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스타트업> 감상
에릭 리스의 <린스타트업>은 비즈니스에 과학적 방법론(the scientific method)을 적용한 사례로 해석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과학은 모든 주장을 가설이라고 보고 있으며, 현재 통용되는 패러다임의 맥락 안에서 가장 양질의 지식을 생산하기 위해 노력한다. 기존의 가설을 검증하거나 반증하기도 하고, 모수 안의 새로운 샘플을 들여오기도 하고, 주장의 전제에 있는 이론이나 개념을 비판하기도 한다. ‘모든 가설은 검증되지 않으며 잠정적으로 받아들여질 뿐이며 더 탄탄하게 실증된 다음 가설을 기다릴 뿐이다’라는 것이 과학적 방법론의 원칙이다. 요컨대, 과학은 지식의 잠정성과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받아들인 지식 생산체계다.
과학이 지식 생산체계라면, 비즈니스는 가치 생산체계다. 제품이나 서비스라는 형태로 다수의 고객에게 실질적인 가치를 구현해야 하며, 실현된 고객 가치는 부라는 형태로 비즈니스에게 돌아온다. 문제는, 고객이 어떤 문제를 겪고 있으며 어떤 제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지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과학은 보편적 지식을 추구하기에, ‘A라는 방식의 영어교육 수업이 B 방식보다 효과적인가?’라는 질문을 대답할 수는 있다. 그러나 ‘한국의 고등학생은 영어 교육에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으며 어떤 제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직접적인 대답은 할 수 없다. ‘보편적 지식 추구’라는 프레임워크 안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린스타트업>은 비즈니스의 상황이 매우 빠르게 변화할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쌓여있는 지식이 무의미할 정도로 불확실성이 크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영어교육에서 특정 방법론을 선택한 학원이나 인터넷 강의 사이트들이 돈방석에 앉았다는 사실은, 앞으로 고객이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차라리 현재의 고객들에게 제품의 기본 형태를 보여주고 어떤 가치를 느끼는지, 구매 의사가 있는지 묻는 것이 더 빠르다.
<린스타트업>은 Build Measure Learn(BML)이라는 시퀀스를 가진 비즈니스의 ‘학습 방법론’이다. 에릭 리스가 논한 점들을 요약, 수정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불확실한 비즈니스 환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장과 고객의 반응이다.
- 시간과 비용을 아끼기 위해서는 시장조사나 완전한 제품을 만드는데 시간을 쓰는 것이 아니라 최소기능제품(MVP)을 만들어 고객의 반응을 조사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 MVP를 테스트할 때는 가장 취약한 가설을 먼저 검증한다. 예) 이 제품에 구매 의사를 가진 사람이 있는가?
- MVP 테스트에는 반드시 선행 가설을 가지고 ‘무엇을 어떻게 검증할지’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초기에야 완전히 탐색적인 목적으로 프로토타입을 만들 수는 있겠지만 만드는데 수개월이 들어가는 MVP에서 최대한의 학습을 뽑아내려면 가설이 필요하다.
- 가설에 따라 수정해 다음 제품을 출시하고 고객의 반응을 살핀다.
필자의 생각에 <린스타트업>의 핵심은 속도가 아니라 학습이다. 많은 이들이 MVP를 빠르게 만들어 테스트한다는 것만을 목표로 삼고 ‘아무런 생각 없이’ 제품을 만드는 경우가 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MVP를 빠르게 만드는 것만큼이나 MVP 테스트에서 시장과 고객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의 뇌는 질문이 없으면 배우지 못한다. 가설이 없다면 결과를 해석하기 어렵고 팀의 논쟁이 길게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린스타트업>의 학습 사이클에 가장 중요한 것은, 역설적으로 비과학적이거나 전과학적(pre-scientific) 직감, 질문, 가설 등이다.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을 기반으로 사람들은 이런 제품은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는 비전이 비즈니스를 가이드한다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 에릭 리스의 <린스타트업>은 소프트웨어 개발 방법론에 가깝고 비즈니스의 미션이나 비전에 대한 언급은 드물다. 반면 <제로 투 원>의 피터 틸은 비즈니스에는 방법론뿐만 아니라 거대한 비전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피터 틸에게 비전은 ‘기술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열망’이며, 실리콘밸리 기술 창업자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필자는 린스타트업이라는 ‘how-to’는, 인간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겠다는 비전 즉 ‘why’라는 요소가 가이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모든 놀랄만한 신기술이 인간의 삶을 개선하는 것은 아니다. 세그웨이나 구글 글라스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인간에게 이 물건이 왜 필요한가? 인간은 이 물건으로 어떻게 경험과 삶이 개선되는가?’라는 질문이 없다면 기술은 고철덩어리나 코드 덩어리에 다름 아니다.
게다가 ESG가 투자의 메가트렌드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오늘날, 기술이 넓은 의미의 인류에 무해하고 유익한지에 대한 고민을 가지고 있고, 비전을 가진 인간이 사용하는 린방법론은 조금 다른 결과를 가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비전이 없다면 MVP 테스트 결과를 해석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고, 팀의 소모적인 논쟁으로 개발 과정이 어려워질 수 있다. 비전이 없다면 만들어놓은 프로덕트가 인간에게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다. <소셜 딜레마>에서 지적하는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의 문제점이 그 예시가 될 수 있다.
‘좋은 비즈니스’에는 비전과 린한 방법론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 조합은 비즈니스에만 적용될까? 변화가 빠르고 불확실한 상황에서 기업 경영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 ‘빠른 학습을 통한 방향 전환’은 매우 중요해지고 있다. 정치, 교육, 그리고 커리어의 관점에서 린 방법론이 적용될 수 있으며, 유용한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치의 영역에서, 불필요한 논쟁보다는 논쟁의 대상이 되는 정책모델을 빠르게 실험해 데이터를 얻어낼 수 있다. 교육에서도 교수법이나 모델, 수업 주제와 같은 것들을 테스트하고 개선해 학습한 후에 더 좋은 것을 만들어내는 방법론을 취할 수 있다. 개인의 커리어도 마찬가지다. 본인과 맞는 일을 찾기 위해서 경험보다 더 좋은 교사는 없다. 자신의 역량과 욕망에 대한 질문과 가설을 가지고 다양한 직무를 빠르게 경험하며 적절한 방법을 찾아가는 전술을 통해 고민을 줄일 수 있다.
다만 경영, 정치, 교육, 커리어가 모두 린하기 위해서는 ‘시행착오를 과정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문화’가 매우 중요하다. 문제를 예측하거나 사전에 분석하는 일은 변화가 매우 빠른 맥락에서는 불가능하거나 비효율적이며 인간은 모든 영역에서 시도하고, 실패하고, 배워서 더 성장하는 존재라는 점에 대한 학습이 필요하다. 물론 이 학습도 린하게, 즉 실패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문화가 시행착오를 겪으며 급성장하는 다양한 주체를 바라보며 배우고 또 배우는 과정에서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