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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kdaegeon Oct 27. 2022

쓰다 보니 길어진 골프 이야기

22년을 시작하면서 세웠던 큰 목표 중 하나가 '골프 재밌게 즐기기'였다. 우선은 비싼 돈 내고 치면서 스코어 스트레스 받기 싫었고 결국 즐거움은 마음가짐에 달린 것이라 제대로 즐기고 싶은 바람이 컸다.


물론 사람마다 '재밌게'라는 수식어의 모양은 다르겠지만 적어도 내겐 웃는 시간이 많았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생각해낸 게 '하나의 라운딩 18홀 전체를 모두 걸어보자'였다.


언제인지는 모르겠다. 대략 6년 정도 골프를 치면서 어느 순간 골프채로 공을 치는 행위보다는 골프장을 가고 페어웨이를 걷는 게 좋아졌다. 동반자들 만나는 것도 반가웠고 '요즘은 어떻게 지내냐'며 안부를 물어보는 것도 좋았다. 별 거 없는 나의 TMI를 굳이 물어보지 않았는데도 전하는 재미도 컸다. 또 스마트폰 없이 걷는 것이니 정신적인 해방감(?)이 들기도 했다.


물론 실력 욕심도 있었다. 사실 골프라는 스포츠는 알고 보면 상당히 체력 게임에 속한다. 보통 하나의 골프 대회 기간은 4일 동안 이뤄지고 경기를 참가한 프로선수들은 4일 내내 카트를 타지 않고 걸어서 경기에 임한다.


일반적인 골프장 18홀 전장 거리가 대략 6500야드, 6km 정도 되니까 매일 강남역~잠실역 거리를 걸어서 출근하는 셈이다. 하지만 이것도 직진 거리이고 좌우로 왔다 갔다 하는 걸 생각하면 4일 동안 족히 30km를 걸어야 하는 게 골프다.


그래서 나도 골프를 그들처럼 치기 위해 걸어보고 싶었다. 무엇보다 볼 한번 치고 카트 타고 쭉 가고 또 내려서 한번 치고 쭉 가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천천히 즐기고 싶었다.


지난주 파인스톤CC 라운딩은 18홀 전부 걷기 목표를 드디어 이뤄낸 즐거운  게임이었다.




매번 라운딩 다닐 때마다 도전했지만 이뤄내지 못했던 건 상황과 운이 받쳐주지 못해서다. 가장 중요한 건 18홀 모두 제대로 완주할 수 있는 체력과 볼을 잘 보낼 수 있는 적당한 실력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개인의 영역이다. 그냥 걸어만 가는 것이라면 오히려 쉽다. 도전 성공 여부는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상황과 운에 달렸다.


골프를 다녀보면 알게 되지만 앞팀과 뒷팀의 영향을 상당히 크게 받는다. 앞팀이 빠르면 공백이 없도록 우리도 속도를 내야 하고 뒷팀이 빠르면 쫓기게 된다. 또 느리면 딜레이 되어 라운딩 내내 기다리기만 해야 한다.


이게 한 두 홀만 그러는 게 아니라서  경기 리듬이 완전히 망가지고 기분만 상하기 일쑤다. 물론 골프장 측의 막무가내식 티타임 배정과 소몰이식 운영이 문제겠지만 골퍼 입장에서는 그저 운이 좋길 바랄 뿐이다.


동반자도 중요하다. 행여라도 신경 써야 할 초심자가 있다면 신경 쓰느라 내 플레이를 제대로 할 수 없다. 자신이 친 볼은 어디로 간지도 모르겠고 캐디는 카트 타고 가버리고 그 넓은 골프장 한가운데 서 있다 보면 누구라도 멘탈이 나가버린다. 그래서 옆에 그냥 서있기라도 줘야 한다.


또 캐디도 잘 만나야 한다. 경기 빨리 진행하겠다고 전부 카트에 태우고 가려는 캐디가 너무 많다. 서비스는 둘째치고 아쉬울 따름이다.


그래서 그동안 이런저런 이유로 실패했던 것인데 지난주 라운딩에서는 이 모든 상황과 운이 잘 풀렸다. 18홀 동안 드라이버 티샷 이후 퍼팅까지 쭉 내 두 발로 걸었다. 볼이 나가버려 벌타를 받기도 했지만 그 역시 나간 곳을 가서 다음 볼을 쳤다.


파인스톤CC 전장 길이가 6700야드니까 화이트티 기준으로 봐도 대략 6km 정도 걸었다.  마지막 2-3홀을 남기고는 정말 힘들긴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힘들다기보다는 진이 빠진다. 그러니 볼은 제멋대로 가버리고 스코어도 난장판이 됐다. 내가 볼을 보낸 곳에 가는 것과, 볼이 있는 곳에 내가 가야 하는 것의 차이는 상당히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홀 파 퍼팅 땡그랑 소리를 들었을 땐 정말 성취감이 정말 컸다. 최근 이렇게 기뻤던 적이 있을까. 특히 이번 도전 성공은 그 어떤 것들에 대한 본질을 고민한다는 것에 다시금 깨닫고 또 나의 여정에 대해 확신을 갖게 된 계기가 됐다.




골프는 볼을 쳐서 날리는 운동일까? 하지만 난 그저 그뿐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3cm 남짓의 작은 골프볼을 300m보다 먼 곳에 뚫린 구멍에 넣기 위한, 이 어이없고 비효율적인 게임은 태어나서 죽어야 하는 삶과 닮았다.


그래서 허무하기도 하다. 어떤 이들이 카트를 타고 가다가 채만 휘두르다 라운딩을 마치거나 스코어에 유독 집착하게 되는 것도 그 공허감을 외면하고 싶어서이지 않을까 싶다.


난 그게 전부가 아니라 생각했다. 골프는 몇십 번의 샷으로만 이뤄진 게 아니다. 길고 긴 페어웨이가 있다. 그리고 18홀 내내 걷기 위해 필요했던 상황과 운, 그리고 동반자가 있다.


사는 것도 그렇다. 무엇으로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은 게 있다. 그래서 그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 좋아하는 것들, 또 해야 하는 일들 등을 느껴야 한다. 기분이 좋지 않아도 기어코 버티고 가야 할 때도 있지만 그저 카트를 타듯 걷지 않고 쭉 지나쳐버리기엔 너무 소중해 아까운 게 많다.


그렇기에 힘을 내서 꿋꿋하게 걸어가야 한다는 것, 그게 중요하다는 걸 이제는 조금이나마 확신할 수 있다.


이제 곧 골프 시즌이 끝난다. 아쉽다. 이번 주 날씨도 가을 가을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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