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관한 소고 3
죽음에 관한 세 번째 소고, 지금 시작합니다. 종교에서 종종 언급되는 삶이 꿈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다뤄봤습니다. 천천히 읽어주세요~
숨이 서서히 멎어가는, 다시 말해 임종을 맞이하는 순간에서야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나간 세월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면서 삶이 그저 기나긴 꿈 한 편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아차린다. 삶을 더 이상 지속시킬 수 있는 단 한 줌의 여력조차 남아있지 않을 때야 비로소 삶을 향한 집착과 애욕을 내려놓는다. 그것은 자발적이고 의식적인 죽음이 아니기 때문에 삶을 향한 미련으로 얼룩져 있다. 한평생 동안 마음의 하인으로서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쫓는 데에 급급했던 나날들을 뒤로하고 세상 속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억울함을 호소해 보지만, 허공 속의 메아리는 삽시간에 흩어져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삶이 꿈임을 모르더라도 삶이 꿈인 것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제 아무리 세상 속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간 이들도 혹은 천하를 재패한 이들도 혹은 엄청 고단한 운명을 짊어진 이들도 죽음 앞에서는 한없이 평등하다. 또 다른 죽음의 매력은 현재 살아 숨 쉬고 있는 이 순간의 생생함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어린 시절에 잃어버린 줄만 알았던 삶을 향한 감사함과 생명의 기적을 일깨워준다는 데에 있다. 그것은 이유 없는 환희이며, 대상 없는 즐거움이다. 죽음은 마음의 초점을 과거와 미래라는 상상 속에 얽매이지 않게 만들어 오직 이 순간에 온전히 몰입시켜 준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일은 진정으로 자유와 사랑을 삶 속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이들이 해야 할 최우선순위의 의무다. 죽음을 거부하면, 결국 그대는 죽음에게 잡아먹힌다. 죽음은 도망가는 자에게는 냉정하고 엄격한 폭군이지만,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생명의 비밀을 알려주는 친절한 생의 안내자다.
죽음은 언제나 갑자기, 예고 없이 찾아온다. 우리들은 이러한 죽음의 변덕스러움을 매우 불쾌하고 회피하고 싶은 대상으로 여기지만, 영원히 이어지는 삶을 사는 일 또한 견딜 수 없는 기억의 축적으로 인한 고통이 있다. 영원히 사는 것 또한 고통이고,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것 또한 고통이라면 우리들은 결국 고통으로 이어지는 길 밖에 선택할 수 없다고 여길 수 있다. 하지만 고통조차도 꿈에서 일어난 일임을 깨닫는다면, 고통은 견딜만한 것이 될 뿐만 아니라 삶을 생생히 체험하게 해주는 매개체가 되기도 한다.
죽음을 억압하고 부정하며, 일방적으로 나쁜 것이라고 매도한 결과에 따른 부작용을 우리들은 사회 곳곳에서 맞이하고 있다. 현시대를 아우르는 대중문화들이 폭력적이고 지배적인 성향을 보이며, 성적인 것으로 얼룩진 이유는 다름 아닌 죽음이 갖고 있는 파괴적인 면모가 제대로 쓰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난 시대에 평화를 진정으로 도모하고자 한다면, 쉼 없이 재잘거리는 마음을 다스리는 훈련이 체계적으로 행해져야 한다. 죽음이 지니고 있는 파괴적인 에너지가 개별적 인격을 이루고 있는 자아의 해체와 분열에 쓰일 때, 마음 안에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을 억압하지 않고서 마음을 다스릴 수 있게 된다. 꿈이 꿈이라는 것을 모르면, 삶은 고통의 바다로 점철되어 있다. 행운처럼 받아들여지던 사건은 언제나 불행의 씨앗을 그 속에 품고 있고, 느닷없이 찾아오는 죽음 앞에서 우리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한 채 절규와 회한으로 울부짖는다. 그제야 한탄과 울분 섞인 목소리로 삶을 탓해보지만, 모든 일의 책임은 스스로에 대한 무관심,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깊이 성찰해보지 않은 그대의 잘못일 따름이다. 삶이라는 꿈에서 깨는 일은 선택을 가장하고 있는 중대한 의무이자 책임이다.
" 삶이 그대를 떠나기 전에, 그대가 먼저 삶을 떠나라. 진정으로 삶을 내려놓을 때, 삶의 축복이 죽음을 통해 흘러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