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야누코비치
출생 : 1950.07.09. 우크라이나
가족 : 슬하 2남
경력 : 2010.02.~2014.02. 제4대 우크라이나 대통령
2006.08.~2007.12. 우크라이나 총리
2004.12.~2005.01. 우크라이나 총리 2003 우크라이나 지역당 당수
빅토르 야누코비치를 이해하려면 그가 남긴 금빛 궁전이 아니라 그의 유년기부터 들여다봐야 한다.
그의 삶의 출발점은 화려함과는 전혀 거리가 없었다.
우크라이나 동부의 공업지대, 회색 굴뚝, 거친 노동자들, 정전이 잦은 집들 속에서 그는 자랐다.
어머니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트럭 운전으로 긴 시간 집 밖에서 보냈다.
소년 야누코비치의 세계는 보호받지 못한 공간이었고, 그에게 남은 건 단단해지는 법밖에 없었다.
청소년 시절 그는 폭력과 절도 사건으로 경찰서를 들락거렸고, 두 번의 전과는 그의 공식적인 성장 기록처럼 굳어졌다.
그러나 그 시절이 그를 파괴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시절은 그에게 정치 철학이라는 것을 이상한 방식으로 선물했다.
그 철학의 핵심은 이렇다.
“약하면 밟힌다. 그러니 나는 약해지지 않는다.”
이 철학은 민주주의 교과서에서 추출한 문장은 아니었지만, 그의 정치 인생을 지탱한 가장 정직한 진실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그는 여기에 또 하나의 공식을 덧붙인다.
“힘 있는 쪽으로 붙어라.”
이 두 개의 생존 철학은 결국 그의 외교, 경제 정책, 그리고 부패 구조를 지배하는 거대한 그림자가 된다.
야누코비치의 정치 철학을 거창한 이념으로 설명할 필요는 없다.
그의 정책 결정 방식은 놀라울 만큼 단순했다.
국민이 원하는 방향? 중요하지 않았다. 국가 경제의 위기? 심각하게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러시아와 유럽 중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그건 상황에 따라 바람이 부는 쪽을 보면 결정할 일이었다.
그는 중립을 이야기했지만, 그의 중립은 그의 집무실 벽에 붙은 금박 장식만큼 설득력이 없었다.
중립은 균형의 이름이 아니라, 더 강하게 끌어당기는 쪽으로 밀려가는 회전문의 다른 표현이었다.
그에게 국가는 철학이나 이상이 담긴 공동체가 아니었다.
그에게 국가는 ‘집’이었다. 그리고 그 집은 주인이 편안해야 했다.
문제는 그 집의 주인이 국민이 아니라 바로 그 자신이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대통령궁은 국가의 얼굴이 아니라, 그의 취향이 구현된 화려한 쇼룸이 되었다.
그의 정치 철학은 결과적으로 금박으로 코팅된 자아였고, 그 자아 위에서 국정은 장식품처럼 배치되었다.
그가 대통령으로 있던 동안 우크라이나는 흔들렸다.
경제는 가라앉았고, 부패는 구조화됐고, 행정은 ‘충성’이라는 기준 위에서 돌아갔다.
그런데도 야누코비치가 가장 공들인 곳은 국가 운영이 아니라 대통령궁 인테리어였다.
2014년, 그가 국민의 힘으로 쫓겨난 뒤 시민들이 대통령궁에 들어갔을 때 발견한 풍경은 국가적 비극이자 동시에 부패의 박물관이었다.
황금 변기, 황금 비데, 황금 난간, 황금 샹들리에, 실내 폭포, 클래식 자동차 박물관, 개인 동물원, 호화 요트.
그 위를 흐르는 건 권력의 냄새가 아니라 비현실적 허영의 냄새였다.
한 시민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대통령을 뽑은 줄 알았다. 알고 보니 금박 애호가를 뽑았던 것이다.”
2013년, EU와의 협력 협정을 체결하려던 우크라이나는 그날 갑자기 야누코비치의 한마디로 뒤집혔다.
“러시아와 더 가까이 지내겠습니다.”
그 한 문장이 우크라이나 광장을 타오르게 했다.
유로마이단이 시작되었고, 수십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야누코비치 시대를 이야기할 때 유로마이단을 빼면 마치 라면에서 스프를 빼는 것과 같다.
국민이 왜 그렇게 폭발했는지를 알려주는 핵심 풍미이기 때문이다.
유로마이단은 단순한 시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우크라이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국가적 정체성을 묻는 집단적 질문이었다.
그 배경은 이랬다.
우크라이나는 오랫동안 유럽과 러시아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왔다.
러시아는 형처럼 굴었고, 유럽은 어른스럽게 굴었다.
국민 다수는 유럽을 꿈꾸었고, 젊은 세대는 특히 유럽의 교육·법치·경제 시스템을 갈망했다.
그리고 2013년, EU와의 협력 협정은 우크라이나가 어느 방향을 향해 갈 것인지 결정짓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국민들은 거의 축제에 가까운 기대감으로 지켜보았다.
그런데, 바로 그날. 야누코비치가 TV에 나와 한 문장을 던진다.
“EU 협정 체결을 중단한다. 러시아와 협력하겠다.”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키이우 전체가 싸늘해졌다.
한마디로 국민들은 이렇게 말했다.
“아니, 이걸 지금...?”
그리고 그다음 순간, 광장은 불타올랐다.
정확한 장소는 ‘마이단 네잘레즈노스티’, 즉 독립광장(Maidan).
모든 것이 거기서 시작되었다.
처음엔 학생들이 모였고, 그들을 지키려는 시민들이 오고, 그들을 막으려는 경찰이 오고, 경찰의 폭력은 국민의 분노를 더 불렀고, 결국 광장은 수십만 명의 파도처럼 출렁였다.
유로마이단은 단지 정치 시위가 아니라 “우리는 유럽을 선택한다”라는 국가의 의지 표현이자 “우리는 금박 궁전의 주인이 아니며, 그 주인은 너도 아니다”라는 선언이었다.
야누코비치는 이를 진압하려 했고, 최종적으로 사망자가 발생하면서 시위는 혁명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그리고 그 혁명이 바로 그가 황금 변기와 비데, 금박 난간을 남겨둔 채 밤중에 사라지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유로마이단은 결국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국민은 미래를 선택했고, 대통령은 도망을 선택했다.”
이 장면은 우크라이나 근현대사의 분기점이 되었고, 야누코비치는 그 장면의 ‘사라진 주인공’으로 남았다.
그는 밤 사이에 사라졌고, 러시아군 헬기로 추정되는 수단을 이용해 국경을 넘어갔다.
그날 이후 그는 대통령이 아니라 “금도금 도망자”라는 새로운 직함을 얻었다.
야누코비치가 러시아로 도망친 뒤, 그의 삶은 더 이상 황금빛으로 반짝이지 않았다.
궁전은 뒤에 남았고, 금박은 벗겨졌고, 그에게 남은 건 조용한 망명자 신세뿐이었다.
그리고 2015년, 그의 삶에 또 하나의 비극이 찾아왔다.
아들 빅토르 야누코비치 주니어가 러시아 바이칼 호수에서 얼음 위를 운전하다 얼음이 깨지며 차와 함께 빠져 익사한 것이다.
평소 스릴을 즐기던 아들이 얼음 위를 달리다 사라졌다는 이 아이러니한 죽음은 야누코비치가 쌓아 올린 금박 인생의 균열처럼 느껴졌다.
그가 사랑했던 권력도, 그가 지키려 했던 자리도, 그가 도망친 밤의 헬기 소리도 아들의 죽음을 막아주지 못했다.
궁전에서는 금빛 난간을 잡고 내려왔지만, 바이칼 호수에서 그의 아들이 잡은 것은 깨져 내리는 얼음뿐이었다.
이 사건은 국민들에게 어떤 측은함과 함께, 야누코비치라는 인물이 결국 삶의 가장 개인적인 영역에서도 ‘균열과 붕괴’라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는 인상을 남겼다.
망명지에서 그는 지금도 “나는 정당한 대통령이었다”고 주장하지만, 아들의 죽음은 그의 말 대신 그의 삶이 향한 방향을 조용히 증언하고 있다.
도망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권력의 종말과, 금박의 벗겨짐과, 그리고 한 인간이 맞이하는 돌이킬 수 없는 상실.
야누코비치는 지금도 러시아에서 “나는 정당한 대통령이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의 황금 변기와 비데, 그리고 텅 빈 대통령궁이 조용히 말한다.
“그는 권력자가 아니라, 권력을 사유화한 사람에 불과했다.”
그의 통치는 우크라이나에 깊은 상처를 남겼지만, 또 한 가지 중요한 교훈도 남겼다.
“권력자를 감시하지 않으면, 그들은 언젠가 금박을 들고 도망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