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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kdaegeon Feb 25. 2020

'돼지'라는 객체에 투영된 윌리엄 골딩의

윌리엄 골딩의 『 파리대왕 』을 읽고,

‘돼지’라는 객체에 투영된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과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두 작품의 속 권력관계의 구조적 갈등과 사회적 함의를 고찰한다.


미루다 쓴다. 서평이라는 것은 무조건 생각나는 대로 쓰고 봐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로쟈’라든지, 왜 그렇게 똑똑한지 모를 사람들과 언제부터 저렇게 잘났는지 모를 이들이 한껏 나열해 놓은 글자들에게, 내 알량한 생각 따위 먹히고 만다. 그러니 이런 투정이라도 우선 부려놓고 보자. 그런데 다른 책, 나보다 늦게 태어난 책들의 서평은 잘도 써 재끼면서 하필 ‘파리대왕’에 와서는 시답지 않은 변명들을 내놓고 있는가.


대놓고 말하자면 능력 부족이다. 감히 ‘파리대왕’ 같은 위대한 작품을 이해하고 분석하고 따지고, 우리 사회와 내재된 문제들을 비교하고 고찰하면서, 주장과 근거 확실하고 논리 정연하면서, 읽는 이가 재밌고도 가볍게 읽을 수 있되 끝에 가서는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메시지를 주는, 그런 완성된 글을 만들 수 없다. 난.


그래도 조금 노력해보겠다. 노력이야 다들 하는 거니까. 게다가 아까 나는, ‘높은 역량에도 불구하고 귀하를 모시지 못해 어쩌고 저쩌고’ 씨부리는 문자를 받았기 때문에, 그 문자와 전혀 관련 없는 ‘딴’ 생각을 할 필요가 있다. 이거라도 적지 않으면 술을 마셔야 하는데, 마시면 취할 때까지 계속 마셔야 될 거 같은 기분이고, 마시다 보면 전 여자 친구가 생각날 것 같고, 그래서 ‘자니’라는 문자를 보낼까 말까 고민하고말고 그러기에는 오늘내일할 일이 너무 많다. 젠장. 높은 역량이면 뽑아야지! 차라리 미안하다고 하라고! 아, 죄송하다고도 했지. 죄송하면 끝이냐고! 삶은 고지식하기 짝이 없다. 원하는 것에 거의 다가갔다고 여기는 순간 그것을 빼앗아 가버린다.


다시 서평으로 돌아와 본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보다 쉽게 이해시키며 적절한 전달을 위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일베’와 소설 속에서 아이들이 모습을 비교한다. 이쯤 되면 눈치챘겠지만 글 거창한 제목과 그다지 관계가 없다. 미안하다.


우선 아이들은 재미라는 이유로 모든 것을 시작한다. 영화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책에서 아이들은 그들의 조난 상황에 대해 놀이 혹은 캠핑 온 것과 같은 인식을 한다. 또 다이빙이나 모래놀이를 하기도 한다. 동시에 사냥감을 찾는다. 멧돼지에서 시작하지만 점점 사람으로 변해간다. 가면을 쓰고 무리 지어 다닌다. 그러면서 개개인의 특성은 거의 무시된다. 처음부터 그들은 자신들이 모두 몇 명인지도 알지 못했다. 애초에 개인은 없었다. 다들 외모에 대해 혐오를 한다. 아이들의 돼지에 대한 모욕은 일반적 – 랄프도 돼지라고 한다.-이고, ‘계집애’라는 말은 욕설로 통용된다.


상징을 통한 비교는 꽤나 인상적이다. 첫 번째, 야광봉이다. 야광봉은 어떤 빛과 같다. ‘앎’의 시작이기도 하다. 아이들이 처음 조난당했을 때, 랄프는 야광봉으로 주위를 밝혀 길을 찾는다. 그러나 후반부에선 사이먼이 야광봉으로 괴물의 진실을 알아내고 그 사실을 전하기 위해 아이들에게 오지만, 그 흔들리는 야광봉으로 인해 괴물로 오인당하고 죽는다. 야광봉이 우리 시대의 ‘표현의 자유’와 같다면 비약인가. 감히 나는, ‘같다’고 말한다.


두 번째 상징은 파리대왕이다. 파리대왕은 괴물에 대항하는 상징이며, 아이들을 대신해 괴물과 싸우는 존재이다. 처음 괴물의 소리를 듣자 도망가던 아이들이 나중에는 파리대왕을 세운 후, 괴물 – 사이먼, 가짜 괴물이었지만 – 을 진정 죽일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또한 괴물의 존재가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괴물을 지속적으로 재탄생시키는 근원이기도 하다. 즉, 파리대왕이 있는 한 아이들을 위협하는 괴물도 영원하게끔 되어버린 것이다. ‘일베’에게 파리대왕은 무엇이고, 그들의 괴물은 무엇이고, 죽임을 당한 괴물은 무엇이었는지, 또 지금은 무엇으로 변하고 있는지 세세하게 말하기 역겹다. 쓰레기 같은 것들.


몇 가지 부분은 더 적어보자면 이렇다. 진짜 무엇을 죽이는 연습을 한다, 죽이고 나서 변명으로 ‘실수였다’ 고도 말한다. 누군가 명령하고 누군가를 추종한다는 점도 비슷하다. 고동과 회합을 알리는 고동소리에 대해서도 고민해 보았지만 딱히 구체적인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목소리의 전파라는 의미를 따지면 인터넷과 연관할 수 있겠다 싶었지만 애매하니 입을 다문다.


20살 이후, ‘파리대왕’은 세 번 읽었다. 책 읽을 때마다 매번 했던 얘기는 ‘랄프’와 ‘잭’의 리더십에 관한 것이었다. 나 또한 처음에는 ‘누가 좋은 리더인가’라는 토론에 득달하고 달려들었지만, 이후에는 그저 우리 사회가 얼마나 박정희를 갈망하고 있는가 새삼 느끼는 계기가 될 뿐. 516과 같은 쿠데타가 다시 일어난다면, 분명 또 성공할 것이다. 물론 그 장군은 키가 커야 될 텐데, 적어도 나는 못 될 테니 안심(?)이다. 귀하의 높은 역량에도 불구하고 키가 평균 이하이니…


마무리하자. 나는 흔히들 말하는 성악론자다. 단지 이기적인 것이 악이라고는 말할 수 없기에, 이 부분에서 많은 이야깃거리가 나오고 복잡해지니 내버려 둔다. 적어도 ‘사람은 이타적이지 않다’는 말을 하고 싶다. 18세기 영국 작가 메리 울 스톤 크래프트의 말을 빌려 오자면 “악하기 때문에 악을 선택하는 사람은 없다. 단지 선을 추구하고 행복을 찾다가 그렇게 될 뿐이다.” 정도로 이야기할 수 있겠다. 우리가 봤던 영화는 80년대 냉전 상황을 토대로 리메이크된 작품이다. 2015년 지금, ‘파리대왕’이 우리나라에서 리메이크된다면 어떤 영상으로 만들어질까? 갑자기 영화 하나가 떠오른다. ’배틀로얄’


ps. 영화 ‘배틀로얄’은 일본에서 2000년에 만들어졌다. 사회학자들은 우리나라가 일본에 비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거의 모든 면에서 10년에서 20년 정도 뒤쳐 있다고 분석한다. 다시 말하면, 10년에서 20년 전의 일본을 바라보면 지금 우리나라를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나아가 앞으로 우리 사회의 방향성에 대해 반성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하지만 ‘별 수 있겠어?’ 하는 부정적인 생각부터 드는 것이 씁쓸하다.(15.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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