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배정웅의 디아스포라 서정
배정웅의 시를 읽으며 ‘아메리카’를 상상한다.
시인은 “아르헨티나산 볼펜”으로 “가난한 램프” 밑에서 그리움과 슬픔에 젖어 “마지막 전언”(「인력에 대하여」)을 남기고
“아마존 밀렵꾼”에게 얻은 호랑이 이빨(「호랑이 이빨」)을 조선의 할매가 은장도를 지니듯 갖고 다니라고 두 딸에게 준다.
부인과 사별한 뒤에는 잉카족 여인을 본뜬 목각 여인상을 사서 안방에 모셔두고 “꼬까 닢 내음”을 맡고, “야마의 울음”을 들으며(「목각 여인」), 여자의 체형을 꼭 닮았다는 “또보로치나무”를 쓰다듬는 볼리비아 남자를 떠올린다(「또보로치 그 나무」).
아르헨티나 국경 열차에선 딸아이 또래 행상 소녀의 손을 쥐어보고(「국경 간이역에서」),
멕시코의 데드 트레인을 탄 뒤 소식이 끊긴 친구 빈센트를 기억한다(「멕시코 국경 열차-데드 트레인」).
그리고 이 ‘아메리카’의 한 구석에 “쓸쓸히 빈방을 지키는” 초로의 사내(「쓸쓸히 빈방을 지키는 이에게」)가 “차마 죽지 못하는 목숨”(「작은 개 한 마리」)으로 살아가는 초상을 그려 넣는다.
그는 “시가 빵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사실로 알면서” (「박용래 시집」), 로스앤젤레스 자바시장의 외다리 비둘기를 바라보며 소리 없이 흐느끼는 미싱 노동을 하는 “아즈텍과 마야의 아가씨들”을(「자바시장의 비둘기」) 시로 만든다.
배정웅의 시가 보여주는 ‘아메리카’는 이렇게 친숙한 듯 하지만 낯선, ‘지금 이곳에 있는 저곳’을 가리킨다.
배 정웅의 시를 감상하려면 우리에게 익숙한 시 읽기와는 다른 종류의 접근법이 필요하다. 특히 시 곳곳에서 등장하는 남아메리카 대륙의 낯선 문화 형태와 언어 표기는 주석이 달린 채 한국과 미국의 낯익은 문화 이미지들과 만나 교접하고 분산되면서 매우 이질적인 (heterogeneity) 시적 경험을 낳고 있다. 여기서 ‘이질적’이라 함은 가령 한국어로 쓴 시를 대할 때 독자가 으레 불러낼 범주, ‘한국시’, ‘한국문학’, 그 외 한국문학이란 이름 밑으로 가지치기를 하는 분류들, 또 시인의 거주지나 이력을 따지면서 부칠 ‘재미동포’, ‘미주시인’ 등의 레이블에 꼭 맞추어지지 않는 어떤 것들이다.
여기서 나는 무엇이 한국문학이냐, 혹은 타국의 시민권자이면서 한국어로 창작을 하는 작가들이 한국문학에 속하는가라는 해묵은 논쟁거리를 다시 꺼낼 생각은 없다. 문학, 아니 그보다는 ‘문단’이라고 불리는 어떤 경계를 넘어서는, 혹은 흘러넘친다고 해야 할 것 같은 시의 ‘잉여’, 기존의 틀 안에 불러들이기 어려운 시의 ‘외부’가 배 정웅 시를 형성하고 있고 독자의 시 읽기는 그 외부의 언어, 잉여의 정서를 따라가는 다소 낯설지만 흥미로운 여정이 될 것임을 알려주고 싶다.
시인 황 동규는 한 대담에서 자신이 배 정웅 시인을 왜 모르고 있었는지 자문하면서 아마도 한국문단의 주류와 비주류, 어디에도 그가 속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라고 한다(『미주 시학』 통권 5호 (2010년)).
1970년대에 현대문학 추천을 완료해서 활동을 하다가 시인 자신이 말하듯 “느닷없이 한국을 떠나” 노매드적으로 떠돌며 살아온 그가 소위 ‘문단’의 분류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고 인식되지 않은 상황은 어찌 보면 당연한 듯 한편 그의 시가 갖는 고유성을 우회적으로 지시해준다.
황 동규는 배 정웅의 시를 “남미라는 외지의 삶과 직접 부딪친 것을 형상화”했고 “자신의 삶을 걸고 겨뤄서 얻은” 시라고 정의한다. 황 동규의 지적대로, 배 정웅의 시를 “여행 시나 풍물시”로 구분 짓거나, 미주 한인 문단의 군소 작가들 중 하나로 국한시킬 수 없는 이유이다.
부산 출생으로 1965년 베트남전에 참전한 배 정웅은 1968년 첫 시집 『사이공 서북방 15마일』을 낸 후『현대문학』에서 추천 완료로 ‘공식적인’ 시인이 된다. 이후 시인의 말에 의하면 “황금과 사랑의 자유 같은 것을 찾아서 열정만 가지고” 남미 행에 나서게 되고 그리스 신화의 사이렌에게 붙들린 것처럼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디아스포라로 ‘아메리카’를 떠돈다.
배 정웅은 40년 가까운 방랑생활의 끝에 “오래도록 떠돌다가” 남 캘리포니아의 ‘빈 방’에 남겨진 자화상을 그린다(「쓸쓸히 빈방을 지키는 이에게」). 이 시에서 실제 화자가 방에 있으므로 방이 비었다고 하는 것은 모순된다. 비어있지 않는데도 비어있다고 하는 이 역설에는 존재의 근원적 자기부정이 담겨있다. 배 정웅 시 곳곳에 묻어있는 서러움과 부끄러움, 고해 혹은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심정은 아무래도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남미 방랑의 경험은 그에게 두 권의 중요한 시집 『새들은 뻬루에서 울지 않았다』(1999)와 『반도네온이 한참 울었다』(2007)를 남긴다.
새들은 뻬루에서 울지 않았다.
살육의 도시 리마에서 울지 않았다.
우리처럼 보따리 싸들고
우리처럼 남부 여대로
안데스의 강추위를 건너고
따그나의 국경을 건너고
차라리 적막한 땅,
아라까에서 울음 울었다.
아끼끼 어분 공장위에서 울음 울었다.
한 해 내내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은 불모의 땅,
떠나온 뻬루와 뭐 다를 바 있으랴.
눈물 흘려보았자 사막의 땅 어디에 흔적이나 남으랴마는,
새들은 화약냄새 그득한
뻬루에서 울지 않았다, 안으로 삼켰던 울음
차라리 적막한 땅 바다위를 맴돌며
남몰래 남몰래 울음 울었다.
망명객처럼 까스떼자뇨로 울음 울었다.
--「새들은 뻬루에서 울지 않았다」 전문
이 시는 1999년 출간된 동명 시집의 표제작이다. 시인은 새들의 울음을 이민자 혹은 망명객의 통곡에 비유한다. ‘뻬루’는 구체적인 지시는 없지만 1960년대 현대사를 핏빛으로 물들인 역사적 현실의 장소이다. 새들은 단순한 자연의 생물이 아니라 뻬루의 참혹한 비극을 목격한 증인과 같다. 그 새들이 사건의 현장에선 울지 못하고 “안데스”와 “따그나”를 지나 적막한 땅 아라까, 아끼끼 불모의 땅에서 “까스떼자뇨” 스페인어로 운다. 모국에서 일어난 어떤 역사적 비극을 목도한 새들이 그곳에선 울 수 없어 타지로 와서 망명객처럼 목 놓아 운다는 내용의 이 시는 뻬루의 현실 역사를 비극적 서정과 새의 비유를 사용해 전달해 주고 있는데, 더 나아가 “우리처럼”이 반복되는 3,4행에서는 시가 드러내 놓고 다루는 현실 외에 다른 역사적 현실이 한 층위 더 있음을 암시한다.
여기서 ‘우리’란 누구인가. “우리처럼 보따리 싸들고/ 우리처럼 남부여대로” 새들이 산을 넘고 국경을 건넌다. 직유법을 사용한 “우리처럼”은 뻬루의 현실에 ‘우리’가 지칭하는 나와 너, 즉 시를 쓰는 시인과 독자가 익히 아는 현실, 기시감처럼 되살아난 또 다른 역사적 사건을 오버랩시킨다. 이 시가 한국어로 쓰였으니, 당연히 이 시를 쓰고 읽을 수 있는 ‘우리’는 암묵적으로 한국인이다. 새들이 “우리처럼” 짐을 싸서 모국을 떠났다면, ‘우리’도 새처럼 떠나온 셈이다. ‘우리’는 이 시의 새처럼 어떤 비극적 현실 (그 현실은 “화약 냄새”가 나는 것이다)을 목도하고 보따리 싸들고 그곳을 떠나 적막하고 불모의 땅, 타지로 가서 남몰래 망명객처럼, 그곳의 언어로 울 수밖에 없다. 한국 현대사 한 귀퉁이에 새겨진 귀양과 망명의 한 장면이다.
다음의 시에서도 ‘울음’은 주된 이미지를 제공한다.
레꼴레따 언덕에서 반도네온이 한참 울었다
그럴 때마다 남녀가 뱀처럼 서로 얽혔다
바이올린의 현이 따라 울었다
그럴 때마다 남녀는 벌에 쏘인 왕거미가
명아주에 몸 부비듯 했다
여느 강과 강의 그리운 물굽이 이리
서로 얽혀서는 안고 돌리고
눕히고 일으키고
다리 감고 돌고 펴고 이별하듯 유유히 등 돌리고
그렇게 다리 사이의 치열한 전쟁에도
섧고 서러운
이민 생활의 하루해는
두어자나 조히 남았다
--「반도네온이 한참 울었다- 탱고, 아르헨티나에서」 전문
2007년 출간된 시집『반도네온이 한참 울었다』의 표제작인 이 시의 화자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도심부 공원인 레꼴레타 언덕에서 탱고 댄서들을 바라본다. 1연과 2연에서 두 남녀가 반도네온의 음악에 맞추어 현란하게 몸을 부비고 서로 얽혀든다. 반도네온은 이 춤의 음악을 제공하는 아코디언 모양의 작은 악기이다. 시인은 춤이 진행되는 내내 반도네온이 “한참 울었다”고 한다. 그렇게 춤이 끝나고 난 뒤에도 그에겐 하루가 “두어자나 조히 남았다”. “한참”이라는 부사는 타국에서 보내는 하루가 이민자에게 길게 느껴지는 현실을 강조한다. 이런 현상은 단지 물리적 시간의 문제만은 아니다. 남녀가 얽히는 열정적 무대를 지켜보며 시인은 “섦고 서럽”다. 앞의 시에서 시인이 모국의 현실을 통곡했다면, 이 시에서 시인의 눈물은 이민자로서, 망명의 땅에 내버려진 처지에 대한 서러움을 표현한다.
도대체 탱고란 어떤 음악이기에 이렇게 서러움을 자아내는가. 아르헨티나 등지에 이주한 사람들이 즐기던 음악과 춤인 탱고는 쿠바의 아바네라와,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몬테비데오 태생의 칸돔베가 합쳐져 탄생했다. 하바네라는 쿠바 섬의 흑인 노예들이 연주하고 추던 것을 쿠바 음악가 크레오르가 재구성한 것이고, 칸돔베는 남녀 흑인이 거리에서 추던 음란한 춤이라고 한다. 탱고에는 남아메리카의 식민주의와 이주의 역사가 아로새겨져 있고 아메리카 대륙으로 반강제 징집된 흑인 노예들의 한이 깔려있다.
탱고는 유럽과 아프리카를 아우르는 이산(離散)의 역사가 남아메리카라는 특정한 장소에서 만들어낸 ‘이질성’을 특징으로 한 다문화의 한 축이다. 이 시에선 낯선 땅에 이식된, 동아시아에서 온 이방인 화자 특유의 ‘서러운’ 감정이 탱고에 담긴 인종박해와 식민 역사가 낳은 한(恨) 깊은 정서에 의해 증폭되고 있다.
남미에서 탱고를 보는 한국인이라는 형상은 관광객 이상 어떤 의미를 갖는가? 시인은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이 세 대륙의 이주와 노예무역의 얽힌 근대사를 탱고라는 문화적 행위에 담아내며, 그 역사에 묻혀 공식화되지 못한 아시안 디아스포라에게 목소리를 줌으로써 시적인 역사 다시 쓰기를 이뤄낸다. 이렇게 이 시는 단순히 이민자가 느끼는 ‘고향’에의 서러운 그리움을 표현하는 향수 문학의 범주를 훌쩍 넘어서고 있다.
이 두 시에서 이미 우리는 배정웅 시의 시적 특성을 찾아볼 수 있다. 언뜻 여행기나 풍물기로 여겨질 정도로 ‘에스노그라피적’ (ethnographical) 어휘와 소재들이 풍부하게 사용되며 시인의 주석을 통해 독자에게 ‘번역’되어 이해를 돕는다. 시인은 유칼립투스 나무는 ‘에우칼립또’, 바퀴벌레는 ‘쭈루삐’라는 스페인어로 표기한다거나(이런 예는 한 둘이 아니다), 반도네온 등 남미의 고유한 문화형태를 주된 소재로 삼고, 칠레, 아르헨티나, 페루 등지의 남아메리카 도시들이 수시로 등장한다. 이 시들을 읽어가다 보면 미합중국의 경계를 넘어서는 ‘아메리카’의 형체가 나스카 사막에 그려진 큰 새처럼 떠오른다.
하지만 남미의 문화와 역사, 언어를 담는 에스노그라피는 언제나 시인의 디아스포라적 감성, 즉 떠나온 땅에 대한 그리움, 향수와 민속설화라는 여과지를 통해 재구성된다. 이런 ‘문화적 혼종성’(cultural hybridity)은 배 정웅 시만이 담고 있는 특유의 정서에 토대가 되며, 독자가 그의 시들을 읽으며 상상하는 어떤 다른 ‘아메리카 시’의 물질적 재료를 제공한다. 한국어로 모국에 대한 절절한 향수를 천편일률적으로 노래하는 흔한 ‘동포시’와 달리 남미 등지의 문물과 자연환경을 전경에 두고 한국적 정서와 문화로 그 의미를 견인해내는 시는 우리가 당연시하던 시적 분류법을 근본적으로 재고하기를 요구하면서, 진정 ‘시’가 무엇인지 다시 묻는다.
가령「마두금 소고」라는 시를 보자. 마두금이란 악기는 몽골 사막에 사는 사람들이 낙타나 말의 뼈로 만든 피리이다. 그 악기를 연주하면 낙타도 눈물을 흘린다는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는 낙타 새끼가 어미를 찾는 소리와 같다는 실제적 사실에서 비롯되며, 이 시 전체의 향수의 정조를 불러일으킨다. 그리하여 마지막에 시인은 마두금의 뼈 울음소리처럼 숨이 끊어져 넘어가듯 목 놓아 울면서 모성의 그리움을 표현하고 싶어 한다. 마두금을 만든 뼈는 새끼 낙타의 어미가 아니라면 어디서 왔겠는가?
나아가 그의 시는 마두금 소리처럼 “생의 목울대 깊이 쌓인 슬픔 퍼내어/ 사막의 마른 알갱이 단 몇이라도 적시어/ 춤추게 하였으면”이라고 불가능한 소망을 드러낸다. 이 시에서 우리는 몽골 사막의 유목민과 낙타까지 포함한 인류 전체의 고향 상실성을 시적 절창에의 희구를 듣는다. 그런 희구를 담은 소리는 숨이 끊어질 것 같은, 즉 목숨을 걸고 몸을 부수어가며 내는 어떤 동물적 울음 같은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런 인간적 차원을 넘어서는 물리적 소리는 시로 표현 불가능하다. 시인은 이미 그것의 불가능성을 인지하면서도 시인이기 때문에 시와 결별해야 “자신의 불행이 끝날” 것을 알면서도 차마 헤어지지 못해 더 깊어진 고뇌로 불면의 밤을 보내며(「시인에게」) “시를 쓰는 한 인간의 눈물을 엿보려고/전인미답의 모래 위에 발자국 찍으며/ 낯선 낙타들도 여럿 달려”(「마두금 소고」) 올 때까지 시를 쓸 수밖에 없다.
「시인에게」를 필두로 시에 대한 메타적 사유가 담긴 시들에서 배 정웅 시인의 시론을 엿볼 수 있다. 우선 그는 문명의 오염된 불빛에서 “쓰였거나 쓰일 시는 다 가짜”라고 선언하며 오직 사랑하는 이의 순수한 눈빛 아래서만 두어 줄의 시를 쓰기를 소망한다(「H에게」).
여기서 그의 시가 어떤 순수성을 지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옥타비오 파스는『활과 리라』에서 구원이며 혁명이고 해방이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시는 결국 그 뒤엔 아무것도 없는 가면이라고 한다.
“시는 공(空)을 향한 기원이며 무(無)의 대화이다”.
파스를 인용한 한 시에서 배 정웅은 70년대 말 시인의 풍경을 그리면서 “술집 바람벽마다 ‘무의 가면’이 그려졌다”라고 쓴다(「무의 가면이 그려졌다」). 이 시에서 떠나온 시대의 문학풍경을 배경으로 그의 시를 이끄는 영감이라고도 할 수 있는 ‘바람’과 그 위에 쓴 시라는 이미지에서 방랑, 혹은 어디에도 정박하지 않는 노매드적 삶의 방식이 시의 물질적 토대일 뿐 아니라 그의 시가 지향하는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특히 시인 천 상병과 김 종삼의 “비정상적인 걸음걸이”에서 시란 꼿꼿이 서서 당당히 걸어가는 것과는 달리 “세상을 절룩”거리며 가는 것이라는 시인의 인식도 드러난다. 그래서 배 정웅 시인은 그의 시에 토양을 제공하는 ‘아메리카’를 절룩거리면서 사과 속에 든 벌레처럼 열차의 몸속을 파고드는 벌레가 되어 울기도 하도(「사과 벌레」) 안데스 산간마을에선 나무에 목을 맨 귀신이 눈에 보이고(「안데스 산간마을의 봄」) ‘텅 빈’ 방에서 “남에게 보이지 않는/ 투명한 눈물의 방울들을/ 은밀히 간직한 채 살고”있다.
“태평양 너머 누구던가/나처럼 쓸쓸히 빈방을 지키는 이에게/어떤 상징이나 은유도 없는/그런 편지를 쓰고 있다” (「쓸쓸히 빈 방을 지키는 이에게」)는 대목에 이르면 자신의 방랑의 궤적을 따라가면서 이 곳의 ‘아메리카’를 재상상하는 그의 시가 태평양너머의 누군가 쓸쓸한 이에게 아무런 비유를 담지 않은 담백하고 순수한 편지쓰기라는 것이 밝혀진다.
그의 시적 과제, 즉 떠나온 땅의 쓸쓸한 이에게 보내는 편지는「남미통신」연작과 「신 남미통신」 연작으로 이어지는 시들로 형상화된다. 시인은 삐이라강가에서 “에스빠뇰어”로 울고 있는 개구리 소리에 어린 시절에 들었던 개구리 소리와 젊은 시절 베트남 참전 당시 들었던 개구리 소리를 떠올리는데, 현재 듣고 있는 스페인어로 된 개구리 소리는 시인에겐 “잘 모르는” 말이다(「남미 통신 1」).
이 통역 불가능한 이방의 말은 “내 자슥아” 하고 부르는 어머니의 사투리(「남미 통신 4」)와 혼종 되어, 남미에 와서 처음엔 그저 일제 재봉틀 소리와 남녀가 안고 도는 탱고 선율만 들리던 것이 차차 끌려간 아들을 내놓으라는 아르헨티나 어머니들의 울부짖음을 마침내 들을 수 있게 된 시인이 이국 모성의 통곡을 자신을 떠나보낸 어머니의 조선 치마 앞자락 눈물 자국으로(「남미 통신 11」) 번역해 내기에 이른다.
시인은 계속해서 땀 뻘뻘 흘리는 크리스마스(「남미 통신 15」), 볼리비아의 카니발(「남미 통신 47」), 식모살이 갔다 주인에게 겁탈당한 14살 소녀의 아버지가 술에 취해 길에 누워 통곡하는 장면(「남미 통신 26」), 잘 먹지 못해도 무럭무럭 자라는 볼리비아 인디 오족 소년들(「남미 통신 62」)을 편지지에 태워 태평양 너머로 띄운다.
또 이런 편지는 어떤가?
“지 에미가/ 문둥이 인 줄도 무심코 잊은 대 여섯 살/ 머슴 아이 하나 작은 남근을 만지작거리며/ 천방지축으로 뛰놀고 있었다. 천상의 그지없이/ 성스러운 햇빛 한 조각 빤짝빤짝/ 뛰놀고 있었다”(「신 남미통신 2- 서양문둥이」).
이 시의 부제가 “서양문둥이”이다. 시인이 난생처음 본 서양문둥이가 컬러사진에 “해수스 밴디가”, 스페인어로 축복을 뜻하는 말을 적어 걸고 있을 때 그 옆에는 발가벗은 아이가 ‘천사’로 화한다. 그뿐인가. 원주민에서 산 산돼지 쓸개를 되팔아 딸의 신발을 사는 시인은 부끄러움과 상처 입은 마음을 어쩌지 못한다(「신 남미통신 3」).
멕시코에서 “전생의 누부”를 만나 그녀의 아이들이 시인을 매부, 아재로 부르는 촌수 헷갈리는 촌극이 벌어지고(「신 남미통신 4」) 칠레의 이끼께항에선 방뇨를 하고(「신 남미통신 10」) 남극의 변경지방에선 독주를 마시고 한국산 전기장판에 눕는다(「신 남미통신 9」).
이 일련의 남미 통신 말미는 어머니, 모국, 모국어에 대한 갈망과 회귀본능으로 귀결된다. “걸어왔던 첩첩 외로운 길”이 아니라 “죽어서라도 되돌아가야 하는/ 그 멀고먼 험한 여정에 대한 은밀한 전언”을 “잉카잔도의 험한 길을 거쳐” 온 페루산 큰 게를 삶다가 사색하는(「페루 산 큰 게」) 시인은 “마중물”이 되고자 한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펌프질을 할 때 마중물을 붓곤 했다. 그것을 시인은
“펌프의 자궁 속”에 들이붓는다고 묘사하고, 어머니의 사투리 어투를 통해서 “미물일망정/ 이렇듯 내가 먼저 저를 부르고 저를 반길 양이면/ 저 보이지 않는 땅 밑 지심 아득한 곳에서부터/ 찰랑찰랑 몸 흔들고 춤추듯 쏟아진다” 고 적는다(「마중물」)
‘내가 먼저 부르는’ 마중물이 되었던 적이 있냐고 스스로에게 반문할 때 시인은 마중물이 되고자 하는 소망이요 의지를 내비친다.
무엇을 ‘마중’할 것인가. 세상 모든 만물이 되겠지만, 특히 ‘고향’ 즉 모태, 기원이요 “저 보이지 않는 땅 밑 지심 아득한 곳”에 있는 것이다. ‘뻬루’에서 울지 못한 ‘망명’ 시인의 경우엔 특히 모국어 일 터이다.
“꼬까울새”, “몸점박이 비둘기”, “검은 바람 까마귀”, “검은 이마 직박구리” “장다리물떼새”의 한국 이름을 불러주는 시「황홀한 모국어」는 시인이 부은 마중물에 “찰랑찰랑” 춤추며 등장하는 새 이름의 향연이다.
여기서도 배 정웅은 흔히 순한국말에 대한 칭송과 자랑을 반복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시나 쓰는 바보”로 칭하고 시를 쓰겠다고 안데스 산간마을에서 “들개처럼” 산 이력을 부끄러워한다. 이런 양심적 수치심은 이 새들의 순 한국 이름이 다른 곳에서는 다른 이름으로 불릴 수 도 있으리라는 문화적 다양성의 통찰력과 공존함으로써 모국어의 황홀함을 강하게 부각한다.
이 시에서 황홀감은 어떤 고양된 것, 즉 순수 우리말이 주는 강한 매력에서 시작되고 새를 ‘호명하는’ 언어의 다양성에 대한 통찰력으로부터 새의 회귀본능이 우리말의 사투리에 담긴 “아득함”때문이라는 시적 감성을 뽑아낸다.
배정웅 시의 ‘아메리카’는 이주와 이산의 물결이 쉼 없이 흐르면서 계속 진화해가는 곳이다. 배 정웅은 이민자 혹은 망명자의 서러움과 그리움을 그가 디디고 서있는 땅의 경험과 모국의 문화적 기억을 결합해서 새로운 시적 감성으로 표현하고 있다.
「에우칼립또의 춤」에서 다시 만나는 탱고의 비유는 유칼립투스나무가 흔들리는 모습을 묘사하는데 사용된다. “하체는 거의 고정시킨 채 용이 될려다 만 이무기처럼/ 천의무봉의 상체로만/ 기의하게 흔들며 추는 춤의 달인”이라는 시행에서 미완의 꿈을 안고 사는 이무기가 등장한다. 왜 나무가 이무기와 같은가? 뿌리를 한 곳에 고정하고 상체만 흔들면서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꾸기 때문이다. 이민, 혹은 이주를 ‘뿌리 뽑힘’으로 표현하는 통상적 비유를 떠올려보라. 인용된 위 시행에서 나무의 하체는 “거의” 고정되어있다. 즉 언제든지 뿌리 뽑힐 가능성이 있다. 멈추어있는 것들도 방랑의, 유목의, 혹은 다른 세상으로의 꿈을 간직할 수 있다.
완전히 고정된 것은 없다. 나무들처럼 “이 세상의 목숨 있는 것들”은 모두 한 곳에 “거의” 고정된 상태로 살아가다가 계기만 있다면 언제든 뿌리 뽑힐 준비가 되어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디아스포라의 주제는 마지막 행의 “춤바람”이란 한국적 표현으로 마무리된다.
또 다른 시「베니강에서」에서도 인디오들이 구렁이를 잡았는데 배를 갈라보니 어린 소녀가 들어있었다는 전설 같은 삽화를 전하면서 시인은 한국의 단군 설화를 차용해서 현재의 상태를 탈피 혹은 환골탈태하고 싶은, “이 세상 목숨 있는 것들의/ 未完의 꿈”(16-17행)을 상상한다. 시인은 꿈꾸기의 불가피성과 미완성은 어쩌면 인간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익숙한 저 ‘아메리칸드림’조차 이 본질에서 그리 멀지 않다.
지금도 계속되는 밀려드는 이민자들의 아메리카를 향한 꿈 꾸기에 각인된 역설적 현실은「자바시장의 비둘기」라는 시에서 생생하게 그려진다. 이 시는 외다리 비둘기를 바라보는 노동으로 지친 미싱사들의 모습을 통해 미국의 다른’ 얼굴을 포착해서 ‘진짜’를 보여준다. 콜럼버스 항해와 우연한 발견의 역사, 인디언과 인디오에 대한 착취와 불법이민을 양산하는 자본주의 노동력시장의 아이러니가 자바시장의 외다리 비둘기의 상징에 각인된다. 미국 자본주의의 중심인 엘에이에서 마주친 ‘아메리카’의 민낯은 하나의 실체가 아니라 복수(複數)의 이질적 정체성들로 가득한 현실이며 미완의 꿈을 꾸는 사람들이 이방(異邦)에서 ‘방 한 칸’을 얻기 위해 “이민생활의 하루해”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생생한 삶의 현장이다.
배 정웅의 시는 낯설지만 생동감 있고 문화적으로 소화력이 강하며 모국어를 향한 절절한 그리움과 동시에 이질적 언어성에 대한 민감한 이해를 바탕으로 구성된 이 ‘시적 아메리카’를 만들어낸다. 이곳은 누군가의 손이 그 속의 “자궁을 열어/ 대담하게 언어의 처녀막을 건드”려서, 수록된 시편들에 돋아난 “불행의 가시에/몸과 마음이 내내 찔려서/ 낭자한 피 같은 밑줄의 흔적”(「시인에게」)을 남기기를 기다리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감히 가보았다고 장담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이다.
* 이 글은 시인의 2016년 시집 해설로 부친 것이다. 시인 배정웅은 2017년 작고했고, 그가 남긴 시집은 총 3편이다: <새들은 뻬루에서 울지 않았다>(1999), <반도네온은 한참 울었다>(2007), <국경 간이역에서>(2016).
이 시평 외에도 나는 그의 시에 대한 짧은 시평과 시 세계 전체를 다룬 본격 시평론을 문예지 두 곳에 각각 싣기도 했다. 한때 아메리카,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미국'이라는 단일 국가가 아니라 대륙으로서의 '아메리카'를 떠돈, 진정한 의미의 디아스포라 시인인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많지 않다. 내가 시인을 알게 되고, 시인과 평자로서 만나 교류하던 시기는 짧았지만, 그의 시를 적극적으로 읽어주고 분석하고 한국의 디아스포라 문학사에 위치시키려고 노력해온 입장에서 이 공간에서 그를 더 많은 독자에게 알리고 그의 시가 널리 읽히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 몇 편을 첨가한다.
시인은 오직 시로서 기억되고 또 그래야 한다면, 그의 시는 바로 우리의 기억에 값할 것이다.
내 어릴적 어디서든 개구리가 울었다
마을 풀섶에서, 논둑에서 낭랑한 언어로
울음 울었다. 내가 혈기 방장해지자
베트남에서 빠빠이야 열매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로 개구리가 우는 것을 들었다
사람들이 저승에 가는 날은 더욱 섧게
우는 것을 보았다. 세월이 흘러서
까맣게 잊은 그 개구리 울음소리를
이즈음은 삐라이 강가에서 듣고 있다.
바람이 불면 우기(雨期)라도 예감하는지,
어드메 나무열매가 떨어져 그들의 곤한
잠과 생애를 깨우는지, 개구리가 더욱
자지러지게 울고 있다. 나도 잘 모르는
에스파놀어로 울고 있다.
-- 「남미통신 1- 볼리비아에서」 전문
칠레 북단 이끼께 항에서 문득 방뇨를 하다. 서양 똥개 한 마리 저만치서 쭈삣쭈삣 나를 넘보고 있다.
개새끼야 개새끼야. 일찍이 고향에서도 소리꾼이 되지 못한 내 목소리는 아열대의 이 자잘한 바다
파도소리 조차 넘어서지 못한다. 바다 귀신 망상에 들씌어졌거나 남쪽나라 춤추는 물결빛깔 그지없이
현란한 탓이려니. 개 눈에는 내가 사람 형상으로 보이지 않고 그저 처량하게 세상을 떠도는 수컷으로만
비치는 모양이다. 허기사 내가 인두겁을 쓴 사람이더냐 인두겁을 쓴 수컷이었더냐
--- 「남미통신 10- 참회록에서」
*시인이 가장 좋아하던 시로 알려져있다
나는 아직도 귀가할 수 없다.
대전차 장애물로 지은 한반도의 아파트를 뒤에 두고서, 총구를 거꾸
로 잡은 일단의 군인들을 뒤에 두고서, ......
이렇듯 아득히 뒤에 두고 멀어지기만 해서 나는 귀가할 수가 없다.
돌아가도 다시 집 지을 수 없다, 집 지을 수 없다.
-- 「남미통신 31 - ‘96서울에서」중에서
나는 사랑의 자유를 찾아 잉카의 나라로 건너왔다. 잉카의 나라는 마추피추보다 일리마니
보다 너무 높아서 높아서, 감히 오를 수가 없었다. 쳐다 볼 수도 없었다. 그러다보니 내 사랑
의 자유도 너무 높아서 오르가즘에, 오르가즘에 오를 수가 없었다.
-- 「남미통신 36- 내 사랑에 대하여」, 전문
로스앤젤레스 소재 자바시장에는
수시로 빠알간 외다리 비둘기들이 모여서 운다
봉제공들이 먹다 버린 음식 찌꺼기를
부리로 쪼면서도 구구르르 눈물 흘리며 운다
공업용 날카로운 나일론실에
진분홍 다리 한 쪽 야전 병사처럼 싹뚝 잘려나간
아픔과 공포로 운다
그 모양을 창너머로 물끄러미 건너다 보는
눈이 시원해서 더욱 슬픈 아즈텍과 마야의 아가씨들
미싱 노동으로 무거워진 다리 절뚝이며
주인 몰래 비둘기 울음보다 더 나즉이 흐느낀다
독수리 나래들 단 비행기 한 대
비둘기 떼 위에 떠서
멕시코만 쪽으로 궤적을 긋고 있다
--- 「자바시장의 비둘기」전문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창틈으로 빼꿈히 건너다 보이는
에우깔립또 한 그루
바람이 불 적마다
아, 저건 살사춤이다
저건 메렝게 아니 꿈비아
저건 저건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능수능란하게 추는 탱고다
하체는 거의 고정시킨 채 용이 될려다 만 이무기처럼
천의무봉의 상체로만
기이하게 흔들며 추는 춤의 달인
이윽고 어둠이 몰려오면
그 어둠의 손수건 자락으로
대낮에 흘린 땀을 닦으며
내일 또 다시 불어올 만만개 바람의 손을 잡아
껴안고 추스르고 어우러지고 보듬어
어떤 형식의 춤을 한바탕 추어 볼 것인가
그 리허설을 준비하느라 어떤 날은
어쩌다 관객이 된 한 생애 고요와 몽환의 깊은 잠 속
나까지 흔들어 깨우고
나까지 아닌 밤중에 춤바람 나게 하느니
-- 「에우깔립또의 춤」전문
멕시코에 가면 어떤 기차가 있다네
데드 트레인이라 부르는
은밀히 아주 은밀히 미국국경을 넘으려는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이 기차난간이건 지붕이건
가리지 않고 잠시 둥지를 틀긴 틀지만
차마 어쩌지 못하는 생의 졸음으로 한 해의 낙과처럼 떨어지기도 하고
사흘 밤 나흘 낮을 애리조나 사막을 넘다가
혹독한 더위에 목타서 쓰러지고 밤 추위에도 금방 쓰러진다네
(중략)
국경병원의 영안실에는 그렇게 죽어서도
두고 온 고향과 가족의 꿈을 끊지 못하고
차마 눈 감지 못하는 주검들이 누워있다네
내가 아는 볼리비아노 갓 스무살의 빈센트도
두어 해 전 그 기차를 타고 떠났다는데
그가 어디에 어떻게 안착은 했는지
아무도 아무도 아는 이가 없다네
그의 어머니 로사여사는 지금도 저자바닥에서 사람들을 붙들고
내 아들 못 보았느냐고 내 아들 못 보았느냐고
입안 누런 틀니를 오무작거리며 실성한 듯 묻고 다닌다네
-- 「멕시코 국경열차- 데드트레인」 중에서
아르헨티나 국경으로 가는 협궤열차가
정말 노새의 마음(*)을 먹은 것 같다.
서다가 가다가 서다가 가다가
조랑말이랑 망아지랑 들개 떼가 철로를 막아서면
체게바라 모자를 삐뚜룸히 쓴 늙은 차장이 나서서
워이워이 쫓고
이름모를 간이역에선 잡상인들이
마적 떼처럼 핏빛 화톷불을 피워놓았다
시든 패랭이꽃을 머리에 꽂고 귀고리가 별처럼 흔들리는
눈 큰 행상소녀 하나가 차창틈으로 순을 디밀고
한사코 조른다
이름이 실비나라고 했다
그때는 내 머릿속에 이름이 똑같은 집에 두고 온 어린 딸아이가
아련아련 생각이 나서
행상 소녀의 때절은 손을 슬며시 쥐어 보았다
마른 꼬까닢(**)이 내 손안에서 퍼석거렸다
사람의 온기라고는 한 점 없었다
*백석의 시<광원>에서 차용
**코카이나의 원료인 나뭇잎
-- 「국경간이역에서」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