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 은 Apr 03. 2019

 질문과 응시로서의 시 쓰기

시론 & 윤동주

 시를 쓴다는 것은 물론 시인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갖겠지만 그중에서도 하나를 꼽자면 ‘자아 찾기’이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현대정신분석의 핵심 이론가인 라깡은 주체, 즉 한 개인의 삶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라고 했다. 일견 난해하게 보이는 라깡의 이론은 사실상 이 단순한 듯 하지만 심오한 삶의 진리에 관한 것이다. 한 인간의 일생은 ‘나’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다.


‘나’는 어떤 실체나 본질이 아니라 질문으로 던져진 것이다. 인간 생명체로 태어난 존재는 이 ‘나’라는 질문을 받고 그 답을 찾으면서 나의 ‘의미’를 채워가야 한다. 그런데 이 답을 모색하는 과정은 필경 실패하기 마련이다. 무엇보다 한 개인, 즉 주체라고 불리는 이 ‘나’는 처음부터 실패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주체란 개념은 영어권의 용어를 떠올려야 이해하기 쉽다. 주체는 곧 주어(subject)이다. 문장을 이끄는 단일 명사로서 언어적 구조 안에서만 작동하는 존재이다.]


 정신분석이론의 핵심은 바로 이 주체의 실패, ‘나’를 구성한 실패이다. 왜 그런가? 나는 태어날 때부터 ‘나’가 아니다. 나는 ‘나’로 되어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건이다. 핏덩어리로 태어나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첫울음을 운 뒤 젖을 찾고 기본적 욕구를 채우는 유아는 성장하면서 의식이 생기고 동시에 무의식을 구성하게 된다.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뉘는 인간 심리는 프로이트가 발견했다. 여기에 라깡은 ‘분열된 주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주체의 ‘분리’라고도 표현되는 이 주체 개념은 유아가 주체가 되는 과정, 즉 인간종의 생명체가 ‘나’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생기는 틈, 그 균열과 결핍을 의미한다. 분열된 주체는 라깡이 이론화했지만 무의식이라는 프로이트의 세기적 발견에서 비롯되었다.


개인의 삶이 애초부터 실패에서 출발하므로 질문으로 던져진 ‘나’라는 것의 의미를 찾아 나서는 인생 여정은 처음부터 실패를 담보한 길 떠나기가 된다. 다시 라깡의 말을 빌면 이 애초부터 실패한 ‘나’가 실패의 여정에서 남긴 흔적이 곧 주체가 되므로, 결국 나의 ‘성공’은 바로 나라는 질문을 받아들여 실패를 마주하는 것 그 자체에 있다. 내가 실패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 삶이며, 그런 인식에 도달하는 것 자체가 주체로서의 성공이다.


  여기서 말하는 성공과 실패가 무슨 의미인지 좀 더 꼼꼼히 짚어봐야 한다. ‘시적 실패’, 혹은 시가 감당하는 실패는 주체의 분열과 나라는 질문에 대한 답 찾기의 여정에 노정된 실패로서, 사회적인 성공과 실패의 서사와는 전혀 다르다. 흔히 언급되는 성공과 실패는 지위와 명예, 물질적 부와 관련되어있다. 혹은 단일한 목적을 취했는가의 여부에 좌우되는 결과 중심적 시각에 따른다. 하지만 라깡이론에 기대어 이 글에서 피력하는 실패에 대한 시의 독백과 기록은 일상적 삶의 표면을 뚫고 저 심연 속 존재의 근원을 향한 것이다.


물론 이 존재의 근원은 통상적으로 알려진 형이상학적 철학이나 종교적 의미가 아니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존재의 근원이란 매우 물질적인 현상, 즉 생명의 탄생과 성장에 깊이 연루된 인간 (무)의식적 차원에 놓여있다. 그리고 이 근원적 인식 차원에서 주체, 즉 우리 개개인은 이미 실패한 존재이다.


라깡의 주체 이론에 따르면 주체는 거울상을 통해 만들어진다. 거울상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을 이렇게 바꿔보자. 나는 내가 나라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는가? 흔히 내 얼굴보다는 타인의 얼굴을 더 자주 보고 더 잘 안다고 한다. 신체구조상 나는 내 얼굴을 직접 볼 수 없다. 내가 내 얼굴을 보는 것은 거울상을 통해서이다. 즉 거울이나 유리처럼 반사 표면에서 반영되어 내 시야로 들어오는 이미지가 ‘나’인 것이다. 말하자면 거울상을 보기 이전에 나는 내 모습이 어떤지 모른다. 나는 나라는 인식이 없다.


라깡은 유아가 처음으로 이 거울상을 보는 것은 엄마의 눈동자라고 한다. 수유를 할 때 엄마는 아이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속삭이고 어르며 눈길을 건네기 마련이다. 이 거울상이라는 자아 이미지, 실은 진짜 내 얼굴이 아닌 반사 이미지에 불과한 오인된 이미지를 통해서 나라는 인식이 생겨난다. ‘나는 나’라는 인식은 따라서 단일한 실체가 아니라 나와 거울상으로서의 이미지인 나 사이가 합쳐지는, 즉 자기 동일화(self-identification)를 이루면서 생겨난다.


결과적으로 ‘나’는 두 개의 상이 만든 관념이 된다. 그러므로 내게 이 거울상, ‘나의 타자’가 존재하게 된다. 내 안에는 타자로 대상화된 내가 이미지화되어있다. 혹자는 그 거울상은 가짜이고 온전한 몸을 갖고 여기 있는 내가 진짜라고 가르기도 하지만, 주체 개념의 역설은 나라고 오인된 그 이미지, 가짜인 내 관념이 다름 아닌 바로 내가 알고 있고 인식하며 혹은 내가 알 수 있는 가능성의 그 모든 자아라는 사실이다.


  주체를 구성하는 이 이원적 ‘나’에서 진짜와 가짜를 나눌 수는 없다. 나는 이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이지만 둘이고, 뫼비우스 띠처럼 이쪽과 저쪽이 나뉘어있는 듯이 보이지만 하나로 연결된 존재인 것이다. 나는 나이면서 동시에 타자이며, 따라서 ‘남’이라고 여긴 타자는 결국 내 안의 타자인 셈이다. 이 ‘나’이면서 ‘타자’인 나를 라깡은 분리 혹은 분열된 주체라고 부른다. 이런 주체 개념에서 생각해보면, 내가 나 자신에게 조차 낯설어지는 경험과, 반대로 처음 만난 타인에게서 낯익고 친숙한 느낌을 받는 이상한 경험을 설명하기란 어렵지 않다. 반쪽 찾기란 나와 별개의 개체로서 타자를 찾는 것이기보다는 내가 무의식 속에 묻어둔 나의 거울상, 내가 나라고 오인한 그 타자를 찾는 과정이다. 자아는 환상이고 현실 속 인간 존재는 금이 가고 분열된 주체로 살아간다. 죽음을 맞이할 순간까지 인간은 모두 환상적 자아, 분열된 주체로 산다.


  상상계를 거쳐 거울상을 내면에 장착한 자아는 상징적 이상, 즉 초자아를 구성해서 주체로 만들어지고 그게 궁극적으로 우리가 얻게 되는 ‘나’라는 결과물이다. 주체의 분열과 분리, 또는 소외, 그리고 틈으로서의 주체 개념에 담긴 핵심적 진실이다. 나는 그저 거울상에 비친 완벽하고 멋진 그 이미지가 아니다. 또 그것을 바라보는 어떤 본래적 ‘나’라는 것만이 내가 아니다. 이미 거울을 바라보는 순간 나는 그 거울과 하나가 되고, 그때부터 주체는 탄생하게 된다. 그러므로 분열된 주체를 회복한다는 노력은 환상에 불과하다.


시를 쓰는 것이 ‘자아 찾기’라는 명제는 분열된 주체 이전의 근원적 나를 찾으려는 노력을 담고 있지만 라깡이론에서는 근원적 ‘나’라는 것은 없다. 또는 그런 ‘나’에 집착하는 것은 거울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유아론적 태도일 뿐이다.


그럼 시 쓰기의 궁극적 목표는 무엇인가. 시를 쓰는 것이 ‘자아 찾기’라면 나를 찾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자아 추구는 추구의 ‘과정’으로서 의미가 있다. 그 끝에는 그저 텅 빈 공허와 죽음의 심연이 있을 뿐인 이 덧없는 인생에서 시 쓰기는 ‘자아 찾기’라는 환상적 행위를 실천함으로써 분열된 주체의 덧없는 행위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한다. 분열된 주체 안에 담긴 거울상의 이미지, 내가 나라고 믿거나 나였으면 하고 생각하는 그 이미지를 주체는 부모의 눈과 몸짓과 표현에서 찾기 시작해서 성장해서는 사회 속에서, 사랑하는 대상에게서, 친구에게서, 즉 그 모든 타인들 속에서 찾는 것인데, 이미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고 있었으므로 실패는 이미 노정되어있고, 덧없음은 매 걸음마다 쓸쓸한 바람으로 불어오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유아론적이거나 정신병적으로 근원적 나, 혹은 내가 두고 온 저 반쪽의 나에게 집착하는 상상계적 자아로의 매몰 대신 시적 추구는 자아 추구의 고차원적인 승화의 한 방식이 된다.


한번 시를 쓰기 시작하는 사람은 평생 시를 쓴다는 말이 있다. 한 번도 시를 읽지 않았거나 시를 써보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시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한 번이라도 시를 읽은 사람은 계속 시를 읽게 되고 나아가 단 한 번이라도 시를 써본 사람이라면 시 쓰기를 중단할 수 없다. 만일 시를 읽고도 중단하거나 한 편의 시를 써보고도 계속 쓰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시와는 무관한 문제이다.


분열된 주체가 시를 쓰는 것은 주체 구성에 본질적인 분열, 틈새를 메우려는 치유의 행위이다. 모든 치유가 그렇듯이 시를 쓰는 것은 치료가 아니고 해결책도 아니다. 시는 봉합의 방책이 아니다. 시는 어떤 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시 쓰기를 통해, 주체의 분열을 메우려는 행위 자체를 통해 생의 순간을 치유받게 된다. 즉 시를 쓰는 과정 자체가 치유이다. 따라서 시인은 인간 존재의 분열된 주체라는 운명을 나타나는 징후가 된다. 그런 시인이 쓰는 시는 징후적 몸짓에서 나온 덧없는 치유의 갈망을 담게 된다.


  이로써 시는 분열된 주체의 징후인 시인이 나의 의미를 찾는 과정으로서의 삶이 매번 시도하면서도 늘 실패하는 것을 기록하고 고백하며 내적으로 응시하는 행위이다. 시는 기록이고 고백이며 응시 자체이다.


 하지만 시는 또한 무엇보다 소통이다. 자기 고백과 내적 응시가 시인 내면에만 갇혀있는 시는 좋은 시가 아니다. 소통의 방식은 언어이지만 언어 중에서도 문학적으로 구성된 언어를 사용한다. 따라서 시를 잘 쓰는 시인은 그 문학적 언어의 문법과 구성을 숙지하고 있다. 시의 가치는 그 언어를 잘 사용해서 시인 자신의 응시와 모색이 독자에게 소통이 되고, 개인적 탐색은 그 과정에서 보편적 의미를 얻게 된다.


 시인은 사적인 목소리를 외재화해서 보편성에 근접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 보편성은 단지 자기 외부에서 통용되는 가치와 세계관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소통의 방식을 고민하면서 얻어져야 한다. 쉽게 말해 시인 개인 내면의 매우 사적인 속삭임과 독백의 목소리를 타인에게 들려주고 소통되는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 이것은 존재하는 사회적 가치와 통념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개입하고 변화시키는 과정이다. 개인적 차원이 대사회적 차원으로 진입하는 매우 적극적인 창조적 행위가 바로 시 쓰기이다.


 우리는 언제 시에 감동을 받는가. 우리는 어떤 시에 감동을 받는가. 아니, 지금 시에 감동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가. 아니면 더 이상 우리는 시에 감동을 받지 못하거나 시의 감동 운운하는 것은 촌스러운 일인가. 그 모든 시를 둘러싼 이 시대의 흉흉한 소문에도 불구하고 시는 감동, 즉 우리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만은 변함이 없다. 또 때로는 우리의 마음 이상의 것도 움직인다.


시의 역사에는 그런 순간들이 종종 있었다. 이 시적 감동의 순간을 증명할 시의 예들은 수없이 많겠지만 여기선 자아 찾기이자 질문과 응시로서의 시 쓰기를 잘 예시해줄 시 한 편을 소개한다.



                 윤동주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우에 긴 그림자를 그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1941. 9.31)




시는 동의와 협상의 문제가 아니라, 정서적 소통의 장이다. 독자는 시 한 편을 읽으며 시적 화자가 도달하는 시의 내부적 논리에 따른 정서적 종착역을 따라가야 한다. 그 종착지에서 다시 발길을 돌려 나오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다만 시인이 시로 내놓는 길을 따라가 보는 것이 독자가 시를 읽으면서 시적 모험을 감당해내는 일인 것이다. 그리고 그 시인의 길을 따라가는 일이 독자의 기본적 상식과 기존 견해를 조금이라도 흔들어놓는 전율과 감동을 전달한다면 그 시는 정서적 모험의 길이라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한 셈이다.


 시가 질문이라고 했다. 삶을 닮은 시는 질문으로 던져진 존재의 기원을 찾아 떠나면서 생의 답을 찾는 과정을 기록하고 응시하면서 시인의 언어적 감성을 통해 독자에게 다시 질문을 던진다. 네 존재의 질문을 찾아보라고. 왜 사느냐는 질문에 부자가 되려고 한다는 답처럼 동문서답은 없을 터이다. 먹고사는 일은 존재의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라, 생존의 기본적인 욕구일 뿐이다.


 이런 매우 상식적인 진실을 라깡은 정신분석을 통해 이론화한다. 라깡은 욕구와 요구, 욕망과 충동을 나누어 설명한다. 이 정신분석 개념은 쉽게 말하면 우리가 뭔가를 원한다는 것, 하고 싶거나 갖고 싶다는 감정이나 의지에 관한 것이다. 속설로 표현되는 본능적 욕구와 의지를 통한 성취욕으로 크게 나누어볼 수 있는 심리는 라깡의 이론에서 네 가지로 개념화된다.


욕구는 소위 생물학적 본능이며 생존을 위해 충족시켜야 할 것이다. 식욕과 성욕 등이 그것이다. 요구는 이런 본능에 기초하지만 사회적 필요에 의해 개인 자신이나 사회가 당위나 원칙, 목표 등을 ‘제시’하는 것이다. 여기서 ‘제시’가 중요한데, 요구는 욕구를 언어로 표현하는 방식, 즉 타자에게 제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욕구와 요구 사이의 언어의 개입이 중요하다.


언어적 예술로서의 시는 이런 요구이면서 욕망의 차원에 놓인다. 언어는 개인이 자신의 욕구를 표현하는 도구이지만 완전한 언어적 의사소통은 불가능하므로 욕구와 요구 사이엔 언제나 간극이 생겨나고 이것이 욕망이다. 욕망은 이런 사회적 요구에서 욕구를 빼면 남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 욕망은 만족되지 않는다. 결코 충족될 수 없다. 가령 대학 졸업장을 따라는 부모와 사회의 요구를 성취해도 그다음에 뭔가 다른 것을 계속 원하게 된다.


 욕망은 언어적 제시인 요구로 인해 생겨나는 간극이다. 하나의 목표가 이루어져도 인간은 만족하지 못한다. 돈을 많이 벌어도 더 벌려고 하고 돈 이외에 다른 것에서 ‘만족’을 꾀하고, 세간의 말로는 ‘행복’을 찾는다. 이 욕망은 따라서 환유적이다. 즉 계속해서 하나와 다른 하나를 연이어 원하는 연쇄적 욕망의 원환 고리를 만들어낸다.


 충동은 본능과 유사하지만 무의식적 차원의 것이다. 가령 식욕이나 성욕은 의식적 욕구이다. 배고픔을 느껴서 먹고 성욕을 느껴서 만족을 채우려고 한다. 이 과정은 의식적이다. 즉 내가 알고 있다. 하지만 충동은 나도 모르게 내가 하는 행동들이다. 그리고 이 무의식적 행위로 우리는 충동을 만족시키고 있는데, 그것이 만족되었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할 수 있다.


이처럼 정신분석이론은 정치한 개념구성을 통해서 존재의 질문에 대한 답은 단지 욕구의 차원, 즉 욕심과 만족 이상의 차원에 놓여있는 것임을 함축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 각자의 생명이 던져놓은 질문을 어떻게 받아서 답을 찾을 것인가에 따라 각자의 인생이 구성되어가는 것이다.


여기서 시는 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받아들이는 자세와 관련된다. 존재가 질문이라는 인식 자체는 쉽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태어날 때는 그저 주어진 삶을 생존본능으로 버텨갈 뿐이다. 하지만 성숙의 과정은 생존본능의 차원을 극복하고 요구와 욕망이 형성되어 그것들과 분투해 나가야 한다. 이 분투의 과정에서 욕망은 계속해서 결핍과 불만족을 만들어내지만 충동은 부분적인 만족을 주어 하루하루를 살아나가게 이끄는 원동력이 된다.


우리는 이 네 가지 본능을 ‘관리’ 또는 ‘협상’하면서 생의 궤적을 그려나간다. 따라서 왜 사느냐는 존재의 질문에 잘 먹고 잘 산다는 대답은 단지 생존본능의 차원, 욕구를 만족시키는 저차원에 머무는 것일 뿐이다.


시는 이 존재의 질문을 자꾸 반복해서 제기함으로써 우리가 욕구의 차원이 아니라 요구와 욕망을 대면해서 한 주체로서 짊어진 존재의 사명을 다하도록 이끄는 저 심연의 실존에서부터 날아온 소환장 같은 것이다.


  


*이 글은 곧 지면으로 출간 예정인 원고 중 시론 부분만 추려서 재구성한 것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반도네온이 한참 울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