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에세이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eokdaegeon Feb 24. 2023

아가페와 에로스에 대하여

저는 예전에 단발머리를 사랑했어요

하루의 끝에 '이 정도면 됐다'하고 사무실을 나서는 시간은 대략 새벽 2시다. 매일 그렇지 않지만 많은 날이 그렇다. 아마 오늘도 그럴 것 같다.


집으로 향하는 와중에 만나는 동부간선도로는 뻥 뚫려있다. 2차선을 타고 여유롭게 막히지 않고 운전해서 갈 수 있다. 그러고 나서 강변북로로 나오면 더 쾌적하게 달릴 수 있다. 서울 시내에서 이렇게 운전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대로 집으로 가기엔 아깝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가 나를 기다리는 그곳으로.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없다. 그 없음의 끝, 그러니까 이런 감정이 외로움이라는 걸 최근에야 인정했다. 그랬다. 나는 외롭다.


외로움은 사랑을 하고 싶다는 욕망을 부른다. 외로움을 푼다는 걸 굳이 섹스로 비유할 순 없겠지만 몸의 온도를 느끼는 행위는 외로움을 잠시나마 없애준다. 그래서 처음에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그냥 섹스가 하고 싶은 거 아닌가'라는 의심도 들었다. 물론 모든 사랑이 섹스일 순 없겠지만, 나는 섹스 역시 사랑이라고 여기는 부류니까.


사랑을 굳이 나누자면,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아가페적인 사랑과, 에로스적인 사랑이다. 먼저 아가페는 상대방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 내가 '혜정'이라는 사람과 사귄다고 하자. 그렇다는 나는 혜정의 머릿결을 사랑하고, 혜정의 신발을 사랑하고, 혜정이 만든 맛없는 요리를 사랑한다.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사랑의 대상이 사람을 죽이든 뭘 하더라도 사랑하는 것이다.


이럴 경우 사랑의 시작은 알 수 없는 직감에 끌려 시작할 때가 많다.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이 그저 그 사람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가페의 사랑은 사실 끝이라는 게 없다. 사랑해도 헤어질 있다면 헤어져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게 아가페적인 사랑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말을 하는 사람의 사랑을 굳이 분류하자면 아가페적인 사랑이다.


물론 나는 그게 개소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에로스적인 사랑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에로스적인 사랑은 사랑의 이유가 명확하다. 나는 단발머리라면 사랑의 감정이 피어난다. 지인은 다리가 자신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집착과 비슷한 페티시적인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여하튼 이게 에로스적인 사랑이다.


그래서 그 명확한 사랑의 이유가 사라지게 되면 사랑도 사라진다. 자두의 '대화가 필요해'라는 노래 가사 중에 이런 부분이 나온다.

너의 관심 끌고 싶어서 내 정든 긴 머리 짧게 치고서 웨이브 줬더니 한심스러운 너의 목소리 나이 들어 보여 (난 너의 긴 머리 때문에 너를 좋아했는데)

사랑이라는 게 한 번에 딱 끊을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사랑을 시작하게 되면 그 단발머리가 같은 계기가 되는 이유 말고도 또 다른 이유가 생기기 때문에 이유가 없어졌다고 해도 곧장 헤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에로스의 사랑은 끝나고 만다. 아마 그 이후로는 아가페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신승훈의 '사랑해도 헤어질 수 있다면'을 들으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