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에세이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eokdaegeon Nov 09. 2022

신승훈의 '사랑해도 헤어질 수 있다면'을 들으며

이제 정말 난방을 시작할 때가 왔다. 보일러 밸브를 돌리고 잘 돌아가나 한동안 지켜보다가 쓸쓸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뭘 들을까 고민했는데 신승훈의 저 노래가 생각나서 적는다.


우리 삶에서 사랑의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진다. 첫 번째는 '아가페'적인 사랑이다. 이 사랑은 다소 종교적인 관점으로 신에 다가가려는 인간, 즉 신의 대리인으로서 사랑을 염원하고 또 실천한다. 말 그대로 무조건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수지'를 사랑한다고 하자. 그 사랑은 수지라는 대상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시작했으며 사랑의 조건은 수지 그 자체가 된다. 그래서 긴 생머리였던 수지가 단발머리가 되더라도, 수지가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좋아하더라도, 수지가 사기꾼이 되더라도 나는 수지를 사랑하고 사랑해야만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랑의 결정권은 상대방이 아니라 나에게 있다. 사랑의 시작도 나이고 끝 역시 나에게 달려있기 때문이다. 조건 자체가 없기 때문에 아가페의 사랑에서 사랑을 받는 대상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오직 사랑을 주는 쪽에게만 결정권이 있다. 사랑을 포기하는 것 역시 사랑하는 사람의 특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해서 헤어질 수 있다면 헤어져도 사랑할 수 있다'는 노래 가사는 애틋한 사랑의 간절함이 아니라 사랑을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는 자기 실현의 예언일 것이다. 이어 나오는 '누구라도 사랑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이 너일 수 없다'는 한탄은 어쩌면 다른 사랑을 암시하는 협박이다. 왜나면 아가페적인 사랑에서는 사랑이 끝나지 않고 사랑의 대상만이 변하기 때문이다.


이제 두 번째 사랑, '에로스'적인 사랑을 보자. 이 사랑은 욕망이다. 사랑의 행위는 소유의 개념과 닿는다. 이 사랑은 우리가 사랑을 시작하는 이유와 가장 가까운 설명이기도 하다.


네 눈이 예뻐서, 네가 단발머리라서, 네가 키가 커서, 네가 궈여워서 등등 어떤 사랑의 이유를 가진 자를 탐한다. 욕망하면서 그것을 오래 보고자, 또 탐하고자 하는 게 에로스의 사랑이다. 굳이 비교하다면, 아가페적인 사랑에서의 이유는 '네가 내 옆에 있어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기 때문에 아가페적인 사랑과는 다르게 에로스적인 사랑의 결정권은 사랑을 받는 자에게 있다. 그 이유가 사라지는 순간 사랑의 연결고리는 끊어질 테니 말이다.


적어도 우리 시대의 사랑 대부분이 이 두 가지 방식에서 사랑은 시작되고 끝난다. 하지만 정작 사랑하는 이들은 이런 이유들 따위 생각하지 않겠지.

매거진의 이전글 2022 시즌 마무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