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은 삶과 닮았다
등산은 내 첫 운동 취미였다.
운동에는 젬병이다. 항상 그랬다. 운동이 취미였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3개월 이상 한 운동을 꾸준히 한 경우도 거의 손에 꼽을 정도일거다. 달리기, 칼소폭, 홈트, 크로스핏, 복싱, 헬스, 필라테스, 걷기, 달리기 등 20대와 30대를 통틀어 몇개월간 지속했던 운동 습관 중에서 그나마 오래 했던 것은 걷기였다. 그것도 집 옆에 호수공원이 있다는 최적의 조건 속에서 가능했던 거였다.
그러니 등산을 취미로 가져볼 생각을 한 적은 당연히 없다. 그것이, 2019년 여름과 가을 사이의 어느 날 친구가 가볍게 등산을 가자며 북한산으로 부르기 전까지는 말이다. 꽤나 더운 날씨였나보다. 반팔과 반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북한산에 입산한 나는 '이 친구가 나를 죽이고 싶어서 안달났구나'라는 결론을 내렸다. "대학원에서 고생하던 박사생, 북한산에서 비관 자살"이라는 기사 제목이 떠오르고 머리가 핑핑 도는 가운데 '산행이 좋다'라는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물론 내려오고 나니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운동은 이제 생존의 문제라는 것을 조금씩 깨닫게 되는 30대, 나는 머리로나마 어떻게 운동을 습관화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이번에 투자해서 빡세게 해볼까'라는 결심은 항상 헬스장 사장님에게 기부하는 일이라는 것을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었고, '재미 있는 것만 습관이 된다'라는 진리를 어렴풋이나마 파악하고 있던 시기였다.
어차피 팀스포츠는 중학교 시절 강제로 수비수로 끌려나가 친구들과 축구장에서 잡담하던 시절 이후에는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다. 미국의 고등학교 시절에 육상부에서 장거리 달리기를 해본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스포츠 동아리 경험이었다. 혼자 재미있게 할 수 있고 금방 그만두지 않을 정도의 난이도에 다른 사람과도 함께 할 수 있는 저비용의 스포츠, 어디 없을까?
걷기, 달리기, 등산, 수영, 배드민턴, 탁구 정도가 아닐까? 수영은 20대 이후에 정기적으로 해본적이 없고, 탁구를 마지막으로 즐겼던 것은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마을문고의 한켠에 설치된 탁구대에서 친구들과 별 생쇼를 하며 그때는 왜 그렇게 즐거웠는지. 배드민턴은 학교 수업시간을 빼면 가족과 함께 타의반 이상으로 끌려나가 해본 기억만 남아있다.
등산이라면 나와 결이 맞는 취미일 것 같다. 명산 돌아다니며 여행도 하고, 구경도 하고, 무엇보다 등산 후에는 맛있는 것을 먹고 마실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원래 산에 오르는 이유는 맛난 것을 먹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아마 그래서였던 것 같다. 등산이 유일하게 꾸준한 운동 습관으로 자리잡았던 것은.
등산 11회.
북악산, 광교산, 설악산, 한라산, 치악산, 청계산, 무등산, 지리산.
2019년 11월부터 사용했던 앱에 남아 있는 기록이다. 친구와 갔던 북한산, 북악산, 인왕산과 가까워서 조금 더 자주 갔던 광교산을 합치면 아마 20회 정도 되지 않을까. 약 2년간의 등산 기록으로 어떤지 모르겠지만 조금 인심을 쓰자면 1달에 1번 등반한 꼴이고 어디가서 '취미가 뭐에요?'라는 질문에 등산을 끼워넣을 정도로 좋아하기는 한다는 것으로 자위를 해본다.
변명이라면 사실 나는 작년 내내 족저근막염으로 고통받았던 사람이다. 1월 제주도에서 한라산에 오른 이후에 왼쪽 발바닥이 이유없이 아팠고, 별 생각없이 살았다. 덕분에 2021년에는 산에 올랐던 적이 거의 없다. 중순 쯤 찾아간 병원에서 진단과 바가지를 한꺼번에 받은 후에 스케쳐스 신발을 사고 집과 회사에서도 슬리퍼를 신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렇게 족저근막염에도, 등산에도 신경을 끄고 살았던 반년이 지난 후, 돌연 생각이 스쳤다.
아 이제 다시 등산해도 되겠네!
항상 등산을 같이하던 친구는 요즘 매우 바쁘기 때문에 자연히 광교산을 택했다. 상행에 약 1시간 정도가 걸리는 형제봉을 언제 마지막으로 올랐는지도 가물가물한 상황. 한창 이제 나에게도 운동 취미가 생겼다며 신난 마음에 모아둔 등산 용품을 한아름 입고 메고 신고 산으로 향했다. 램블러라는 앱으로 산행 기록을 남기는 일도 잊지 않았다. 뇌가 타버린 나한테는 기록만이 살길이니까.
정말 오랜만에 산행이고 칼소폭을 거른지도 오래되서 평이한 산길도 나에게는 힘들게 느껴지는 여정, 산을 오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등산을 제외한다면,
내 일상에서 2시간 분량의 사유를
할 수 있는 기회는 없는 것이 아닐까?
긴 호흡의 읽기, 쓰기, 등산을 제외한다면 2시간동안 핸드폰과 인터넷의 방해를 받지 않고 오롯이 내 머리로 삶을 경험하고 그 감정과 생각의 흐름을 찬찬히 뜯어볼 시간은 내 일상에서는 없다. 언젠가 별다른 이유가 없는데도 핸드폰을 보는 것이 너무 당연해져버렸고,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자기 전에 하는 행동도 핸드폰을 보는 일이다. 뇌가 타버리고 글의 흐름이 엉망이고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이유는 아마 핸드폰과 알람설정 탓인지도 모른다.
이쯤되면 등산은 내 생애 첫 운동 취미라는 위상에서 더욱 위대한 자리에 등극하게 된다. 2시간 이상 분량의 삶과 사유의 경험을 하게 해주는 유일한 창구. 어찌보면 내가 가장 나다울 수 있는 시간일수도 있다. 나야 맥락에서 떨어져서 없는 것, 부족한 것, 너무 빠른 것을 지켜보며 내가 공헌할 지점을 파악하는 '저격수'이자 콘트라딕토리안(contradictorian)이 아닌가. 삶의 모든 지겹고 번거로운 맥락에서 벗어나 오롯이 나일 수 있는 시간은 삶의 활력소라기보다는 그냥 삶 그 자체가 아닌가.
생각해보면 등산하며 나눴던 대화와 정리했던 생각, 등산 후에 읽었던 책이 조금 더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 것 같다. 등산과 여행 후에 감상을 글로 남긴 적도 꽤나 많았다. 브런치에는 올리지도 못했고 에버노트, 노션, 삼성노트에 흩어져있는 그 기록들도 어쨋든 지금 희미한 기억으로만 남아있는 귀중한 내 삶의 연보다.
등산은 나에게 무슨 의미인가?
너무 좌뇌적인 질문일 수도 있겠다. 등산의 '의미'보다는 등산 경험이 나에게 준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한결 편하리라.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옮기며 던지는 질문에 내 마음은 내가 산행에서 본 것, 느낀 것, 배운 것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설악산 울산바위를 오르던 날이었다. 쌀쌀한 바람이 불던 초겨울, 날씨가 걱정되어 입고 갔던 초록색 몽벨 패딩은 땀에 젖어 허리춤에 묶고 끝도 없는 계단을 올라가던 산행이었다. 큰 바위의 한 구석에 숨어 명상하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던 경험. 이날에는 '등산은 속죄다'고 생각했다. 유독 뒷심이 약해 뭔가를 끝까지 마치기를 어려워했던 나 같은 사람이 고통받으면서도 끝까지 완주할 수 있는 것이 등산이라고. 대학원을 비롯해 내가 끝내지 못했던 일들을 생각하며 갈무리하게 해주는 여정이라고. 숨이 가쁘면 쉴수도 있고 잠시 앉아 물을 마시며 멍하니 풍경을 바라볼수도 있어서 좋은 취미라고. 그날따라 바위가 수묵화처럼, 일러스트처럼 보이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한겨울에 눈이 펑펑 내리는 날 한라산을 오를 때도 비슷한 생각이 떠올랐다. 겨울왕국을 무한 재생하며 차라리 춥고 힘들어서 더 좋았던 산행. 컵라면과 온수를 가져와 먹던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웠던 시간이었다.
설악산과 한라산의 풍경과 경험이 떠오르며, 등산은 삶을 닮아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하루키는 글쓰기와 인생에 대해서 달리기에서 배웠다고 하는데, 오히려 달리기는 협소하고 자폐적이며 성과중심적인 근대인의 삶과 닮아 있는 것이 아닐까? 자신의 여정을 선택해 한 걸음, 한 고개를 넘어가며 서사를 만들어가는 등산의 여정이야말로 인간이 살아야 할 삶을 잘 드러내주고 있는 메타포는 아닐까.
달리기는 처음과 끝이 인위적으로 정해져있다. 왜 A라는 지점에서 출발해 B라는 지점까지 달려야 하는지, 왜 100미터를 달려야하는지, 왜 몇초안에 달려야 하는지, 왜 동행보다 더 빨리 달려야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냥 누군가가 '달리기란 원래 이런 것'이라며 정해둔 규칙들이다. '자, 제일 빠른 사람만 뽑아서 상을 줄테니 한번 달려보시죠!'라는 명령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달리기를 잘하는 사람이다. '왜 달려야 하나요?' '왜 기록을 깨야 하죠?' '왜 저기서 달려야 하는 것인지 설명해줄 수 있나요?'하며 딴지를 거는 사람은 도태된다.
이렇게 보면 달리기는 근대적이다. 달리기 선수는 왜 무엇을 해야하는지 모른채 월급, 성과, 인정을 위해 영혼을 저당잡히는 근대적 회사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삶이란 누군가가 정해둔 구간을 누군가가 정해둔 규칙에 따라 더 빨리 달리고 더 달려 보상을 받는 경주와 다르지 않다. 왜 일해야 하는지, 이 성과는 누구의 삶을 더 낫게 만드는지, 나는 도대체 뭘 하는 사람인지에 대한 질문은 삶을 도태시키고 어렵게 할 뿐이다.
달리기가 근대적이라면 등산은 전근대적이거나 초근대적이다. 산은 누가 만들어 둔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 자연이 주조했으나 계속 풍화되고 변화할 산은 지구의 풍경 그 자체다. 등산가는 자신의 이야기에 맞게 산을 선택한다. 상쾌한 기분 전환을 위해 뒷산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고, 100대 명산을 모두 등반하기 위해 하나씩 다니는 사람도 있으며, 멋도 모르고 친구에게 끌려나와 북한산에서 죽음의 위협을 느끼는 불쌍한 등반가도 있다.
등산에도 규칙이 있고 비싸거나 비싸지 않은 장비가 있고, 누군가 이미 정해고 측정해둔 등산로가 있다. 그러나 등산가는 동료들을 모아 자유롭게 등반한다. 산은 내가,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다. 힘들면 돌아가거나 쉬어도 된다. 어느 산을 몇시간 안에 주파했노라고 으스대는 등산가를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등산의 '성과'는 그 자체이며, 굳이 말하자면 하산 후에 함께 먹고 마시는 좋은 음식과 대화다.
등산을 왜 하는 것인지, 등산이 나에게 말해주고 싶은 것인지 무엇인지 묻는 엉뚱한 등산가에게 산은 삶의 진리를 알려준다. 다른 등산가와 자신을 비교하는 일은 미친 짓이라고. 그냥 오르고 싶은만큼 오르고, 힘들 때 쉬고, 지금 이 순간 느끼는 감정과 생각에 오롯히 집중하면 된다고. 지금 이 풍경을 기록에 남기라고. 정상의 풍경이 아름답지만 산에 숨겨진 아름다움은 무한하다고.
산은 오르는 자에게 삶의 진리를 아낌없이 나눠준다. 길을 묻는 나에게 산은 정해진 길 따위는 없다고, 네가 만들어가면 된다고, 정상에 올라가지 않아도 삶은 아름답다고 말해준다.
생각해보면, 내가 배운 삶의 진리들은 대부분 삶이 등 뒤에 숨겨놓았던 망치로 머리를 호되게 맞는 경험에서 나왔다. 지금에서야 더 확실해졌지만, 뿅망치가 아닌 쇠망치로 '뚝배기를 깨며' 삶은 꼭 가르쳐주고 싶었던 무엇이 있었던 것 같다.
산은 망치로 나를 가르친 적이 없다. 삶이 때로는 친절하게, 때로는 호되게 가르치는 교사라면 산은 인자하게 기다리고 있는 할머니 같은 존재다.
올해 내가 오를 산에서는 얼마나 더 깊은 통찰과 교훈을 얻을 수 있을지 기대된다. 산에서 삶의 정수를 뽑아 더 나은 인간이 되기를 고대한다. 언젠가는 초행길의 등산가에게 친절하게 말과 물을 건낼 수 있는 노련한 등산가가 되어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