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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kdaegeon Aug 04. 2022

무기력하면서 살고 싶었다

퇴사 이후 가장 경계했던 건 무기력이다. 침대에 누워 어떠한 방해도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 보면 마치 시공간이 멈춘듯했다. 눈을 뜨면 어두웠고 형광등은 켜고 싶지 않았다. 해야 할 연락도 없었고 하고 싶은 연락은 있었지만 급하지 않았다. 다만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다는 생각에 씁쓸한 뿐이었다.


회사를 다녔던 시간은 끊임없이 무기력을 경계하는 시간이었다. 나에게 무기력이 찾아오는 트리거는 '연속된 3일의 휴식'이다. 나를 압박하고 있는 무엇으로부터 3일 이상의 벗어남이 주어지게 되면 무기력이 나를 찾았다. 아무래도 무기력도 나를 사랑하는 것 같다. 그때 내가 가진 것은 시간이었고 아끼지 않고 무기력에 소모했다.


의미 없는 가라앉음이 싫지 않았지만 사회생활에는 큰 영향을 줬다. 사는 의미를 부질없게 만들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세상 일이 하찮아지고 인간관계는 허무해졌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는 걸 알면서도 귀찮아졌다. 


그건 사는 게 아니었다. 그게 무서워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래 5일 이상의 휴가를 내 본 적이 없다. 그것도 가족 행사가 있다거나 이사를 한다거나 등 어떤 무조건적인, 마치 일과 같은 이벤트를 끼고서야 냈다. 쉬는 게 무서웠다.


그래도 무기력과 친해지면 좋은 게 있다. 무기력이 무엇인지 안다는 것.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상황을 모르고 살아간다. 뉴턴 1법칙은 인간사에도 적용된다. 우리는 '외부로부터 힘이 작용하지 않으면 운동 상태는 변하지 않는다'는 명제에 따라 끊임없이 영향을 받으며 움직이고 있다. 그러다가 어떤 힘이 작용하지 않는 어느 찰나의 순간 대부분 무기력에 빠진다. 


그런데 문제는 신기하게도 다시 힘이 작용하면 무기력도 사라져야 하는데 존재 즉, 자신의 상태는 그대로인 채로 휩쓸리게 된다. 관성 때문이다. 소설가 이삭 디네센은 '나는 희망도 절망도 없이 매일 조금씩 쓴다'라고 했다. 이는 자신의 무기력을 발견한 이들의 자조를 대변한다. 한때 나 역시 디네센의 말을 금과옥조처럼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무기력하면서도 살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의 희망을 가지고 절망할 수 있는 소설가에게나 해당되는 말이라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무기력한 자가 희망도 절망도 없거나 아무것도 쓸 수 없다. 그저 누워있을 뿐이다. 


물론 단지 누워있다고 해서 무기력하다고 할 수 없다. 무기력은 몸의 휴식이 아니다. 그래서 무기력한 상태에서는 시간이 느리게 간다. 아무리 잠을 자도 몸의 피로가 풀리지 않는다. 운동을 잘할 수 있는 첫 단계는 '몸의 힘을 빼는 것'이다. 긴장을 풀고 몸을 가볍게 해야만 멀리, 높게, 빨리 갈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 힘을 빼기 위해서 힘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무기력한 상태에서 아무리 잠을 자도 피로가 계속되는 이유도 이와 같다. 쌓인 피로가 없는데 풀릴 피로라고 있을 리 없다. 무기력한 상태에서의 잠은 몸의 짐을 풀어내는 게 아니라 더하는 행위인 셈이다. 결과적으로 나 역시 피곤하다는 착각으로 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여전히 밤이고 더 피곤하다면 내가 무기력한 상태라고 깨닫는다. 증상의 타자화를 이렇게 쓴다.


오늘은 10시에 일어났다. 어제는 13시에 일어났고 엊그제는 15시에 일어났다. 여유롭다는 말로 표현해보지만 나 스스로 변명하자면 최선을 다해 무기력과 싸우고 있다. 무기력과 싸워야 하는 내 자질? 이 아쉽다. 무기력하게 좋게-좋게 삶을 바라보고 시간의 여유를 즐기고 싶다. 하지만 평생 그러질 못할 것 같다. 아쉽다. 아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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