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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kdaegeon Jan 02. 2020

절대로 실패하는 일

내 생의 중력

0. 들어가며


2009년인가? 2010년인가. 이제는 년단위조차 기억나지 않는 시간. 아니다, 기억한다는 것 자체가 사랑의 어리석음을 증명한다.


대학로를 세바퀴 정도 걸으면 그제야 보이는 이음책방, 헤어지기는 싫었고 뭐라도 함께 하고팠던 우리는 굳이 지하 책방으로 들어간다. 사실 망설였다. 우리가 처음 싸웠던 곳, 광화문 교보문고. 책에 정신이 팔린 나는, 걷기 싫었던 너를 잊었다. 그래서 토라진 너는, 이승우 작가 신작이 나왔다며 좋아하는 나를 버리고 집으로 가버렸다. 또 다음 오해와 다툼의 장소 잠실 교보문고, 다음 종각 반디앤루이스, 또 광화문,,, 우리 제발 다신 서점만은 가지 말자고 약속했다. 그리고 이음서점.


왜 그때는 싸우지 않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오빠, 우리 서점 왔는데 안 싸웠어!” 같이 손잡고, 아니 껴안고 기뻐했다. 그녀와 나는, 오늘 우리를 기억하자면서 서로에게 책을 선물하기로 했다. 그때 그녀가 내게 선물한 책이 ‘내 생의 중력’이다. 망할.


1.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정일근)


고래는 크고 아름답다. 그 크기만큼 기다림의 상징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라. 아무리 고래가 빠르다 한들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고래의 지루함을. 그것은 곧 자신의 삶에 대한 기다림에서 비롯된 체념과 다르지 않다. 시는 떠난 고래를 기다린다. 기다리는 고래를 기다리는 사람이라니. 우선 답답하지만 이내 현명하다. 그저 기다리는 일뿐이라니. 용기 내지 않아도, 걱정하지 않아도, 슬퍼하지 않아도 기다리기만 하면 될 일이라니.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세상은 잔혹하다. ‘고래는 기다리는 사람의 사랑이 아니라 놓아주어야 하는 바다의 사랑이기에’. 그렇다. 대부분의 기다림은 어리석다. 경험상.


2. 혹독한 기다림 위에 있다.(김윤배)


“김윤배 선생님, 이런 시는 적는 게 아닙니다. 적으시더라도 혼자만 가지고 계시지 출판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너무 잔인하지 않습니까? 어디 변명이라도 좀, 무슨 말씀을 좀 해보세요. 네?"


3. 인중을 긁적거리며(심보선)


자연스럽게 그녀의 인중을 만지며,

“여기를 인중이라고 해. 얼굴살에서 왜 여기만 쏙 들어갔는지 알아?”

그녀는 이내 내가 함부로 얼굴을 만졌다는 걸 잊고,

“왜?”

"여자에게 아이가 생기잖아. 그러면 아이마다 천사가 찾아온대. 그 후 옆에 있으면서 이 세상에 모든 걸 알려주는 거야. 그게 지혜야. 그러다가 아이가 나올 때!”

잠시 쉬었다가, 쉿 하는 모션과 함께 그녀의 밝고 붉은, 야릇하고 주름진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립스틱이 살짝 뭍을 만큼 누르며. 하지만 손가락 끝은 그녀의 인중에 닿게. 강하지 않게, 적당히 과감하게.

"천사는 아이의 입술에 쉿! 하고 주문을 외워. 이제 잊어버리라고. 다시 시작하는 거야. 삶을."

그녀의 입술이 닿은 손가락을 다시 내 입술로 가져와 아무렇지 않은 듯 조용히.


‘제발 나와 함께 영원히 살아요, 전생에서 후생에 이르기까지' (인중을 긁적거리며 中)


4.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김선우)


사랑은 우연하지 않다. 마치 꽃이 그 자리 피어나는 것이 일부러 그곳에 있으려고 했음이 아니듯. 짧기에 전문을 남긴다.


그대가 밀어 올린 꽃줄기 끝에서

그대가 피는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


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

꽃벌 한 마리 날아든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

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


그대가 꽃 피는 것이

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


5. 뒤로 꼽아둘 거다. 제목이 보이지 않도록.


음악영화제가 있었다. 제천으로 향하기 전, 급한 마음에 집어 든 시집이 ‘내 생의 중력’이었다. 실수다. 이제 앞으로 적어도 5년은 절대로, 절대로, 새 애인이 읽어달라고 했을 때 빼곤 절대로 펴보지 않을 거다.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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