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오르반
헝가리는 EU의 정회원국이다. 그리고 동시에 EU의 주적이다.
빅토르 오르반은 헝가리 총리로 “브뤼셀은 우리 주권을 빼앗으려 한다!” 라고 외친 다음, 같은 날 EU 재정지원금 신청서를 제출한다.
손으로 욕하고, 발로 돈 받는 스타일이랄까...
이건 정치가 아니라 이중생활이다.
헝가리에선 민족주의 깃발 흔들며 “우리가 주인이다!”를 외치고, 브뤼셀에선 잠시 고개 숙이며
“그… 발전기금은 오늘쯤 나올까요?”라고 묻는다.
사실상 EU판 트럼프, 아니, 트럼프보다 똑똑한 트럼프.
화끈하진 않다. 대신 오래 간다. 그리고 그는 그걸 너무 잘 안다.
오르반은 1963년 헝가리 중부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공산당원이었고, 당시 체제 하에서 공산당원 가정은 정치적 발언이나 행동에 있어 늘 감시와 검열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집안 분위기 역시 정치적 단속과 체제의 시선을 의식하며 조심스럽게 살아가는 경향이 강했다.
그 속에서 그는 권위는 두려움의 대상이자, 통제의 수단이라는 인식을 자연스럽게 체득하게 된다.
10대 시절, 오르반은 똑똑하고 반항심이 강한 학생이었다.
성적은 우수했지만, 권위적인 교사나 일방적 교육 방식에 종종 저항했고,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 태도가 또래들 사이에서 주목을 받았다.
그는 강한 통제력에 대한 거부감을 가졌지만, 동시에 그 통제가 어떻게 사람들을 움직이게 만드는지도 눈여겨봤다.
대학 시절, 그는 본격적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1989년, 공산주의 몰락 직전, 젊은 자유주의자 그룹과 함께 헝가리 내 소비에트 영향력 철폐를 외치는 연설을 했다.
그는 자유주의 운동의 얼굴이었고, 그의 정치 입문은 반권위·반독재의 깃발 아래 시작됐다.
하지만 그 이후, 그의 인식은 단순한 반체제를 넘어서 권위란 어떻게 작동하고, 어떻게 장악할 수 있는가에 대한 깊은 전략으로 발전한다.
그는 자유를 외치던 학생에서, 자유의 구조를 해체하고 통제 가능한 권위로 바꾸는 법을 배운 정치인이 되었다.
청년 시절, 급진 자유주의 운동에 참여했고, 공산당 독재에 맞섰던 그가 훗날엔 비자유주의 독재에 가까운 정치인이 되었다.
그걸 두고 비판하자 그는 말했다.
“나는 변한 게 없다. 자유주의가 혼자 앞서간 거다.”
1989년, 부다페스트 영웅광장.
당시 26세의 빅토르 오르반은 소련군 철수를 요구하는 대담한 연설을 한다.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원한다!”
이 장면은 아직도 헝가리 민주주의의 상징처럼 남아 있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자유주의와의 작별이 시작된 시점이기도 하다.
그는 자유주의를 사랑했던 게 아니다. 그는 자유주의를 도구로 사용했다.
공산주의라는 큰 권력을 무너뜨리기 위해 더 큰 말, 더 큰 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산주의가 무너진 후, 그는 곧 깨달았다.
자유주의는 혼란을 낳고, 혼란은 권력을 약화시킨다.
자유로운 언론, 열린 토론, 여러 당의 경쟁…
그것들은 처음엔 민주주의의 상징 같았지만, 정작 국민들이 원하는 건 질서와 명확한 리더십이었다.
그리고 오르반은 그 열망을 읽을 줄 아는 정치인이었다.
“자유는 좋은 것이지만, 국가를 약하게 만든다면 의미가 없다.”
그의 말처럼, 그는 자유보다 단단한 것을 추구했다.
그것이 질서, 통제, 전통, 그리고 무엇보다도 승리 가능한 구조였다.
그는 그렇게 자유주의를 등졌고, 대신 스스로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라는 괴이한 발명품을 만들었다.
민주주의의 껍데기에 통제의 알맹이를 담은 체제.
자유의 이름으로 권력을 잡고, 권력의 이름으로 자유를 줄이는 정치.
그건 변절이 아니라, 정치의 구조를 설계하는 데 성공한 기술자의 진화였다.
오르반은 자유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자유주의를 지나온 사람이다.
그리고 그 길 위에 “여기부터는 내가 설계한 길이다”라는 팻말을 꽂았다.
오르반은 ‘기독교적 가치’를 강조한다.
결혼은 남녀 간, 가족은 전통대로, 국가는 아버지처럼 강하고 따뜻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실상은 그 반대였다.
비판 언론사에는 광고 끊고 사라지게 만들었고, NGO 단체들은 외국 간첩으로 몰고 가선 법으로 족쳤다. 사법부를 사실상 행정부 소속처럼 만들기도 했다.
이쯤 되면 “무서운 아빠한테 물어봐” 스타일이 아니라, 그냥 아빠가 모든 걸 결정하는 집안이다.
국민 반응은 반반이다. 지지자는 “나라를 지켜주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비판자는 “나라를 독점하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한숨을 내쉰다.
그런데 신기하게 선거는 계속 이긴다.
진심이든 두려움이든, 투표함 속 숫자는 그를 원하고 있다.
2014년, 오르반은 한 가지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인터넷 사용량에 세금을 매기자라는 것이었다.
이건 단순한 세금이 아니었다. 그는 정보의 흐름을 돈으로 조절하려 했다.
시민 수만 명이 거리로 나왔다.
“클릭당 세금이라니, 독재도 구독 기반이냐?”
헝가리의 젊은 세대는 그를 처음으로 비판하는 대중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그는 물러나지 않았다.
“국가가 먼저다. 혼란보다 통제가 낫다.”
그 말은 철조망에도 적용됐다. 2015년, 난민 위기 속에서 오르반은 고민하지 않았다.
그는 헝가리, 세르비아 국경에 군사 철조망을 깔았다.
눈치 안 보고, 속도는 군대급, 메시지는 단순했다:
“헝가리는 헝가리인의 것.”
유럽이 인도주의를 이야기할 때, 그는 문을 닫고 키를 잠갔다.
그의 정치는 언제나 “문제를 키우지 마라. 입을 막아라. 벽을 세워라.”였다.
2021년에는 아예 선언했다.
“자유주의는 실패했다. 우리는 비자유적 민주주의를 원한다.”
그리고 그 해, 성소수자 교육을 제한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보호”라는 이름으로 검열을 입혔고,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혐오를 정당화했다.
2022년, 브뤼셀에서 열린 EU 정상회담.
오르반은 유럽적 연대와 공동 가치에 대해 잠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회의가 끝나자마자 기자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브뤼셀에 훈계 받으러 온 게 아니다.”
회의장 안에선 정장 입은 외교관, 헝가리로 돌아가자마자 국경복 입은 민족주의자.
어느 기자가 물었다.
“총리님, 이중적이라는 비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현실적인 거다.”
그 순간, 정장은 벗었고, 정치쇼는 시작됐다.
2025년에는 국제형사재판소(ICC) 탈퇴 법안에 사인했다.
그가 보기엔 국제법은 외부 간섭이고, 유럽 가치는 공격 명분일 뿐이었다.
이 모든 게 우연이 아니다. 그는 매번 국민에게 말한다.
“혼란을 허락하면, 나라가 무너진다.”
하지만 진짜 무너지는 건 혼란이 아니라, 표현의 자유, 법의 독립, 그리고 목소리 낼 권리다.
빅토르 오르반은 정치 이단아다. 하지만 그 이단은 계산된 전략 위에 있다.
그는 자유주의를 부정하면서도, 그 자유가 주는 구조는 기가 막히게 활용한다.
언론은 통제하지만, 투표는 한다. 반대는 억제하지만, 합법적 형식은 갖춘다.
그래서 더 무섭다.
민주주의 안에 있지만, 민주주의를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는다.
그는 묻는다.
“왜 민주주의는 반드시 진보적이어야 하나?”
그리고 대답한다.
“내가 있는 한,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 빅토르 오르반은 총리다. 하지만 그냥 총리는 아니다.
그는 유럽의 시스템을 그대로 이용해, 그 시스템이 지향하던 가치를 조금씩 뺏어가는 중이다.
자유는 그대로 두되, 이용만 하고 존중은 안 한다.
선거는 한다. 하지만 선택지는 줄어든다. 언론은 존재한다. 그러나 불편하면 사라진다.
그는 법을 지키면서, 법의 정신을 꺾는다.
제도를 존중한다면서, 그 제도를 통째로 자기 걸로 만든다.
그는 유럽에 속해 있지만, 유럽이 자기를 바꿀 거라 믿는 쪽이 바보라고 생각한다.
결국 오르반은 민주주의의 가장 깊숙한 곳에 들어온 내장형 바이러스 같은 존재다.
겉으론 정상 작동. 속에선 조용한 오염.
그리고 느리지만 확실하게, 새로운 룰을 덮어쓴다.
그는 자신이 "헝가리를 지킨다"고 말하지만, 진짜 그가 지키는 건 자기 스타일의 권력 유지 기술이다.
진짜 무서운 건 법을 어기는 사람이 아니라,
법을 그대로 둔 채 민주주의를 구식으로 만드는 사람이다.
오르반은 그것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