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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해커 정신을 장착한 대통령

나이브 부켈레

by 한자루


엘살바도르. 중미의 작은 나라. 국토는 작지만, 실험 정신만은 큰 나라다.
2021년, 유엔 연단 위에 후드티 입은 대통령이 등장했다.
그는 열변을 토했다. 정치 연설과는 거리가 멀었고 오히려 TED 토크쇼에 가까웠다.

나이브 부켈레(Nayib Bukele).

이름은 부드럽지만, 정치 스타일은 디지털 사이버펑크 독재와 힙스터 감성에 스타트업 프레젠테이션을 더한 신세대 대통령이다.

2019년, 젊은 기업가 이미지로 대통령에 당선.
긴 연설 대신 짧은 트윗, 정책 자료 대신 밈(Meme),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폭탄선언을 했다.

"비트코인을 엘살바도르의 법정 통화로 지정합니다."




IMF는 뒷목을 잡았고, 국제 투자자들은 입을 벌렸고, 엘살바도르 국민은 자기 지갑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진심이었다.

국가 예산으로 비트코인을 매수했고, 전국민에게 디지털 지갑 '치보(Chivo)'를 배포, 화산 에너지로 비트코인을 채굴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쯤 되면 국정 운영이 아니라 국가 규모의 Web3 스타트업 런칭 쇼케이스였다.


부켈레는 1981년, 엘살바도르 수도 산살바도르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팔레스타인계 이민자 출신으로 언론인이자 기업인이었고, 무슬림 공동체 내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했지만, 종교보다 인터넷과 광고에 관심이 많았다.

청소년기엔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다녔고, 20대에는 광고 회사를 창업했다.
정치권 인맥 없이 SNS 마케팅으로 유명세를 탔고, 그 감각으로 2012년 지방자치단체장에 당선되며 정치 입문했다.

정치 철학은 놀랍도록 단순하다.

“속도가 진실보다 중요하다.”
“법은 필요하지만, 반드시 지킬 필요는 없다.”
“정치란 결국 쇼다. 다만 나는 진짜 잘 편집한다.”


그는 '권위'보다 '이미지'를, '과정'보다 '임팩트'를 중시한다.
말하자면, 정치는 브랜딩이고, 국정은 콘텐츠 기획이다.


해외 언론은 처음엔 환호했다.

“세계 최초의 비트코인 국가!”, “디지털 시대의 선구자!”

하지만 몇 달 후, 헤드라인은 이렇게 바뀌었다:

“전기세 폭탄과 해킹 불안의 나라”, “지갑은 만들었지만, 돈은 어디로 갔는가?”


국민 반응은 이중적이었다.

젊은 세대: "쟤 멋지다. 대통령 맞아?"

기성 세대: "쟤 멋진데… 우리 통장은 무사한가?"


비트코인 가격이 급락하자, 정부가 보유한 코인의 수익은 증발했다.
디지털 지갑은 오류로 몇 천만 달러를 날렸고, 일부는 추적도 불가능.

그런데도 부켈레는 태연했다.

“우리는 코인을 사는 게 아니라, 미래를 사는 것이다.”

이쯤 되면 엘살바도르는 뚜껑 없는 크립토 실험실, 부켈레는 그 실험실의 최고 설계자이자 마케팅 총괄이었다.


비트코인은 시작일 뿐이었다.
그는 의회 의원 전원을 해산, 헌법재판소 재판관 전원 해고, 야당은 '비판 중지 모드'로 돌입시켰다.

그리고 마약·범죄 조직 갱단을 통째로 감금했다.
수만 명을 대규모로 잡아들였고, 그 모습은 고스란히 영상화되어 정부 공식 SNS에 넷플릭스 트레일러처럼 편집돼 업로드됐다.

윗옷을 벗고 땅에 무릎 꿇은 죄수들, 강철 같은 음악, 카메라 무빙까지 완벽한 국가 치안 마케팅 콘텐츠.

인권 단체들은 분노했고, 국민 대다수는 박수쳤다.
“그래, 갱단보단 부켈레가 낫지.”

그는 그걸 안다. 그래서 더 센 걸 올린다.
“우린 지금 역사를 쓰고 있다.” 이 말은 거의 주 2회 트윗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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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부켈레의 국내 지지도는 80%를 넘나든다.
엘살바도르는 오랫동안 갱단과 정치 부패에 시달려왔고, 기성 정치에 대한 피로가 극에 달한 상태였다.

그 와중에 등장한 부켈레는 젊고, 잘생기고, SNS도 잘하고, 뭔가 새로운 걸 자꾸 해본다.

비트코인이 망해도 괜찮다.
적어도 갱단은 줄었고, 밤거리를 걸을 수 있게 됐으니까.
국민은 부켈레에게 민주주의를 기대하지 않는다. 그저 무언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싶어 한다.


비트코인은 상징에 불과하다.
그가 진짜로 사고파는 건 미래에 대한 통제력이다.

그는 법보다 결과를, 과정보다 속도를, 민주주의보다 “정돈된 그림”을 중시한다.

엘살바도르는 아직 이 실험의 끝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지금 이 나라는 트위터, 블록체인, 감옥, 그리고 후드티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

그는 더 이상 대통령이 아니다.
그는 해시태그로 법을 만들고, 썸네일로 정책을 발표하며, 이모지 하나로 국가 방향을 결정하는 세계관의 창조주다.

입법은 스트리밍되고, 치안은 영상 콘텐츠로 연출되며, 국민은 이제 투표가 아니라 앱 업데이트를 기다린다.

감옥은 무대가 되었고, 경제는 코인이 되었고, 국정은 브랜딩이 되었다.

그리고 그 모든 위에 선 사람은, 후드티 입은 채 트윗 하나 남긴다.
“우린 지금 역사를 쓰고 있다.”

맞다.
다만 그 역사는 민주주의의 미래가 아니라, 한 사람의 팔로워 수를 위해 최적화된 디스토피아의 스토리보드일 뿐이다.


엘살바도르는 지금 부켈레 1인 유니버스다.
그가 현실을 편집하고, 서사를 만들고, 해시태그로 통치한다.
민주주의는 로그아웃됐다.
그리고 남은 건 와이파이와 구독자 수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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