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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대건 Sep 21. 2019

친구 A의 ‘의미 없음’을 위하여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의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는 유쾌하다.

언젠가 이우환의 작품 <Dialogue> 앞에 선 친구 A는 물었다. “저게 몇십 억 이라니. 말이 되냐?” 속으로만 말했다. ‘그래, 우리한테는 말이 안 되겠지.’


자본주의는 시간과 돈을 일치화한다. 자본주의에 중독된 우리는 시간과 과정을 그에 걸맞은 정성 또는 결과로 치환해버리고, 자신의 잣대로 그 수준을 함부로 판단한다. 무엇을? 모든 것을. 무엇으로? 돈으로.


친구 A가 가치 우선순위로 둔 것은 시간이었다. 공교롭게도 시간과 돈의 완벽한 등가성을 우리는 ‘야근’이라는 전근대적인 금광에서 목격했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한낮 광부일 따름이다. 친구 A도 그랬다. 수천 시간 동안 수 만 번의 곡괭이질을 해야 만들어지는 것이 ‘억만금’이라는 광물이다. 그에 비한다면 캔버스에 점 하나를 찍는 이우환의 수고는 참으로 간단한 것이었다. 그런데 점 하나에 억만금이 나왔다?! 당연히 경제적이면서도 이성적이고 근면한 광부의 합리적 의문은 발생할 수밖에. 점찍는 위치 고르는데 1분, 붓에 물감 적시는데 1분, 들고나서 바르는데 1분, 한번 그윽하게 보는데 2분 정도. 딱 5분짜리 붓질. 그게 몇억이라고?! 현대미술이야말로 무진장의 거품, 용납할 수 없는 불경제! 이 5분 그림을 위해 50년이 걸렸다는 피카소의 말도 결국, 가치는 많은 수고에 비례한다는 자본주의적 치환법이다.


여기까지 이르자, 더 이상 가만있을 수 없었다. 그건 광부의 고귀한 노동과 미술작가의 창조적 행위를 모두 무시하고 짓밟는 것이었다. “이 무식한 A야. 그게 아니라”라고 말을 떼려고 했다. 고개를 돌려, 이우환의 작품 앞에 선 친구 A가 눈에 들어온다. 둘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 문득 떠오르는 것, 마크 로스코는 “자신의 작품 앞에선 침묵만이 있어야 하니 설명을 달아 관객의 정신을 마비시키지 말라”라고 했다. 오롯이 A의 감정만이 작품 앞에 놓인 가운데, 나는 A의 감정을 나의 설명으로 마비시키려고 했는가. 그것은 필연적인 지식 폭력을 동반할 테고, 유일의 의미만을 강요하고 만다. 나는 친구 A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솔직하게, 로스코보다는 김현의 편이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살아서 이 세계의 무의미와 싸워야 한다”라고 했다. 만약 이우환의 작품이 그 자체만으로 친구 A에게 무의미를 선사한다면, 무의미를 넘어서 작품에 대한 허구성으로까지 번진다면, 허구를 품고 자본에 삼켜버린다면 ‘나는’ 싸울 것이다. 자본주의는 로스코의 침묵을 깨는 동시에, 김현의 무의미를 변질시킨다. 무엇에 대항해 창을 겨눠야 하는가 물어라. 나는 답하노니 ‘우리의 침묵과 무의미’를 위해 싸우겠다고. 그런데 보자. 친구 A가 <Dialogue>를 보면 느낀 것이 내가 싸워야 하는 무슨 ‘의미’인가? 어떤 ‘소음’인가?


다시 김현을 꺼내 온다. 그가 말하길 “문학은 써먹을 데가 없어 무용하기 때문에 유용하다. 모든 유용한 것은 그 유용성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만, 문학은 무용하므로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그 대신 억압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이 무용론에서 미술은 문학의 항목에 정확하게 대체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또한 미술이 아닌 것을 찾아 미술인 것들을 차근차근 보여준다. 역설이 성공하는 순간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미술이 자본주의와 사랑 아닌 사랑을 하는 이유는 미술 스스로 자신의 의미를 부정하기 위한 진화 과정일지 모르겠다고 말이다.


미술관을 빠져나오며 친구 A는 <Dialogue>의 작은 복사본을 구입했다.

“그건 왜 샀어?”

“자꾸 보니 마음에 들어. 방에 걸어두려고.”

“아깐 별로라며? 말도 안 된다며?”

“이해가 잘 안 됐는데. 지금은 좀 달라. 뭔지는 모르겠는데. 암튼 달라. 보는 눈이 달라졌어.”


말 없는 눈이 말 많은 입을 압도했다.(16.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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