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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러 May 18. 2021

그 시절의 인연이 대하여

비가 주룩 내리던 일요일 오후, 늦은 점심을 먹고 의정부 예술의 전당으로 향했습니다. 제가 사는 곳에서 실제로는 30km 조금 넘는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지만, 곧잘 다니지 않아서인지 멀게 느껴져 조금 서둘렀지요.


주말 내내 내린 비로 도로는 군데군데 고여 있고, 지나는 차들은 저마다의 조심스러운 속도로 자기 갈 길을 재촉했습니다.


저도 오랜만의 빗속 드라이브라서 너무 기분이 좋았나 봐요. 고속도로 출구를 제대로 빠져나오질 못해 조금 돌아왔죠. 그랬더니 예상 도착 시간이 공연 시작 시간보다 늦어 버렸습니다.


어쩌나요?! 아쉽긴 하지만 서두르는 건 위험하니까 천천히 공연장으로 향합니다. 비 오던 그날, 저는 이자람의 판소리극 '이방인의 노래'를 감상했습니다.


역시 공연장에 도착하니 조금 늦었네요. 어쩔 수 없이 인트로는 바깥 모니터를 보고, 입장합니다. 어두컴컴한 공연장을 조심스레 들어가는데, 그런데 그걸 이자람 님이 그 모습을 봤는지 "어서 오세요"라고 해주시더라고요. 얼떨결에 저도 관객에게 인사를 했답니다. 어찌나 부끄럽고도 기분이 좋던지. 평생 기억에 남을 공연에 신호 같은 것이었나 봅니다.


이자람이 선보인 '이방인의 노래'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단편소설을 판소리로 재탄생한 작품입니다. 네, 맞아요. 그 '100년 동안의 고독'을 쓴 작가입니다.


소리꾼 이자람은 고수 이준영과 김정민 기타리스트와 함께 무대를 채웠습니다. 구성에서도 우리 고전과 남미 고전의 만남을 상징하네요.


어느 공연에서 소리꾼 이자람이 말하길, 심청가, 흥부가 등등 우리 작품은 너무 좋지만, 너무 싫다고 합니다. 그 옛날에는 일상다반사였다고 해도,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성차별, 인신매매 등 그리 좋은 내용은 아니잖아요.


그러면서 고전에서 배우되, 새롭게 창조하고 싶다고도 했습니다. 어쩌면, 이자람이 시도 중인 판소리로 문학 작품을 재창작하는 작업은 고전이 고전을 통해 거듭나는 새로운 창조의 현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아이러니한가요?! 무엇이든 저장할 수 있고, 끝도 없이 무한 복제가 가능한 디지털 세상에서 한날한시에 무대 위에 올려지고 사라지는 공연이라니. 그 순간 수십 명의 관객에게만 일시적 생동감만을 전하고 사라지는 영원한 고전이라니요. 이자람은 자신의 예술을 통해 거대한 실험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공연은 정말 즐거웠습니다. 한 명의 소리꾼이 이야기를 이렇게나 감질나고 흥미롭게 풀어낼 수 있는지! 소리와 행동으로 먹고 놀고 자고 뛰는 이자람을 보는 내내 행복 그 자체였답니다.


또 가끔은 사람 이자람으로 돌아와 “목말라요”하고 물을 찾는데, 그 순간은 저도 이야기에서 현실로 나오곤 했죠.


이걸 이야기라고 해야 할까요? 음악이라고 해야 할까요? 전 이자람이 자신이 지휘하고 연주하는 교향곡이라고 하고 싶었습니다.


웅장하기도 하고, 감미롭기도 하며, 벅차오르기도 했으니까요. 또 어느 때는 할아버지, 어느 때는 여자, 또 어느 때는 아저씨, 이렇게 사람 소리에다가, 음식 만드는 소리, 바람 지나가는 소리 모두 다른 소리가 어울리니 교향곡이 아니겠어요?!


공연이 끝나자, 만족감과 함께 큰 헛헛함이 몰려옵니다. ‘아, 또 볼 수 있을까’. 기약 없는 기다림이 사랑의 조건이고, 그 기다림의 시간이 사랑의 증거라면 ‘나중 그 소리의 공간에 나도 있길’ 바랄 수밖에 없습니다

아쉽고 서운하죠. 그 무대를 또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 감동을 나도 느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고요. 또 언젠가 이자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마 소소살롱 콘서트 중이었을 겁니다. 관객 중 한 분이 이자람에게 "억척가를 한번 더 감상할 날이 있을까요?" 물었습니다.


'억척가'는 이자람이 브레히트 서사극을 판소리로 각색한 작품입니다. 삼국 시대 전쟁 속 민중 이야기를 이자람이 혼자 15인을 연기해 끌고 나가는, 정말 억척스러운 이야기랍니다


저도 대답이 궁금했습니다. 왜냐면, 저 역시 꼭 한번 보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어렵다"였습니다. 왜?!


"억척가는 그때의 나와, 그때의 인연들이, 그때가 맞아 만들어졌던 공연이다. 지금 억지로 다시 그때의 모든 것을 맞춰서 무대에 올릴 수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 시절의 인연을 품고 살아갑니다. 피천득처럼 '아니 만났어야 하는 인연'까지는 아니더라도, 떠올리면 기억나는, 그러다 시간에 지워지고 지워질 인연들이요.


공연장을 나와 차 속에서 한참이나 비 흘러내리는 창을 보며 앉아 있다가, ‘그래. 지금의 인연이지’하고서야 허탈한 기분 떨치고 시동을 걸었습니다.


돌아가는 길 역시 올 때와 같이 행복했습니다. 지금의 인연에 충실했기 때문이겠죠?! 이만 편지 줄일게요. 시간이 없어 길어진 편지를 용서해주세요.




[이번주 찾아갈 연주회]

5월 19일, 서울스프링실내악 축제, 불멸의 연인

5월 22일, 오페라 토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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