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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자루 Jun 28. 2024

#12. 계속 아프고 싶어요

아프다. 사랑은 아픈 것이다.


우리가 고통스러운 건, 사랑이 끝나서가 아니라 사랑이 계속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사랑이 끝난 후에도...

                                                    - 영화 '시월애'에서 




결국 약속한 시간이 왔다.

그녀에게 전화가 오기를 기다렸으나 오전이 종말을 고하고 오후가 한참 지나 3시가 지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일주일 만에 커피숍을 매각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특히 행정적인 매각 절차가 복잡한 베트남에서 그 짧은 시간에 매각을 기대하는 것은 욕심이었다.

먼저 전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핸드폰을 들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낯설고 차분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Hellow,  Are you Mr. Jung?'

'Yes, this is he'


자신을 Danie라고 밝혔다. 영어 이름이었다.

그는 전에 나에게 메시지를 보낸 대만 청년이었다.


"Why did you call me?"

짜증이 났다. 전화를 건 용건을 물었다.


그녀는 아직 커피숍을 매각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 그가 나에게 대신 투자금을 돌려주려 한다는 내용이었다.

'왜? 왜 그가 대신 투자금을 돌려준단 말이지?'

그녀가 매각을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돈을 마련하지 못하자

그가 그녀에게 커피숍을 매각하는 대신 돈을 빌려주겠다고 제안했단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고 한다.

그래도 자신이 대신 돌려줄 테니 그녀를 다시는 괴롭히지 말라고도 했다.


'뭐지? 이 남자는? 왜 그렇게까지 그녀를 도우려고 하는 거지?'


"당신은 나에게 돈을 갚을 이유가 없어요. 나는 당신의 돈을 받지 않을 겁니다."

"나는 그녀를 사랑합니다. 돈을 받고 그녀를 완전히 포기해 주세요.

그녀보다 돈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당신을 그녀 곁에 둘 수없습니다."


화가 났다. 나를 돈에 환장한 속물 취급하고 있는 것이 불쾌했다.

그에게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먼저 끊어 버렸다.

그리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참 벨이 울린 후에 그녀가 힘없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 마음이 아려왔다.


"돈은 준비됐어요?" 

애써 감정을 누르며 처음 만났을 때처럼 또박또박 말했다.

"오빠, 미안해요. 아직 준비 못했어요. 좀 더 시간을 줄 수 있어요?"

"얼마나 더 시간이 필요해요?"

"정확하게 말하기 어렵지만 일주일만 더 시간을 주세요."

"그래요. 이번엔 거짓말이 아니길 바라요."

나는 마지막까지 그녀를 상처를 후벼 파고 있었다.

마음속에 상처 입은 사자가 분노에 차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으르렁 거리는 것 같았다.


"네, 알았어요. 미안해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울음을 참으려 애쓰는 것이 영력해 보였다.

최대한 냉정하게 나는 전화를 먼저 끊어 버렸다.


가슴이 텅 비어 버린 것 같았다.

동시에 머리도 정전이 된 것처럼 모든 것이 까맣게 흐려졌다.

고요 속에서 질문이 하나 솟아났다.

나는 이렇게 화가 나 있는 것일까?

돈 때문에 아니면 그녀가 나를 속였다는 사실 때문에?

그녀가 나를 속인 것은 무엇인가? 학력? 몇 개월 가라오케에서 일한 것?

베트남에선 여자와 돈을 조심하라는 사람들의 반복되는 말에 세뇌당한 뇌가 사기당한 사실을 걷잡을 수 없이 분노하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심장 박동이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바보. 바보.'라고.

한 존재를 아는 것은 한 세상을 끌어안는 것이고,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모르는

그 무한한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이름과 성별과 직업으로 규정하는 순간 모든 것은 검게 변한다.

몇 개월간의 짊어지고 왔던 그녀와의 행복한 기억들이 결국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사실에 나는

무한한 슬픔을 느꼈다.

나는 이승과 저승의 틈 사이에 존재하는 관짝에 들어간 것처럼 미친 듯이 잠을 잤다.

마치 죽은 것처럼.


사흘이 지나고 약속한 날이 아니었는데 그녀로부터 전화가 왔다.

돈을 준비했으니 만나자고 한다.

돈을 준비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우리가 자주 갔던 한국 식당에서 저녁 7시에 만나기로 했다.


모든 일이 마무리되어 가는 것 같았는데도 나의 머리와 가슴은 여전히 혼란스럽고 정리되지 않았다.

이 만남이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 되겠지.

작별은 우리에게 상실의 교훈을 준다.

한때 우리는 서로를 사랑했고 서로를 가졌으며 서로의 곁에 있고 싶어 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서로 상처를 줬고 서로를 미워하는 끔찍한 상황을 만들었다.

희망을 버리고 싶다.

가능성이라는 단어를 더는 믿고 싶지 않다.

이제는 이별할 시간이다.


식당에 도착하자 직원이 예약된 방으로 안내했다.

그녀는 평소와 다르게 화사한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입술에는 밝은 톤의 립스픽과 옅은 화장까지 하고 있었지만 수척해진 얼굴을 숨기지는 못했다.


"오늘 저녁은 제가 살게요."

그녀는 늘 이런 상황에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과 말투로 말을 꺼냈다.

동생의 남자친구가 며칠 동안의 커피숍 수익을 훔쳐 달아났단다.

도박빚을 갚기 위해서였단다.

나중에 갚겠다는 말만 남긴 채 전화를 끊은 후 더 이상 통화가 안된다고 했다.


'오빠, 나 두 달 후에 타이베이로 가요.'
'얼마나 오래갈 건데?'
'한 2년 정도요.'
'오빠는 내가 보고 싶을까요?'
'... 그래. 아마도...'

Danie가 타이베이 시내에 있는 마자지숍을 소개해줬다고 한다.

취업비자도 그가 도와줬다고 한다.

그가 내 투자금을 빌려줬다고 한다.

대만에서 일해서 그 빚을 갚기로 했다고 한다.

커피숍은 동생이 그대로 운영할 거라고도 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고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그녀는 무채색의 말들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단어 하나하나가 빨갛게 내 마음속에 박히고 박혔다.

'나는 오빠가 누구를 만나든 행복하면 좋겠어요.'

식사를 마치고 서로 돌아서려는 순간 그녀가 말했다.


나는 싱긋 웃어 보이려고 애쓰며 고맙다고 말했다.

그러나 표정에 미소가 조금도 드러나지 않았다.

미소 지으려고 노력할수록 어색하게 얼굴이 일그러질 뿐이었다.

차마 너도 행복하라고 빌어줄 수가 없었다.

'텅 빈 가슴으로 이제 다시 누군가를 만날 수 있을까? 행복할 수 있을까?'


이 감정은 그녀에 대한 동정심이 조금도 섞일 수 없는 순수한 사랑이었다.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나는 비이성적으로 그녀를 사랑한다.

알고 있다.

사랑은 설명이 필요하고 그래서 이성적 이어여 한다는 걸.

하지만 사랑은 오로지 느끼는 것이고 그렇기에 비이성적이다.

사랑에 확실한 건 없다.

불확실하다는 것이 그 확실함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녀와 나는 뒤늦게 펼쳐진 책의 두 페이지 같았다.

서로를 완성하면서도 함께하지 못한다.

의식적으로 선택한 이별보다 더 큰 상처가 되는 건 없다.

어쩌면 이게 운명인지도 모른다.

사랑에 빠지고 작별을 고하고 미칠듯한 갈망에 사로잡히는 것.


아프다. 사랑한다는 것은 아픈 것이다.

그런데 계속 아프고 싶다.

내 손에 돈다발이 담긴 종이백이 한없이 증오스러웠다.

그 증오는 나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베트남에 왜 온 것일까?

*부자가 되겠다는 명확하지도 않고 얼토당토않은 목적으로 여기 있지만

그것 역시 구역질날만큼 세속적이고 부끄러운 목표였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모든 것들이 헛되고 부끄럽고 쓸모없는 티끌로 변해 있었다.




*베트남의 부자들


영국의 자산 컨설팅회사 ‘나이트 프랭크’가 매년 전 세계 부자의 자산 동향을 조사해 내놓는 ‘부자 보고서’가 2024년 2월 28일에 발표됐다.

최상위 1%에 드는 부자의 자산은 지난해 4.2% 증가했고, 우리가 억만장자 또는 슈퍼리치라고 부르는 순 자산이 3000만 달러(약 400억 원)가 넘는 초고액자산가(UHNWI· Ultra High Net Worth Indiviual)는 2022년 60만 1300명에서 2023년 62만 6619명으로 증가했다.


눈에 띄는 것은 해당 보고서가 “2028년까지 베트남 초고액자산가의 숫자가 한국·홍콩·싱가포르보다 빠르게 증가할 것”이라고 예상한 점이다.

여전히 많은 한국 사람들이 베트남을 ‘가난한 나라’라고 생각한다. 1980년대 한국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이야기도 종종 듣는다. 그러니 이런 이야기가 낯설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자산이 3000만 달러, 우리 돈으로 400억 원을 넘는 베트남의 초고액자산가는 2023년 752명에 달했다.

나이트프랭크는 2028년 베트남의 초고액자산가 수가 978명으로 늘어날 거라 전망하고 있다.

2023년에 비해 30%가량 증가할 것이라는 예상이다.

이런 수치는 같은 기간 한국, 홍콩, 싱가포르의 증가세를 뛰어넘는다.

베트남의 부자 수가 한국, 홍콩, 싱가포르보다 빠르게 증가한다는 뜻이다.

물론, 절대적인 숫자로는 한참 부족하다.

한국의 초고액자산가 수는 2023년 7,310명이고, 2028년에는 9,470명으로 늘어날 거라 전망하고 있다.

홍콩은 5,957명에서 7,290명, 싱가포르는 4,783명에서 5,535명의 초고액자산가도 베트남보다 훨씬 더 많다.


절대적인 초고액자산가의 수가 아닌 증가율에 초점을 맞춘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다른 나라에 비해 부자의 수가 빠르게 증가한다는 것은

국가 경제의 성장과 부의 재편(再編)은 물론, 소비 행태까지 달라지고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부자가 늘어나면서 베트남의 사치품 소비도 함께 늘었다.

소비 품목이 고급화되면서 작년 한 해에만 미술품 가격이 11% 올랐고, 보석류(8%)와 시계(5%), 골동품 등의 가격이 인상됐다.

지난 2018~2022년 사이 보석류 가격이 연평균 8%씩 오르고, 자동차(연 26%), 와인(연 6%) 가격이 꾸준히 인상된 것도 돈 많은 사람들의 취향 소비가 늘어난 탓이다.

억만장자뿐만이 아니다. 백만장자의 증가세는 더욱 가파를 전망이다.

스위스의 시민·영주권 자문회사 헨리 앤 파트너스와 글로벌 자산정보회사 뉴월드웰스는 최근 “앞으로 10년간 베트남 백만장자 증가율은 최대 125%에 이를 것”이라는 보고서도 내놓았다.


베트남에서 부자가 되고 싶다면 실제 베트남에서 누가 부자인지 알아야 한다.

포브스가 작년 말 베트남 억만장자의 리스트를 업데이트 한 자료에 따르면 다섯 명의 이름이 등장한다.

베트남의 삼성이라 불리는 ‘빈 그룹’의 팜 녓브엉 회장, 베트남과 동남아 최대의 철강업체 ‘호아 팟’의 짠 딘 롱 회장, 저가 항공사 ‘비엣젯’의 응우옌 티 프엉 타오 회장, 자동차 회사인 ‘타코’의 짠 바 드엉, 은행인 ‘테크콤뱅크’의 호 흥 안 회장이다. 3년 연속 순위에 올랐던 마산그룹의 응우옌 당 꽝 회장은 최근 순 자산이 10억 달러 아래로 줄어들어 순위에서 제외됐다.           

     

왼쪽부터 팜 녓 브엉 빈그룹 회장, 짠 딘 롱 호아팟 회장, 응우옌 티 프엉 타오 비엣젯 회장. /VN익스프레스


빈 그룹 브엉 회장의 순자산은 1년 사이 2억 달러 늘어난 45억 달러로 베트남 최대 부호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전 세계 부자 순위로는 648위를 기록했다. 베트남 억만장자 중 유일한 여성인 비엣젯의 타오 회장의 자산도 전년보다 2억 달러 늘어난 24억 달러다. 호아팟 롱 회장의 자산은 5억 달러가 증가했다.


이쯤 되면 “아, 베트남에선 정부 기관의 사업이 아니라 민간사업으로도 돈을 잘 벌 수 있구나.”싶겠지만 그건 오산이다.

민간 기업 역시 베트남 정부의 정책과 기조를 거슬러 사업을 하긴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유통업과 건설업 등을 주력으로 하던 빈 그룹이 2017년 ‘빈패스트’라는 자동차 회사를 세운 것이 꼽힌다. 이는 “오토바이를 퇴출하고, 자동차를 늘리겠다”는 베트남 정부의 의지에 따른 것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작년 4분기에만 전 분기보다 3.4% 늘어난 6억 5010만 달러의 순손실을 기록할 정도로 실적이 좋지 않지만 도리어 유통업계 1위였던 빈마트를 매각하면서까지, 전기차 사업을 계속하고 있다.

현재 베트남은 노동집약적인 제조업 산업에서 하이테크놀로지 분야로 산업 체질을 바꾸려고 애쓰고 있다.

베트남에서 부자가 되고 싶다면 이제 값싼 노동력 하나를 바라고 들어오려는 제조업보다는 IT나 하이테크 산업으로 도전장을 내밀어야 할 것이다.

값싼 노동력이라는 말도 오르는 인건비 추이를 보면 옛말이 될 가능성이 높다.

역시 부자가 되는 길은 멀고 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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