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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대건 Sep 09. 2019

기억하는 공공성

승효상의 ‘보이지 않는 건축 움직이는 도시’는 공공성의 회복을 꿈꾼다

앎은 잔인하다. 알고도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은 분노를 부르고 절망을 쌓는다. 절망은 이내 우울로 바뀐다. 그렇게 만들어진 우울은 타인에게 전염되기도 하고, 때론 파괴적 속성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그래서 앎은 무섭다. 이런 경우는 앎이 생각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을 때가 많다. 한때 나도 그랬고, 지금도 가끔 섬뜩할 때가 있다. 더구나 나는 어설픈 앎이기에 조심스럽다.


그런데도 이토록 책을 붙들고 앎에 집착하는 이유는 승효상 같은 사람들 때문이다. 그는 끊임없이 반성하고 공부하고 따지며 한탄하고 후회하며 슬퍼한다. 분명 누군가의 스승임에도 아직까지 먼저 떠난 스승의 제자였음을 고집하고, 스승이 지향하고 스스로 공감했던 공공성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한다. 물론 쉽지 않다. 그래서 매 순간 공공성을 잃어버린 시대를 안타까워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결국은 2등 상에 머물 건축 공모에 공공성의 설계를 들이민다.


책을 마치자 용산을 떠올랐다. 잘못된 공공성이었다. 왜 사람들은 기억하려 하지 않을까? 항상 의문이었다. 광주대단지가 그랬고, 청계천이 그랬고, 동대문운동장이 그랬다. 지워진 땅에 새로 세운 건축을 새로운 역사라 칭한다. 하지만 내겐 강제된 역사 다름 아니다. 건축은 역사를 담고, 건축이 사라지면 역사도 쉽게 지워진다. 그래서 기어코 기념관을 만드는 이유다.


우리 이전 세대가 자신들의 아픔에 대한 이해를 바라듯, 지금 세대도 아픔을 가졌고, 아마 다음 세대에게 이해를 바랄 것이다. 세대 간의 반목은 예정된 수순이다. 오늘날처럼. 감히 (나 따위가) 시대적 과제를 말해보자면 공공성의 회복이라 하겠다. 이 시대에 사라진 것은 공공성이요, 잃어버린 것은 기억이다. 승효상은 다시 찾고자 한다. (17.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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