으로 ‘숭고’의 경험과 유사한데, 인간의 인식을 넘어서는 자연 대상을 마주할 때 우리가 느끼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과 그로 인한 고양 의식이 숭고라면, 올리버가 느끼는 공포심은 숭고의 경험 앞에 놓인 인간의 나약함에서 비롯된다. 올리버는 공포에 떠는 것에 멈추지 않고 나약한 인간 역시 그 형언할 수 없는 세계와 질서의 일부임을 알려준다.


 자연, 특히 동식물에 관한 올리버의 시는 언제나 근접 관찰과 세부적 묘사에 집중된다. 가령 「물뱀 Water Snake」이라는 시를 보자. 역시 어느 더운 여름날 시인은 물뱀이 연못에서 나와 다른 연못으로 이동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산책하던 걸음을 멈추고 물뱀이 지나가길 기다리는데  “그는 목을 꼿꼿이 세운 채/ 내 옆을 지나갔다.” 시적 화자에게 물뱀의 모양새는 마치 화자를 혐오스러워하는 것 같다. “내 긴 다리와/ 막대기처럼 보잘것없는 몸/ 내 손가락이 너무 많아”서 물뱀은 꾸물거리지도 않고 길 다른 편으로 긴 몸을 날려 민첩하게 끌어당기듯 지나가 버린다. 물뱀의 시선에서 보면 인간은 아름답지도 않고 거추장스러운 부분들이 많은 몸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뱀을 보면 끔찍해하는 인간들은 인간 중심적 시각에 편향되어 있는 셈이다. 물뱀이 풀숲을 헤치고 나아가는 모습은 “마치 재빨리 집어 들어 휙휙 내리치는 오래된 검”으로 묘사된다. ‘검’의 비유에는 자연의 폭력성이라는 주제가 물론 함축되어 있지만 그것 또한 인간의 공포심 탓일 뿐, 뱀의 재빠름을 묘사하는데 이처럼 적절한 비유는 없을 터이다.       


시적 관찰력과 명징한 비유는 동식물이 아닌 자연물을 다룬, 가령「폭포 The Waterfall」 같은 시에서도 잘 드러난다. 먼저 시인은 물이 떨어지는 장면을 여인의 하늘거리는 팔과 다리로 묘사한다. 하지만 곧 이어지는 행에서 폭포는 천둥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또 물이 떨어질 때 피어오르는 거품들은 하얀 눈으로 만든 리본이 되거나, 신의 흰 머리카락이 된다. 이런 일련의 비유들을 모아서 4연에 가면 쉼표도 솔기도 없이 천천히 떨어지는, “단순한 중량감(simple preponderance)”이라고 정리한다. 폭포의 묘사 전체는 이렇게 모순어법(oxymoron)으로 구성되어있다.  이 시의 후반부는 폭포가 중력에 의해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과학적 사실로부터 이 땅 위에 중력에서 자유로운 것이 없음을 환기시킨다. 시인은 이 대목에서 중력을 ‘소환(summons)’에 비유한다. 소환의 주체가 무엇인지 시에서는 알 길이 없으니, 곧 시인은 폭포라는 현상이 자신의 상상력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임을 고백한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짐짓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도 인간의 지력과 상상력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오히려 그 현상들이 매우 자연스럽기 때문에 더 설명하기 힘들지 모른다. 이런 자연에 대한 미지의 경험 앞에서 우리는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올리버는 이렇게 시를 끝맺는다. “아마도 /저 초록빛 깊은 곳/ 전혀 움직임이 없는 웅덩이에는/ 결국 뭔가 느슨하면서도 완벽하게 균형 잡힌/ 떨어지고 난 뒤 찾아오는/ 맹목적이면서 거친 평화.”


시는 의미심장하게도 “떨어짐(falling)”이라는 단어로 끝난다. 당연히 폭포의 물이 떨어지는 걸 의미하지만, 영어의 fall은 가을이라는 계절과 죽음도 암시한다. 또한 청교도 전통에서는 ‘타락,’ 즉 에덴에서의 추방을 의미한다. 영국 시인 존 밀턴의 『실낙원』에 의하면 사탄은 ‘타락한’ 천사, 즉 예전에 천사였는데 신의 권위에 도전해서 추방된 존재 아닌가. 이 다양한 문학적, 사상적, 그리고 의미론적 층위를 담고 있는 “떨어짐” 이후 도달하는 곳이 “맹목적이며 거친 평화”라면, 그것은 어떤 평화인가?


이 대목에서 시인이 죽음을 직접 다루는 시 한 편을 살펴보자.「죽음이 다가올 때」라는 시는 에밀리 디킨슨을 연상케 하는 의인법을 사용해서 죽음이 돈을 지불해서 시인을 사는 행위를 묘사하면서 시작된다. 시인은 죽음이 가을에 서성이는 배고픈 곰이며 홍역이고 “어깨 사이의 빙산”(우리의 좁은 두 어깨로 감당하기엔 너무도 큰 것이라는 의미)으로 묘사한다. 그리고 다음 생이 어떨지 생각해본다. 죽음을 다른 세상으로 나가는 문에 비유한 시인은 문 너머의 세상에 대해서도 호기심을 나타내지만, 시 마지막에 이르러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것이 끝날 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내 평생/ 나는 경이로움과 결혼한 신부요,/ 세상을 나의 품 안에 끌어안은 신랑이었다고./ 모든 것이 끝날 때 나는 / 내가 특별하고 리얼하게 살았는지 의문을 품고 싶진 않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공포에 떨거나/ 논쟁을 하고 싶진 않다./ 나는 그저 이 세상에 잠시 머물다 가는 것으로 내 생을 마감하고 싶진 않다”라고.   


그래서 이제 우린 이 주어진 인생을, 잠시 있다가 가는 일시적 체류가 아닌, ‘특별하고 리얼한 무엇’으로 만들기 위해서 다음 시에서 올리버가 무엇을 제안하는지 귀 기울여 보자.  

     

어느 날 당신은 비로소 알게 되었다.

당신이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

그리고 그 일을 시작했다.

주위의 목소리들이 계속해서

그릇된 충고를 외쳐댔지만

식구들이 불안해하고

지난 일들이 발목을 붙잡았지만

저마다 “내 인생을 책임져!” 아우성쳐도

당신은 멈추지 않았다.

당신이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 알고 있었다.

바람이 거센 손아귀로 당신을 쥐고 흔들어도

마음이 비참할 만큼 우울해졌어도.

시간이 이미 늦었고

황량한 밤, 길 위에는

부러진 나뭇가지와 돌들이 가득 깔렸지만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

그들의 목소리는 조금씩 잦아들었고

먹구름들 사이로

별들이 빛나기 시작할 무렵

새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을 하려고 다짐하며

당신이 살아야 할 유일한 삶을 구해내려 결심하면서

세상 속으로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늘 곁에서 함께 했던 그 목소리는

바로 당신의 것이었음을

당신은 서서히 깨닫고 있었다.

                   ---「여행 The Journey」 전문


이 시는 ‘멈추지 말고’ 우리가 하려는 일에 몰두하라고 한다. 그런데 앞서 멈추어서 잘 듣고 잘 보라고 한 제안과 상충하지 않는가? 우리는 우리 안의 목소리, 바로 우리 자신의 것에 다름 아닌 그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멈추지 말아야’한다. 왜냐하면 주변의 소음들이 너무 크고 들어주어야 할 의무를 강요하는 아우성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우리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멈추지 말아야’ 하는 것은 자연 속에 혼자, 고독하게 있을 때 멈추어서 귀 기울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두 가지 경우 모두 우리가 할 일은 귀 기울여 듣는 것이다.

   

올리버는 멈춤에 관한 이 역설적 제안을 큰 소리 내지 않고 우리에게 말을 걸 듯, 고요히 전달하고 있다. 올리버의 낮은 목소리는 그녀의 시가 달콤한 음악도, 섣부른 감정의 토로도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시켜 준다. 장식이나 운율을 맞추려는 억지를 부리지 않고 시의 리듬과 운율, 어휘의 강세와 자구가 대화를 하듯이 때로는 독백처럼 독자에게 말을 걸어온다. 일상적 말과 대화에도 음악이 있다. 언어의 음악성은 따로 존재하는 특별한 형식이 아니다. 독자에게 친숙하고 어디서 들어본 듯 한 리듬과 멜로디로 되어 있는 올리버의 시는 낭독할 때 더 그 진가가 나타나곤 한다. 그래서 시를 읽고 난 후 언어와 리듬이 오래도록 여운이 남아 입가에 맴도는 시, 외우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외우게 되는 시이다.


 올리버의 시에는 감상이 배제되어있다. 시의 서정성을 개인적 감정의 전시(展示)로만 착각하는 시인들이 많다. 18세기 신고전주의의 절제되고 이성적인 시 전통에 반발해서 서정시를 강조한 낭만주의의 대표시인 워즈워스가 시를 ‘감정의 자발적 분출’이라고 했을 때조차, 그 감정은 시인의 내면에서 걸러지고 정제되어 나온 어휘와 운율로 표현된 것이었다. 워즈워스에게 감정이 중요했던 것은 진솔함과 진정성 때문이었지, 무분별한 감상성이 아니다. 감성이 배제된 시적 정서는 어느 과학적 설명보다 틀림없고 명징한 직관적 관찰과 진실을 포착한다. 앞서 언급했던 「물뱀」과 「폭포」와 같은 시들이 그 예이다. 시가 시다울 때 감정과 정서가 과학적 명징성을 성취하게 된다는 것을 올리버의 시는 잘 보여주고 있다.  


 올리버의 시가 우리를 치유할 때는 통상적으로 받아들여 온 가치를 전혀 다른 시각으로 우리 앞에 제시하고 단순한 진실을 있는 그대로 말해줄 때이다. 자기 앞에 놓인 길만 보고 바삐 걷는 현대인에게 잠시 멈추어 눈을 들어 하늘을 보고 귀를 열어 새 울음소리를 듣고 숲과 들판으로 가서 미지의 것들과 만나라고 속삭이는 목소리는 다름 아닌 우리 내면, 연약한 동물의 언어이다. 절망을 말하는 우리의 목소리는 그녀의 시를 따라 낮고 고요하다. 우리는 통곡을 할 필요도 하소연을 할 필요도 없다.   


 시가 할 수 없는 일이 별로 없다는 말로 이 글을 시작했다. 마음을 만지는 따듯한 손길과 속삭임이 시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라고 말하며 이 글을 끝맺으려 한다. 시는 언어적 구성을 통해 세상에 다가가고 발언한다. 시가 언어를 사용하고 언어를 매개물로 삼아 진실을 구성해가지만, 시는 ‘말’ 저편을 향해있다고 한다. 말을 가지고 ‘말’의 이편이 아니라 ‘저편’으로 다가가려는 노력이 시라면, 그리고 그런 노력 중에 시가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거라면 시 덕분에 돈을 벌지 못해도 죽은 아이가 돌아오지 않아도 오늘 하루 버틸 고통의 양이 줄어들지 않아도 시가 ‘필요’할지 모른다. ‘말’이 되지 못한 수많은 좌절되고 어눌한 감정들이 시를 통해 우리에게 돌아오기 때문이다. 별 소용에 닿지 않지만 그래도 ‘필요한 것’으로서의 시가 우리를 멈춰 서게 한다. 시의 언어를 통한 비언어적 진실로의 모색이 우리 내면에 걸어오는 말에 귀 기울일 시간이다.     



 * 이 글은 문예지 <미주 시학>에 미국 시인 기획연재의 일부로 실렸으며 수록된 시의 번역은 필자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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