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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kdaegeon Jul 30. 2022

큐피트 화살이 가슴을 뚫고 사랑이 시작된 날

출근과 같은 무조건적인 외출이 없어지면서 가장 미루지 않게 된 것이 설거지와 빨래다. 예전에는 집에서 밥을 먹지도 못했을 것이라 설거지할 그릇들도 나오지 않았고 빨래 역시 속옷이고 수건이고 쌓이고 쌓여 밀려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회사 핑계가 사라지니 미뤄야 할 핑계도 없다. 게다가 집에서 왔다 갔다 하며 그릇과 세탁물로 가득 찬 싱크대와 빨래통을 도저히 보고 있을 수가 없다. 


이 둘을 분리할 수도 없다.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집안일의 시작과 끝은 빨래에서 빨래로 끝난다. 빨래를 세탁기에 넣고 돌리면 대략 1시간 정도다. 헹굼과 탈수를 좀 더 한다고 해서 10분 이상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러니 설거지를 해야겠다 싶으면 빨래통으로 보고, 청소를 해야겠다 싶으면 빨래통을 확인해야 한다. 이 당연한 일을 순서를 모른다면 집안일은 정말 끝도 없어진다. 


그렇다 보니 설거지하려고 고무장갑을 꼈다가 다시 벗은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사실 빨래도 수건이랑 옷이랑 분리해서 빨아야 하니까 정성을 들이면 한도 끝도 없다. 그래도 다행인 게 외출복은 기껏해야 티셔츠라서 수고가 덜었다. 암튼 세탁기를 돌리고 다시 싱크대로 와서 전에 말려둔(?) 그릇들을 선반 안에다가 정리해두고 다시 그곳을 채운다. 그러고 나면 20분 정도 지난다. 정말 이상하게도 분명 10분 정도 지났을 거라 여겼는데 시간은 정말 순식간이다.


이제 빨래 끝나기만을 기다리면 될까? 그렇지 않다. 그릇을 선반에 넣었듯 빨래도 개어야 한다. 그래야 새 빨래를 널 수 있지. 요즘은 수건이 정말 많다. 오래된 수건은 새로 빨아 써도 몸을 잘 닦아내지 못해 다른 수건을 또 써야 한다. 그렇게 빨랫감만 늘어나게 된다. 그렇다고 쉽게 버릴 수도 없다. 버릴라치면 언제 걸레로 쓰고 버려야지 하면서 미루게 된다. 매주 하나씩 버려야지.


이 정도 되면 40분에서 50분 정도 지난다. 일어났다 앉았다가 몇 번을 하고 나면 안 아프던 허리도 저려온다. 특히 아픈 부분은 손목이다. 바닥에서 일어날 때마다 최대한 신경 써서 손목 꺾이지 않게 지지하려고 해도 급한 마음에 대충 일어나다 보면 저릿저릿하다.


이제 빨래를 널어야 한다. 아. 귀찮아. 건조 기능을 몇 번 써보긴 했는데 시간도 오래 걸리고 전기요금이 생각보다 많이 나와서 손이 가지 않는다. 비가 많이 오는 날에 어쩔 수 없는 때만 쓰는 걸로도 충분하다. 


허리를 숙여 무거운 빨래들을 꺼내 각각의 모서리를 찾아 한두 번 털어 널다 보면 엄마 생각이 난다. 잘 털어서 널어야 옷에 구김이 생기지 않는다고 말하셨는데. 매일 계속되는 설거지와 빨래의 시간마다 엄마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언젠가 설거지하던 엄마는 심수봉의 비나리를 불렀다. 신파조로 눈물 짜는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 엄마가 비나리를 부른다는 건 참 의외였다. "생각하면 덧없는 꿈일지도 몰라"라고 조용하게 부르는 엄마의 뒷모습에 눈을 뗄 수 없었다. 그 이후 나도 꼭 싱크대에서 서면 비나리를 첫 구절을 시작한다. "큐피트 화살이 가슴을 뚫고 사랑이 시작된 날". 집안일이 신파 노래와 이토록 어울리는 건 신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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