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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대건 Sep 21. 2019

아로새겨 넣은 사랑

드니 빌뇌브의 그을린 사랑을 보고

'영화가 영화지, 뭐 별거냐'라고 말한다 해도, 이 영화는 별거다. 감당할 수 없는 영화다. 나중에 돈을 모아 안주 메뉴보다 술 메뉴가 더 많고, 커피 메뉴보다 널브러질 수 있는 소파가 더 많은 재즈 카페를 차릴 건데 그 카페의 간판에 <그을린 사랑>이라고 새길 것이다. 이 리뷰는 그 이유다.


카뮈가 말했다. “사랑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면 만사가 너무나도 간단하리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부조리는 더욱 견고해진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로 가득한 모든 사랑은 부조리하다. 영화 <그을린 사랑>은 사랑의 부조리함에 대한 영화다. 어머니(나왈 마르완)는 멍한 눈으로 당신에게 부조리함으로 보여왔던 삶은 자신에게는 진실로 사랑이었다고 온몸을 다해 변명한다.


아마 잔느와 시몽은 자신들의 아버지가 누군지는커녕 어디서 어떻게 출생했는지도 듣지 못했을 것이다.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당연함과 그 당연함으로부터 비롯되는 사랑의 정의는 조리다. 잔느와 시몽이 초대된 어머니(나왈 마르완)의 사랑은 불편하다. 그야말로 부조리하다. 감히 말할 수 있을까. 탄생의 순서를 거스른 부조리와 시간을 넘어선 사랑. 차마 살아서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자신이 겪은 바를 보여주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자신의 시체를 걸고 이해받길 바란다.


영화는 확장된 시간은 점점 줄여가고, 레바논과 캐나다 사이를 조금씩 좁혀 가면서 조리와 부조리를 합쳐간다. 그 사이에서 수도 없이 죽고 죽이는 사람들의 모습은 생경하기만 하다. 삐걱거림의 소음은 오로지 관객의 몫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예 영화 밖으로 밀어버리지 않는다. 십자가와 종교, 고문과 테러 등 어딘가 익숙함을 전시함으로써 관객도 영화에 포함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하나의 물리적 파동이 평균율을 지나면서 스쳤다 멀어지다가 하나의 지점에 이르듯 영화 <그을린 사랑>도 다시 유언으로 돌아간다. 의문의 편지는 사랑의 1조건 ‘믿음’으로 완성되어 개봉된다. 그 순간, 나왈이 가진 사랑의 부조리함은 일상의 조리함으로 변해 소멸한다. 사랑은 전염되었고, 이제 부조리는 남겨진 사람의 몫이다. 그리고 관객인 나도 남겨진 사람이다.



훗날 지나가다 철제 간판에 검붉은 색의 작은 글씨로 ‘그을린 사랑’이라는 카페를 발견한다면 내가 운영하는 카페니 들어와 작게 외치라. “모든 사랑은 부조리하다”라고. 그러면 당신에겐 모든 메뉴는 공짜다. 그러니 오라. 우리의 부조리함을 이야기하자.(16.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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