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 쓰는 연금술사 Jul 12. 2024

#14. 사랑ing X 이별ing 2

아직 사랑한다면...

모두가 거짓말이에요. 사진은 슬픈 순간을 너무 아름답게 찍어요. 사진 속 사람들은 너무 슬프고 괴로운데도.

                                                         - 영화 클로저 중에서




문득 잠에서 깼을 때는 석양이 꽃봉오리처럼 막 노오란 빛을 틔우려 하고 있었다.

계란 후라이의 노란 자위가 노릇노릇 익듯이 새침한 노을에 이끌려 작은 가방에 카메라 하나만 넣고 서둘러 호텔을 나왔다.

그리고 사진을 인화할만한 사진관을 찾아 마을을 돌았다.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마을이지만 대부분 디지털카메라로 사진을 찍기 때문에 사진을 인화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생각보다 사진관을 찾기가 어려웠다.

식료품 가게 들러 물을 한 병 사며 사진을 인화할만한 곳을 물었다.

다행히 사진을 인화할만한 가게가 있다고 했다.

마을 끝쪽에 있는 복사집에 가보라고 했다.

도착한 복사집은 온갖 잡화를 판매하는 잡화점이라 사진을 인화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을 못하고 지나쳤던 상점이었다.

거기서 보통 사이즈로 사진을 몇 장 인화할 수 있었다.

상점 직원은 포토 프린터로 인화한 사진을 얇은 비닐에 넣어주었다.


그 소녀를 만났던 노상 쌀국숫집을 찾아갔으나 한참 저녁 손님이 많을 5시경이었는데도

벌써 문은 닫혀있었다.  

나는 하릴없이 마을을 다시 돌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호이안은 아침과 낮에 봤던 풍경과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작은 마을은 온통 등불축제라도 하는 것처럼 화려하게 화장을 하고 사람들을 들뜨게 하고 있었다.

집집마다, 거리마다 화려한 등불에 불이 들어왔고 그 등불이 강에 비쳐 마을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등불인 것 같았다.

나는 모든 시름을 잊고 풍경에 빠져들었다.


오래된 마을은 마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도깨비 마을 같았다.

낮에는 지극히 평범하고 조용했던 마을이 어둠이 깔리자 화려한 축제의 마을로 변한 것이다.

어디서 나타난 건지 사람들이 골목골목, 거리마다 가득했고 길 위에서는 온갖 먹거리와 등불을 판매하는

*아이들과 노인들로 북적거렸다.

강 위로 관광객들이 소원을 기원하는 작은 배를 타고 강에 소원초를 띄우고 있었다.

강가에는 아이들, 노인들이 소원 초를 팔고 있었다.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다가 한쪽에서 소원초를 파는 할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정확하게는 그 할머니 곁에 있는 아침에 만났던 소녀가 놀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안녕."

내가 다가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아이는 나를 보자 커다라 눈이 더욱 커지면서, 반짝였다.

기대로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아침에 약속했던 것 기억나세요? 사진 말이에요."

"잠시만."

나는 가방을 뒤적여 방금 인화한 사진을 소녀에게 건넸다.

소녀는 깡충깡충 뛰며 할머니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자랑했다.

"할머니. 이 한국 아저씨가 사진을 찍어줬어요. 아빠가 집에 오면 보여줄 거예요. 언제 집에 가요?"

할머니는 주름진 얼굴로 빙긋이 웃으며 나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나는 기뻐하는 소녀를 보며 할머니에게 소원초를 하나 샀다.

그리고 초에 불을 붙인 후 가만히 그녀를 위해 소원을 빌었다.  


'잘 살아라. 아프지 말고, 힘들지 말고 살아라.
이젠 독하게 살지 말고 편안하게 살아라.
삶이 당신을 그렇게 꽃길로 이끌지 않더라도
스스로 제비꽃이 되어 꽃잎처럼 하늘거리면서 살아라.'


그리고 소원초를 강 위에 띄워 보냈다.

그렇게 그녀에 대한 마지막 미련이 강물을 따라 멀리 떠내려가는 것 같았다.

저 소원초는 강의 흐름을 따라 흘러 흘러 어딘가에 닿아 가라앉겠지.

나의 마음도 그렇게 시간의 흐름을 따라 흘러 흘러 언젠가는 깊이깊이 가라앉겠지.

그런 생각이 들자 눈동자네 촉촉한 물기가 맺혔다.


소녀는 아직 할머니가 좀 더 소원초를 팔아야 한다는 말에 실망하면서도

사진 한 장을 들고 기운 넘치게 뛰어다녔다.

그리고 나에게 함께 마을을 돌자고 했다.

할머니는 아저씨 귀찮게 하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오히려 좋다고 할머니를 안심시켰다.

가까운 곳을 한 바퀴 돌고 오겠노라고 했다.

할머니는 연신 고맙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소녀는 신이 나서 한 손에는 곰돌이 인형과 다른 한 손에는 사진을 쥐고 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걸었다.

일곱살 소녀의 발걸음은 강물처럼 가벼웠고 걸음마다 강물이 흐르듯 찰랑찰랑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우리는 길에서 파는 반짱이라는 빵도 사 먹고, 대패 아이스크림도 먹으면서 신나게 동네를 걸었다.

오랜만에 유쾌한 기분이었다.

재잘거리는 아이의 말을 다 이해할 수없었지만 소녀는 그날이 생애 최고의 날인 양

내 앞으로 뛰어갔다가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가를 반복하면 까르르 웃었다.


그녀도 나를 만나면 언제나 수다쟁이가 되었는데...

어설픈 발음과 문법에도 안 맞는 말들을 소녀처럼 천진하게 쏟아 냈었는데...


호이안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 모든 풍경은 그녀를 담고 있었다.

어느 풍경이건 사람이건 만나는 모든 것이 그녀를 연상시켰고 그녀와 연결되어 있었다.

등불의 화려함에 취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마을을 돌아 다시 할머니가 있는 자리로 돌아왔다.

할머니는 여전히 수북이 쌓인 소원초를 바라보더니,

이제 아버지가 집에 왔을 것 같다면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소녀는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할머니, 내 곰인형 못 봤어요? 아저씨 내 곰인형이 안 보여요."


그랬다.

분명 마을 산책을 시작할 때는 한 손에 곰인형, 한 손엔 사진이 들려있었는데

지금은 사진 한 장만 바람에 살랑이고 있었다.

아이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 것처럼 큰 눈을 깜빡이며 연신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나는 어차피 낡아서 못쓸 것 같으니 새 곰인형으로 사주겠다고 말했다.

그 말이 오히려 소녀의 눈물샘을 터트리게 했다.

결국 그녀는 굵은 눈물을 흘리며 꺼이 꺼이 소리 내어 울었다.


"새 곰인형은 싫어요. 그 인형은 우리 오빠가 사준 거라고요. 오빠는 그 곰인형이 오빠 대신에 나와 우리 가족을 돌봐줄 거라고 했단 말이에요. 새 인형에는 오빠 냄새가 안 난다고요."


서럽게 우는 아이를 바라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모든 인형이 다 똑같다고 생각했다.

어떤 인형이든 그게 그것이라고 착각했다.

오히려 낡은 인형보다 깨끗하고 새로운 인형이 더 매력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빠가 인형을 살 수 있게 월급을 받는 날, 그리고 그 시간이 5분만 늦었어도 하나 뿐이 그 인형을 살수 없게 되었을지도 모를 타이밍, 그 곰인형을 파는 가게가 아닌 다른 가게에 갔다면 아마 다른 인형을 사게 되었을 반복된 선택의 우연.

그렇게 연속되는 우연이 겹쳐고 겹친 우연의 인형은,

이제 반드시 그 인형이어야 한다는 운명의 인형으로 바뀌어 있었다.

사랑은 꼭 그 사람일 필요가 없는 우연을, 반드시 그 사람이어야 하는 운명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녀가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아왔든, 학력과 삶의 배경이 어떠하든

내게 더 화려한 어떤 사람보다 반드시 그녀여야 하는 이유가 수천수만 가지도 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아이에게 울지 말고 기다리라고 말한 후 함께 걸었던 길을 따라

눈알이 빠지고 어깨가 찢어진 곰인형을 찾기 시작했다.

다행히 얼마 가지 않아 반짱을 먹었던 노점상 쓰레기통에서 그 곰인형을 찾을 수 있었다.

아마 가게 주인이 낡은 곰인형을 버린 줄 알고 쓰레기통에 던져버린 모양이다.

나는 너무 기뻐서 곰인형을 꺼내서 꼭 안았다.

소녀의 오빠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가족을 사랑하고 동생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가득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그 느낌은 세상의 아무리 좋고 비싼 곰인형이라고 해도 흉내 낼 수 없는 진심어린 사랑의 느낌이었다.


나는 그 곰인형을 들고 근처에 있는 옷가게로 무작정 들어갔다.

아오자이를 수선하거나 만들어 파는 가게였다.

가게 주인은 재봉기 앞에서 고운 아오자이에 꽃무늬 자수를 놓고 있었다.

나는 주인에게 곰돌이의 눈알과 찢어진 팔을 꿰매 줄 수 있는지 물었다.

주인은 이 낡아빠진 인형을 뭣하러 수선하려고 하는지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똑같은 눈알은 없으니 비슷한 크기의 단추로 대신하고, 찢어진 어깨엔 솜을 조금 더 넣어 꿰매 줄 수 있다고 했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기다리고 있을 아이를 생각하니 마음이 급했다.


서둘러 수선을 부탁하고 기다리는 동안 다시 생각에 잠겼다.

나는 어떤 사랑을 꿈꾸고 있는 걸까?

언제든, 누구든 대체 가능한 화려한 새 인형 같은 사랑일까?

낡고 초라하지만 내게 우주보다 큰 의미를 지닌 대체 불가능한 사랑일까?

늘 불안했고 쉽게 포기했던 내 사랑들을 뒤로하고 용기를 내어 삶을 결정할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해야 할 일들이 분명해지는 것 같았다.


외눈에서 짝짝이 눈이 된 곰돌이 인형이 매끈해진 어깨를 들썩이며 드디어 소녀의 품에 안겼다.

아직도 촉촉하게 젖은 아이의 눈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곰인형이 가득 담겨있었다.




*아이들


지난 4월 7일, 호찌민 경찰서에 두 여자 아이가 사라졌다는 신고가 접수되었다.

실종된 아이는 각각 3살과 7살로, 한 젊은 여성이 아이들에게 접근했다는 목격자의 증언이 유일한 단서였다.


아이들의 어머니 응우옌 티 찌(27세)는 매일 오후 자녀 4명과 함께 사탕을 팔았다. 그녀는 10살 된 딸과 9개월 된 아이를 호찌민 인민위원회 앞 거리에 두고, 실종된 두 아이는 건너편의 응우옌 후에 거리에서 사탕을 팔게 했다. 그러나 이 아이들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안타깝게도 어머니는 아이들이 사라진 지 4일이 지나서야 실종 신고를 했다.


호찌민시 1군의 거리에서 사탕을 팔던 이 두 아이의 실종 사건은 경찰 200여명이 투입된 수색 끝에 42시간 만에 해결되었다. 두 아이는 한 고급 아파트에서 21세 여성과 함께 발견되었다. 이 여성은 "돈과 간식을 주겠다"며 아이들을 유인해 납치했다고 자백했다. 그녀는 "집에서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데려갔다"고 진술했다. 다행히 아이들은 무사히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갔다.

거리로 내몰리는 아이들

베트남에서는 2014년에야 처음으로 전국 아동 노동 실태 조사가 이루어졌다. 2016년 베트남 노동보훈사회부에 따르면, 175만 명의 어린이와 청소년이 노동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는 베트남 5-17세 청소년의 약 10%에 해당하는 수치다. 이들은 주로 농업(67%), 서비스업(17%), 건설업(16%) 등에 종사하고 있으며, 하루 평균 11-16시간씩 일하지만 임금은 성인 최저임금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미국 노동부는 아동 노동이나 강제 노동으로 생산된 제품 목록에 베트남의 사탕수수, 커피, 신발, 가구 등 14개 품목을 추가했다. 하지만 여전히 베트남 아동 5명 중 1명은 빈곤에 시달리고 있으며, 빈곤이 아동을 노동 현장으로 내모는 주요 원인이다. 2019년에는 41척의 선박에서 해산물 채취에 동원된 12명의 어린이가 발견되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선원들의 친척으로 가난 때문에 일하러 나온 아이들이었다.


유니세프는 2023년 7월에 어머니와 함께 길거리에서 쓰레기와 병을 주워 생계를 유지하는 13살 소년 짜 롱과,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근처 쌀국수 가게에서 일하며 홀로 살아가는 16세 소녀 누 이의 사례를 소개했다. 누 이는 성적이 좋았지만, 학교에 다닐 수 없는 현실을 슬퍼했다.


어린 아이들이 노동 현장에 내몰리는 현실은 가슴 아픈 일이다. 아이들에게 좋은 생활과 교육 환경을 제공하지 못하는 부모의 마음도 편하지 않을 것이다. 시내나 동네에서 복권을 파는 아이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지만, 그들이 파는 물건을 사거나 돈을 주지 않는 이유는 아이들을 길거리로 내모는 것이 돈이 되지 않아야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지자체 역시 관광객들에게 "어린이들이 판매하는 물건을 사지 마라"며, "물건을 구입하지 않는 것이 아동 인권을 보호하는 길"이라고 홍보하고 있다. 아이들이 이런 일을 하지 않게 하려면 부모에게 안정적인 수입이 보장되는 직장을 제공하는 것이 최선이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작정 외면하는 것이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 든다.

이는 비단 베트남 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고민이 되어야 할 것 같다.


다양한 NGO 단체의 적극적인 활동과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정부 차원의 복지 정책이 마련되기를 바라본다.


호치민 1군 시내에서 사탕 팔다가 실종되었던 두 아이들


이전 13화 #13. 사랑ing x 이별ing 1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