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리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eokdaegeon Aug 30. 2020

사랑은 짧고, 망각은 길다

윤단비, 남매의 여름밤

발걸음 하기만 하면 만날 수 있었던 것들이 사라지고 있다. 전시회는 문을 닫고, 음악회는 열리지 않고, 조용한 카페의 그 의자에는 더 이상 앉을 수 없다. 오늘을 사는 사람은 어제를 그리워한다. 만약 그 그리움이 축복이었다고 한숨 쉬게 되는 날이 온다면, 그러니까 세상이 이렇게 얼떨결에 닫히게 된다면,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다.


하지만 아직 세상이 망할 거 같지는 않으니까, 난 영화를 봤다. 그래도 <남매의 여름밤>을 선택한 건 작은 불안 때문이다. 오늘 이 시간을 놓치게 되면 다시 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불안.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비 내리는 밤, 차선은 빗물과 어둠에 지워졌다. 갈 수 있지만 갈 길이 보이지 않는 길. 그래서 강변으로 가는 시간은 생각보다 길었다. 어렵게라도 도착했다는 의미는 2020년 역시 비록 답답하고 헷갈릴지라도 우리가 바랐던 곳에 갈 수 있다는 뜻일까?


영화는 폐허로 시작해 울음으로 끝났다. 3059번의 다마쓰는 자신보다 큰 가구를 남겨둔 채 재개발 지역을 떠난다. 불안으로 가득 찬 세 가족의 눈빛과 확실하지 않은 거처로 향하는 다마쓰는 흔들린다.


아버지이자, 할아버지의 양옥집은 원색으로 가득하다. 영화 속 무채색이라고는 2층 난간과 옥주(최정운) 뿐이다. 그래서였을까. 남매들의 모든 불안은 그 2층에서 발현했다. 햇빛이 너무 잘 들지만, 그 해가 사라지면 불안이 피어나는 그곳. 떨어질까 무서웠던 난간. 창가 앞 오래된 미싱은 찢어진 상처를 엮어내려는 듯 놓여있다.


갈등은 없다. 불안만 있다. 어쩔 수 없는, ‘나도 잘 모르겠다’는 대답밖에 할 수 없는 삶이 있다. 결국 돈이 있다면 다 풀릴 수 있는, 아니 문제도 없었을 것들. 물론 영화는 돈을 말하지 않는다. 우리의 삶은 돈과 같지 않으니까. 하지만 뭐가 다를까. 같음과 다름을 설명할 수 없다는 불안. 분명히 다른데, 사는 건 돈이 아닌데.


그래서 영화는 자꾸 꿈을 보려 주려고 했다. 꿈에서는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생생해도 그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없다면, 그건 꿈이다. 꿈과 삶은 다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기억은 그걸 모른다. 그래서 자꾸 헷갈린다.


또 하나의 무채색이었던 옥주의 티셔츠에는 ‘Love is so short, forgetting is so long.’가 적혀있다. 감독도 의도하지 않았던 파블로 네루다의 글. 영화는 그 옥주의 울음으로 끝이 난다. 옥주는 사랑이 끝나서 울었을까. 망각이 끝나서 울었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마음으로 그리는 세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