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남자와 여자
남자는 언제나 지금의 사랑이 첫 사랑이길 바라고, 여자는 마지막 사랑이기 바란다. - 오스카 와일드
내 것이 아니면 떠나 보내야 한다.
그것이 물건이든 사람이든 말이다.
애초에 내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내가 감당하고 극복할 수 있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비겁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게 뭐든 죄책감, 후회, 원망 그런 감정들을 꾸겨 마음 한편 어딘가에 잘 숨긴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마음은 공허함으로 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나의 무능과 무기력함이 지옥의 바닥까지 나를 끌어내리려는 것 같았다.
어떤 일에도 집중할 수 없었다.
멍하니 허공을 보는 시간이 늘었다.
휴가를 내고 떠나기로 했다.
어디든지 이 무거운 현실을 벗어나야 할 것 같았다.
지도를 펴고 신이 나에게 지시하는 곳이 어딜까 생각해 봤다.
호이안, 베트남 중부의 작고 오래된 도시.
호이안의 구시가지는 1999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지만
이젠 그냥 오래된 전래동화 같은 도시였다.
모든 갈등과 고민이 고대 마을처럼 흐릿하게 퇴색되길 바랬던 것 같다.
그녀와 마지막으로 만난지 벌써 보름이 지났다.
'그녀는 한달 반 후엔 이곳에 없겠지...'
눈부신 낮에 내 모습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야간 슬리핑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녀를 머리에서, 마음에서 밀어 낼 수 있는 조용한 곳으로 떠나야 했다.
어스름한 저녁이 지나고 밤이 짙어질 무렵 나는 슬리핑 버스에 올랐다
어두운 창밖으로 스쳐지나는 작은 나무들이 모두 그녀를 닮아 있었다.
여리지만 한낮의 뜨거운 햇살에도 쓰러지지 않고,
따갑게 쏟아지는 열대성 소나기에 흠뻑 젖어도 무너지지 않는 질긴 생명력을 가진 그녀처럼.
오히려 그 뜨거움과 따가움을 삶의 원동력으로 부둥켜 안고 조금씩 성장하는 모습이 처연하게 아름다웠다.
희뿌옇게 새벽 미명이 밝아올 무렵 나는 다낭의 어느 버스 터미널에서 내렸다.
그리고 다시 16인승 작고 오래된 버스를 타고 호이안으로 향했다.
호이안에 도착했을 때는 아침햇살 한줌이 어느 식당 간판에 모래가루처럼 흩뿌려지고 있었다.
마치 시간여행을 하듯 모든 것이 낡고 오래된 풍경이었다.
그런 풍경이 위로가 되었다.
낯설고 쓸쓸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오히려 좋았다.
버스에서 내려 마을 쪽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때가 탄 노란 벽과 짙은 갈색의 지붕에는 푸른 이끼들이 옹기종기 자리를 잡고 있었다.
주택마다 창가에는 불이 꺼진 색색의 등불이 걸려있었다.
아침 거리는 조용하고 한산했다.
마을 어귀에 어느 노상 쌀국수집에 털썩 자리를 잡았다.
진한 쌀국수의 국물 냄새가 모락모락 피어나는 수증기에 담켜 식욕을 자극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식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슬프기도 웃기기도 했다.
역시 인간은 본능 앞에 한없이 초라해 지는 모양이다.
하긴 보름 가까이 제대로 음식을 먹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주인집 딸인듯 옆 테이블에서 혼자 쌀국수를 먹던 예닐곱 정도되어 보이는 소녀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씬 짜오. 쭈." (안녕하세요? 아저씨)
"짜오. 꼰." (안녕. 아이야.)
"아저씨. 중국 사람이에요?"
"아니."
"아..그럼 아저씨는 한국 사람이군요."
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눈이 동그래진 소녀는 신이나서 웃으며 말했다.
"우리 오빠도 지금 한국에 있어요. 거기서 돈을 엄청 많이 벌어요. 나도 오빠처럼 크면 한국에 가서 돈을 벌거에요."
그말이 얇디 얇은 책장에 생채기를 내는 것처럼 마음을 아리게 했다.
다시 그녀가 생각났다.
한국에 가서 돈을 많이 벌고 싶다며 한국어를 공부하던 그녀가.
"그런데 아저씨, 사진 잘찍어요?"
아이가 나의 묵직한 카메라를 보더니 눈을 반짝이며 묻는다.
"잘찍지는 못하지만 그냥 사진 찍는걸 좋아해..."
문득 나는 그녀와 함께 찍은 사진이 한장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추억할 수 있는 사진 한장 없다는 것이 한편으로 안타까웠고, 또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저씨. 나도 사진찍어 줄 수 있어요?"
"그래. 어디보자. 어떻게 찍어주면 좋을까?"
소녀는 커다란 논라(베트남 대나무 모자)를 치켜 올리며 옆에 있던 곰인형을 가슴깨로 치켜올렸다.
그 곰인형은 눈알이 하나 빠져있었고, 오른쪽 어깨는 실밥이 터져 하얀 솜이 드러나 있었다.
눈이 유난히 크고 맑은 소녀는 작은 귀걸이가 잘보이도록 고개를 살짝 돌리며 말했다.
"아저씨. 이 곰인형과 귀걸이는 한국에 간 오빠가 사준거에요."
"그래. 예쁜 곰돌이와 귀걸이구나. 잠깐만 움직이지 말고 있어볼까. 못, 하이, 바 (하나, 둘, 셋)"
찰칵 소리가 경쾌하게 허공 위에 터졌다.
카메라 액정으로 자신의 사진을 들여다보는 아이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아저씨. 감사합니다. 이 사진 너무 마음에 들어요."
"그래? 그럼 사진으로 인쇄해서 다음에 만날 때 줄께."
"진짜요? 아빠한테 보여줄래요. 우리 아빠는 힘이 엄청세요. 커다란 리어커에 물건을 가득 실고 또 저를 태우고도 끄떡없이 달릴 수 었거든요. 오늘은 가게마다 등불과 향을 *배달하고 저녁에 맛있는 음식을 사온다고 하셨어요. 다음에 꼭 사진 주세요. 약속이요!"
천진한 아이였다.
만나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 있다.
그 소녀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녀도 그랬다.
아침 일찍 도착한 덕에 호텔 체크인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있었다.
소녀와 헤어지고 나는 천천히 마을을 돌아보기로 했다.
아침 바람이 부드럽게 머리에 쓰다듬었고 맑은 햇살은 상쾌했다.
올드타운의 일본교를 건너 물길을 따라 걸었다.
강물 위로 쏟아지던 햇살이 유리 파편처럼 튀어올라 눈동자를 파고 들었다.
그랬다. 내가 강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린 이유는 햇살의 파편이 너무 눈부셨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 가슴까지 먹먹하도록 서럽게 울었는지는 모르겠다.
난 엉망이었다.
한쪽으로는 그녀를 잊으려고 애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나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건 그녀뿐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생각은 정리되지 않았고 오히려 혼돈으로 치닫는 것 같았다.
한참을 그렇게 걷고 걷다가 예약한 호텔에 체크인을 했다.
싱글 침대와 작은 창문 그리고 샤워실 겸 화장실이 전부인 허름한 호텔이었다.
침대에 누워 창밖을 보니 파란 하늘 사이로 하얀 구름이 하염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스르륵 잠이 들었다.
* 배달
배달 앱 ‘배달의 민족’이 베트남 시장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하였다.
배달의민족을 운영하는 우아한형제들은 베트남 딜리버리히어로와 합작하여 '배민베트남'을 설립했지만,
12월 8일자로 베트남에서의 운영을 종료한다고 발표했다.
배민베트남은 2019년 베트남 현지 배달 플랫폼 비엣남엠엠을 인수하며 시장에 진출했으나,
적자가 지속되며 자본잠식이 심화되자 사업을 축소하고 구조조정을 진행했지만 결국 철수하게 되었다.
베트남은 일상적으로 배달 서비스를 많이 이용하는 나라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배달 기사들의 오토바이가 거리를 누비고, 기사들의 유니폼 색깔로 배달 플랫폼을 구분할 수 있다. 그랩은 초록색, 쇼피는 주황색, 비(be)는 노란색과 파란 줄무늬, 배민은 민트색 유니폼을 착용한다.
베트남 사람들은 커피나 음료 한 잔까지 배달시키는 것을 좋아한다.
그랩푸드의 2022년 상반기 데이터에 따르면, 베트남에서 가장 인기 있는 배달 메뉴는 밀크 티였다.
그 외에도 돼지고기 덮밥, 치킨, 반미, 베트남 커피 등이 자주 주문된다.
베트남의 배달비는 한국에 비해 저렴하여, 13km 거리는 500-1000원 수준에서 해결된다.
나도 저렴한 배달비와 다양한 프로모션 혜택 덕분에 배달 서비스를 자주 이용하게 된다.
배달이 지연될 경우 악천후에는 배달이 지연될 수 있다는 안내 메시지가 귀여운 캐릭터와 함께 뜨며
고객의 이해를 구하는 시스템도 갖추고 있다.
베트남 음식 배달 시장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으며, 2022년 기준 그랩푸드가 45%, 쇼피푸드가 41%의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배민베트남은 3위를 기록했으나 점유율이 12%에 그쳤고, 격심한 경쟁에서 밀려 철수하게 되었다. 그랩과 쇼피는 각각 차량 호출 서비스와 이커머스 플랫폼과 연계하여 강점을 보이고 있다.
반면, 배민베트남은 사용 편의성과 가격 경쟁력 면에서 부족함을 보였다.
베트남 소비자들은 가격에 민감하고, 할인 쿠폰이나 프로모션에 따라 다른 앱으로 쉽게 갈아탄다. 이러한 소비자 성향을 공략하지 못한 배민베트남은 경쟁에서 밀려났다.
그러나 여전히 베트남 음식 배달 시장은 매력적이다. 현지 스타트업인 로십과 비는 시장 점유율이 7%에 불과하지만 사업을 지속하고 있다.
베트남 음식 배달 시장은 코로나 이후 3배 성장해 작년 29조9000억 동(약 1조6000억원)을 기록했으며, 매년 이용자 수가 증가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코로나 기간 증가했던 배달 앱 사용자가 줄어드는 추세이다. 배달비 부담을 느낀 소비자들이 앱을 삭제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고 한다.
배달의 민족의 베트남 철수는 새로운 도전과 시장 개척의 일환이었다.
아쉽게 실패는 했지만 이러한 시도는 가치가 있으며, 앞으로의 새로운 도전 역시 기대해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