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오늘 한 거짓말은
내일 현실이 된다면

거짓말이 이렇게 잘 들을 줄 몰랐지

by 한자루




오늘도 야근이다.
사무실엔 형광등의 희미한 전기 돌아가는 소리와 내 숨소리만 남았다.

모니터 한쪽엔 팀 스케줄표가 떠 있고, 그 위에 빨간 글씨로 떡하니 쓰여 있다.
“내일까지 제출”

눈앞엔… 아직 빈 PPT 장표 한 장. 그때, 팀장에게서 톡이 왔다.

“내일 발표 자료, 준비됐죠?”

나는 망설임 없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네, 물론입니다. 이제 오탈자만 한 번 더 검토하면 됩니다!’

그 메시지가 화면에 올라가자마자, 가슴 어딘가가 뚝! 하고 내려앉았다.

‘… 오탈자? 아직 제목도 못 썼거든요?’

하지만 이미 말해버린 거다.
"네."라는 글자엔 취소선이 없다.
그건 약속이 아니라, 운명처럼 무거웠다. 그리고 그 순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방금 한 거짓말이… 내일 아침 현실이 되어 있다면?”

진짜 아무것도 안 했는데, 내 노트북 안에 누가 대신 자료를 써놨다면?

심지어 오탈자도 없는 버전으로!!

“와, 이건 신박한 상상인데?”

나는 현실감을 완전히 상실한 채 빙그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래, 만약 거짓말이 내일 현실이 된다면…

나는 이미 천재, 슈퍼 엘리트, 발표계의 아이돌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내가 지금까지 한 모든 거짓말이, 내일 현실이 된다면? 그 수많은 농담, 허풍, 변명, 핑계들이 전부… 진짜가 된다면?”

“내일부터 다이어트 시작할 거야. 이번에 진짜라고!”

“이번 달엔 진짜 돈 모을 거야.”

“이 놈의 회사 내가 더러워서 관두고 만다. 나 말리지 말라고.”

“아들, 아빠가 말이야, 예전에 장난 아니게 인기 많았거든. 엄마한테 물어보라고. 진짜야.”


대체 나는 얼마나 많은 허세와 허풍의 거짓말을 쏟아내고 살았을까?

하지만 진짜 그런 거짓말이 모두 현실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나는, 오늘 밤 사무실 한구석에서 텅 빈 모니터를 바라보며 혼자만의 상상을 시작한다.

거짓말이 현실이 되는 세상에 대한 실험.

희망에서 시작되지만, 어쩌면 내일 아침 발표를 망치게 될지도 모르는 시간낭비의 그 위태로운 실험을...



실험 개요

실험명 : 거짓이 내일이 된다면 – 거짓은 상상력의 기원인가, 현실의 왜곡인가?
실험 목적 : 인간이 무심코 말하는 거짓말을 통해 그 내면의 욕망, 불안, 정체성을 탐구한다.
거짓이 현실이 되는 세계에서 우리는 어떤 말을 삼키고, 어떤 말을 뱉게 되는지를 관찰한다. 실험 조건 :
1. 거짓말은 말한 사람이 ‘거짓’ 임을 인식하고 있어야 함
2. 농담, 허세, 자기 위안 등도 포함
3. 말한 다음 날, 해당 내용은 자동으로 현실화됨
4. 실현된 결과는 취소 및 수정 불가
5. 하루에 한 번만 현실이 됨
피실험자 : 50대 초반의 중년 회사원 (본인)


실험 기록 01 – 완벽한 자료의 역습

날짜: D+1
상 황: 다음 날 아침, 자료가 진짜로 완성된 상태로 현실화됨
효과: 완성은 되었지만, ‘내가 만든 게 아님’이라는 정체성의 혼란과 예기치 못한 부작용이 발생함


아침 6시 32분.
나는 평소보다 일찍 출근했다. 꿈인지 생시인지, 아직도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노트북을 켜고, 어젯밤까지 텅 비어 있던 폴더를 열었다.
… 있다. PPT 파일이. 그것도 최종-final-진짜최종. pptx라는 파일명이 붙은 채.

나는 손끝이 떨리는 걸 느끼며 클릭했다.

그리고, 놀랐다. 아니, 감동했다.

기획 의도는 물론이고, 분석 차트, 법률적 대안, 심지어 임원 스타일에 딱 맞춘 폰트와 색상까지…

“이건… 나보다 내가 잘 만든 자료잖아?”

눈물이 날 뻔했다.
하지만 동시에, 오싹한 기분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걸 누가 만든 거지?”

분명히 난 만들지 않았다.
이건, 내가 하고 싶었지만 실력과 시간이 안 돼 못 만든 그 PPT였다.

회의실에선 상무님이 박수를 쳤다.
“이 정도면… 사장님 보고 때도 써도 되겠는데요?”

팀원들은 나를 쳐다봤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커피를 마시는 척했다.

하지만 그 순간, 내 머릿속을 스치는 한 문장.

'이건… 내 게 아닌데요?'

완벽했지만, 그래서 더 낯설었다.
이건 내가 한 게 아닌데, 모두는 내가 했다고 믿었다.
내 입에서 나온 거짓말 하나가, 나를 만든 것처럼 꾸며지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회의 말미에 팀장님이 말했다.

“발표도 이 정도로 해주시겠죠? 내일 대표님 앞에서 발표 갑시다.”

나는 침을 삼켰다. 자료는 완성돼 있었지만, 발표는? 그건 내 거짓말에 포함돼 있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회사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아 생각했다.

“나는 거짓말 하나로, 나보다 나은 나를 만들어버린 걸까? 근데… 그걸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한순간의 편안함을 위해 뱉은 말이 진짜가 되어 나를 시험하는 세상.

그건 마치, 내가 만든 유령이 나보다 먼저 나로 살아가는 기분이었다.


실험 기록 02 – 사표의 자율 전송 기능

D+2. 아침 9시 12분.
상황: 발표가 망하고, 홧김에 뱉은 한 마디 – “이딴 회사, 내가 내일 당장 관두고 만다.”
결과: 다음 날, 사표가 실제로 접수되어 있음. 게다가 본인은 보낸 적이 없음.


나는 아직도 어제의 프레젠테이션을 떠올리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화면엔 내가 만든 완벽한 PPT, 입에선 나온 건 버벅거림과 침묵.
상무님의 눈썹이 올라갈 때마다 내 사기는 0.8배 중력처럼 쪼그라들었다.

그렇다. 내의 발표는 완벽하게 망했다. 상무님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이따 내 사무실로 오세요!!"

일단 회의실을 나와 커피 머신 앞에 서 있다가, 헛웃음을 뱉었다.
“하… 이딴 회사, 내가 진짜 관두고 만다. 아무도 말리지 마.”

진심은 3%, 분노는 7%, 나머지 90%는 그냥 위로였다.
이 말로 오늘 하루를 간신히 견디려는, 중년 남성의 자기 위안.
그랬는데… 다음 날 아침 6시 40분.

나는 오늘도 평소보다 일찍 사무실에 도착했다.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그냥 찝찝한 꿈이었다고 생각하고 싶어서.

그런데 노트북을 켜자마자, 메일함에 딱 한 통의 메시지가 떠 있었다.

[사직서 수리 안내]
“정 부장님, 사직 요청이 수리되었습니다. 마지막 근무일은 이번 주 금요일입니다.”

… 잠깐. 내가? 내가 사직서를 보냈다고?
클릭해 보니, 어젯밤 11시 43분.
보낸 사람 : 정 부장
첨부파일 : 깔끔하게 작성된 사직서

제목 : 사직서 (진심임)
내용: 더 이상 버틸 수 없습니다. 이 선택에 후회 없습니다.
- 정 부장 올림

심지어 서명까지 있었다.

나는 속으로 반복해서 되뇌었다. ‘이건 실험이다. 이건 실험이다…’
스스로 되뇌면서도 속으론 깨달았다.

“이젠 농담도 조심해야 하는 세상이야.”

그날 오후, 나는 자리 정리를 하다가 서랍 안에서 10년 전 입사 때 받은 환영 편지를 발견했다.

“우리 팀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래 함께해요!”

그때 웃으며 썼던 동료의 글씨가, 오늘은 이상하게 멍하게 보였다.
나는 그 편지를 접어 뒷주머니에 넣었다.
마치, 아직 끝나지 않은 관계처럼. 그리고 생각했다.

“어쩌면… 내가 원한 건 관두는 게 아니라, 누군가 말려주는 거였는지도 모르겠다.”


실험 기록 03 – 다이어트의 반란

D+3. 아침 7시 18분
상황: 어젯밤 치킨을 뜯으며 한 말 – “진짜 내일부터 다이어트 시작할 거야. 이번엔 진짜라고.”
결과: 다음 날, 식생활 전면 개편. 음식은 ‘헬스 한 맛없음’으로 자동화.
운동 습관이 강제 부여됨. 의지는 사라졌고, 몸은 스스로를 조이고 있음.


전날 밤, 나는 서랍 안에서 직원 출입카드를 꺼내며 마지막으로 사무실을 떠났다.
상자엔 짐이 다 들어가지 않았다. 결국 커피잔은 책상 위에 남겨둔 채였다.
괜찮은 척 걸어 나왔지만, 엘리베이터 안에서 주먹이 떨렸다.
‘이게 진짜 끝이야?’

집에 돌아와 아무 말 없이 스마트폰을 꺼냈다.
습관처럼 배달앱을 켰다. 가장 자극적인 메뉴, 가장 빨리 오는 집.
왜 시키는지도 몰랐다. 그냥 뭔가를 씹고 깨무는 행위로 화를 삼키고 싶었다.

도착한 치킨을 들고 나는 식탁이 아닌 소파로 갔다.
한 입, 두 입… 기름이 입가에 번지고, 손가락은 점점 끈적해졌다.
씹는다는 감각만 남았고, 배부르다는 신호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어느새 빈 뼈가 가득 쌓여 있을 때쯤 거울 속의 나와 눈이 마주쳤다.
늘어진 티셔츠 아래, 복부 라인이 사라진 지 오래다.
회사도 없고, 역할도 없고, 체면도 없다.

나는 비어 가는 맥주캔을 내려놓고 중얼거렸다.
“진짜… 내일부터는 다이어트 시작할 거야. 이번엔 진짜라고.”

사실 다이어트가 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저 뭔가를 다시 ‘시작하는 사람’인 척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 순간, 옆에서 아들이 말했다. “그 말, 작년에도 들은 거 같은데…”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리모컨을 눌러 광고를 넘겼다.
그 한마디가 진심이었는지는 나도 몰랐다.

다음 날, 아침 모든 게 다르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냉장고가 가장 낯설었다.

삼겹살은 사라졌고, 닭가슴살이 진공포장으로 빛나고 있었다.
된장찌개 대신 미역귀 샐러드. 소스는 전부 ‘저염’이거나 ‘없음’.
그리고 냉장고에 붙은 쪽지 한 장.

여보, 이제 할 일도 없고, 핑계도 없잖아. 그동안 ‘바빠서 못 했다’는 다이어트, 이제는 정말 할 수밖에 없겠네.
냉장고는 정리해 뒀어.
삼겹살이 빠진 자리에 닭가슴살 넣었고, 자존심 빠진 자리에 건강이라도 채워보자.
다이어트는 시작이니까… 인생도 좀 다시 시작해 봐요.
– 아내가 (지켜보는 중)


웃기지 마. 난 선택한 적 없다. 그냥, 자기 연민에 젖은 패배자의 말버릇을 읊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 실험의 공포는 음식보다 몸이었다.

무릎도 안 좋고 디스크도 있는데, 아침 8시, 내 다리가 자발적으로 ‘런지’를 하고 있었다.
러닝화? 누가 꺼냈냐고 물으신다면, '저도 모릅니다. 근데 신고 있더라고요.'

심지어 점심시간이 되자 내 손은 자동으로 브로콜리를 향해 움직였다.
떨리는 내 의식은 외쳤다. “STOP! 우리는 브로콜리 싫어해!!”

하지만 입은 이미 씹고 있었다. 무표정한 표정으로. 무념무상의 자세로.

나는 다이어트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퇴직 이후에도 누군가에게 ‘달라졌네’ 소리 듣고 싶었을 뿐이었다.
나는 다시 누군가에게 존중받고 싶었고, 그걸 가장 손쉽게 입증해 줄 변화가 바로 몸이었다.

문제는, 그 말이 현실이 되었을 때 나는 내 몸의 주인이 아니었다는 거다.

입은 기름진 걸 원했지만, 혀는 브로콜리를 골랐고 심장은 러닝 앱을 켰으며 손은 아령을 들고 있었다.

치킨 광고가 나오는 TV 앞에서 나는 입을 다물고 스쿼트를 하고 있었다.

인간은 종종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하지만 그 거짓말이 현실이 되는 순간, 그 말은 더 이상 자기 위안이 아닌 자기 통제 장치가 된다.

나는 다이어트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실패자처럼 느껴지지 않기 위해 그렇게 말했을 뿐이다.

그게 정말 나였을까? 아니면 내가 되고 싶었던 나였을까?

진짜 무서운 건 말이 아니라, 말이 이끄는 방향을 모른 채 내뱉는 ‘나’ 자신이었다.


실험 기록 04 – 전설은 진실이 된다

D+4. 아침 9시 10분
상황: 아들 앞에서 허세 섞인 말 한마디 –
“아빠가 예전엔 인기 진짜 많았거든. 엄마한테 물어봐, 진짜야.”
결과: 다음 날, 정체불명의 인기와 호감도가 실생활에 부여됨.
하지만 현재의 나는 그 인기를 감당할 수 없음. 오히려 정체성 혼란 심화.


그날 밤, 나는 아들과 TV를 보다가 슬쩍 옛날이야기를 꺼냈다.
거기 나오는 남자 배우가 살짝 나랑 닮았던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주 살짝.

“아빠가 예전에 인기 진짜 많았어. 엄마한테 물어봐. 소개팅도 끊이지 않았고, 동아리에서도 맨날 나한테만 질문하고~”

아들은 콧웃음을 쳤다.

“아빠가? 그럼 왜 지금은 엄마한테 잔소리 듣기 바빠?”

나는 웃으며 리모컨을 눌렀다. 정확히는, 웃는 척했다. 그 말이 진심이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저, ‘지금의 나’에 대한 보상 심리 같은 거였을지도 모른다.
퇴직 이후, 누군가에게 ‘멋있었다’는 기억이라도 남기고 싶었던 건지도.


그리고, 다음 날. 무언가 이상했다.

정확히 말하면 나를 보는 시선이 달랐다.

편의점에 갔더니 계산대 너머 알바생이 묘하게 미소를 지었다.
“혹시… 배우 누구 닮았다는 얘기 안 들어보셨어요?”

배달을 받았더니 라이더가 내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형님, 목소리 진짜 좋으십니다.”

헬스장에 갔더니 처음 본 사람이 말을 걸었다.
“혹시 트레이너세요? 자세가 딱인데…”

나는 당황했다. 그리고 조금 설렜다. 하지만 동시에, 머릿속을 스치는 한 문장.

“이건 내가 만든 게 아닌데요?”

그날 저녁, 아내가 말했다. “요즘 왜 이렇게 들떠 보여? 밖에서 좋은 일 있어?”

나는 순간 망설였다가 말했다.
“그냥… 요즘 좀 괜찮아 보이나 봐.”

그러자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 그럼 인기 많던 그 시절처럼 설거지도 좀 폼나게 해 봐. 그때 인기 얻은 사람들은 다 매너 있었대.”

정곡이었다. 나는 지금 인기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인기 ‘있던 척’ 하는 중년 퇴직자였다.

다음 날, 사태는 더 심각해졌다.
동네 커피숍 바리스타가 내 이름을 외우기 시작했고 자주 가는 약국 직원이 내게 유산균 시음을 권했다.

“요즘 멋져지시는 것 같아서요~ 아무래도 면역도 챙기셔야죠.”

나는 순간 멈칫했다. 이 모든 시선이 기분은 좋았지만, 그럴 만한 자격이 나에게 있는가?라는 질문이 들었다.

퇴직했고, 강제 다이어트는 지속되고 있고, 은행 앱은 비밀번호보다 잔액이 더 짧다.

그런데 ‘예전에 인기 많았다’는 거짓말 하나로 다시 누군가의 관심을 받는 지금.
나는 그 말이 만든 유령 같은 자아를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실험 기록 05 – 사라지는 자존심, 사라지는 존재

D+5. 새벽 1시 02분
상황: 아들과 말다툼 끝에, 무심코 내뱉은 혼잣말. “아빠는… 없어도 되는 사람일지도 몰라.”
진심은 아니었다.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그냥... 졌다는 걸 인정하기 싫었던 중년 남자의 작은 독백.
그런데 실험 조건은 분명했다. “거짓말은, 말한 사람이 거짓임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아들과 TV를 보다가 사소한 말 한마디가 불씨가 됐다.
화면 속 스타트업 청년 CEO가 등장하자, 나는 습관처럼 한 마디 툭 던졌다.

“에이, 저런 건 다 쇼야. 현실은 안 그래. 저 나이 땐 아빠도 아이디어 넘쳤거든. 그땐 말이야—”

아들이 리모컨을 탁 내려놓았다.

“아빠, 진짜 그땐 뭐 했어요?”
“뭐긴 뭐야, 아빠가 대학교 다닐 때는…”

나는 일어섰다. 자세가 달라졌다. 팔짱을 끼고, ‘강의 시작’ 자세로 돌입했다.

“그땐 발표 하나 하려면 OHP 필름을 일일이 손으로 그렸지. 지금처럼 PPT에 효과 넣고 날리는 게 아니었어.”
“효과는 지금도 못 넣잖아요.”

정통 펀치.

“그래도, 그땐 열정이 있었지. 창업 동아리 회장도 했고…”
“근데 왜 지금은 집에서 아령 들다가 팔꿈치 나가요?”

정통 헤드샷.

“아빠가 회사에서 얼마나 많은 프로젝트를 했는지 알아?”
“그래서 그 회사에서 짐 싸들고 나온 거잖아요.”

피니시 블로우.

나는 순간 멍해졌다. 잠깐, 얘가 몇 살이지? 왜 갑자기 논리로 압살 하냐.
예전엔 “몰라요!” 하던 아이였는데, 이젠 “팩트로 혼내는 초등생”이 되어 있었다.

나는 속으론 울면서도 겉으론 쿨한 척 말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진짜요? 아빠가 그렇게 쉽게 인정하는 사람 아닌데.”

쐐기.

나는 말없이 방으로 들어가며 툭 내뱉었다.

“아. 어쩌면… 나는 없어도 되는 사람일지도 몰라…”


그 말이, 그냥 말이 아니게 될 줄은 몰랐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뭔가 낯설었다. 거실에선 누군가가 밥을 먹고 있었고, 분명 내 집인데, 낯선 공기처럼 차가웠다.

“아침부터 웬일로 일찍 일어났어?” 나는 아내에게 말하려다 멈췄다.
그녀가 내 얼굴을 보며 이상하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 누구세요?” 나는 장난처럼 웃으며 말했다.

“뭘 누구야, 나잖아. 당신 남편.” 그녀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천천히 일어났다.

말투는 낮았지만, 손은 벌써 스마트폰을 쥐고 있었다.

“죄송한데… 어떻게 들어오신 거죠? 지금 나가주시지 않으면 경찰 부를게요.”


그 순간, 아들이 방에서 나왔다.
눈을 비비며 내 얼굴을 보는가 싶더니, 엄마 뒤로 숨어버렸다.

“엄마… 이 아저씨 누구야…?”

그 순간 나는 내가 진짜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지갑은 여전히 내 주머니에 있었지만 모든 신용카드가 거부되었고, 은행에서는 "해당 명의는 없습니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핸드폰은 초기화돼 있었고, 카톡은 '새로 시작해 볼까요?'라는 메시지로 나를 반겼다.

병원에서는 진료 기록이 없다고 했다.
치킨집 포인트도 0.
공공도서관 대출 내역도, 자주 가던 이발소 예약도, 내가 이 세상에서 존재했던 흔적들이 통째로 지워져 있었다.

처음엔 솔직히 좀... 신났다. “이게 진짜 해방 아니야?”

잔소리도 없고, 기대도 없고, 눈치도 안 봐도 되는 삶.

벤치에 앉아, 편의점 샌드위치를 베어 물며 혼잣말했다.
“와, 이제부터는 진짜 내 맘대로 사는 거다.”

그런데 계산하려다 알바가 말했다.
“어... 그냥 가져가세요.” 그 말에 담긴 '안쓰러움'이 뼈에 박혔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이건 자유가 아니라, 삭제였다.

해질 무렵, 다시 집 앞에 섰다.
초인종을 누르고 누군가가 문을 열어주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그녀, 즉 아내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왜 또 오셨어요?”나는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돌아섰다.

그 집은 더 이상 내 집이 아니었다. 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다.

어제와 똑같은 자리에, 똑같은 자세로. 누군가 내 앞에 종이컵 하나를 떨어뜨렸다.

노숙자인 줄 알았나 보다. 나는 컵을 발끝으로 툭 찼다. 컵이 굴러가다 멈췄다.

“진짜… 없어도 되는 사람처럼 살아보니까… 진짜 없어지는 거네…”

그리고 웃으며 혼잣말했다.
“그래도 샌드위치는 맛있더라. 다행이지 뭐.”

그 순간, 누군가 내 어깨를 툭 쳤다.

“아빠. 공원에서 코 고는 거 들켰다. 민망하게.”

눈을 떴다. 아들이 있었다.
햇살이 눈부셨고, 옆엔 아내가 서 있었다.
언제나처럼, 잔소리 직전의 표정으로.

“창피하게 왜 여기서 자고 있어? 감기 걸리겠다.”


눈을 떴다. 모든 상상이 꿈처럼 끝나버렸다.

아들은 내 옆에서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었고, 아내는 집 안 어딘가에서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누가 봐도 평범한 오후. 그런데 그 평범함이 기적처럼 느껴졌다.

하루 동안 이 세상에서 '없어진 사람'으로 살아보니, 깨달은 게 있다.

나는 생각보다 많은 걸 가지고 있었고, 많은 말로 그것들을 부정하며 버티고 있었다.

지금까지 나는 말로 현실을 속이고, 말로 나를 숨기고, 말로 내 삶을 잠시나마 덜 아프게 덮어왔다.

“자료 다 됐습니다”, “내일부터 진짜 다이어트 시작할 거야”, “진짜 예전엔 인기 많았다고”

그리고 마지막엔 “나는 없어도 되는 사람일지도 몰라.”

하지만 이제는 안다. 말은 현실이 된다. 정말 그렇게 된다.
어쩌면 그건 마법이 아니라, 책임이라는 이름의 구조신호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다시 뱉게 된다면 이런 말을 하고 싶다.

“나는 아직 괜찮다.”, “오늘도 조금은 나아졌다.”, “이 말이 진짜가 되면, 나는 조금 더 살아갈 수 있을 거다.”



우리는 살아가며 수없이 많은 거짓말을 한다.
그러나 가장 위험한 거짓말은 “나는 아무 의미 없는 사람이다”라는 말이다.

그 말이 진짜가 되는 순간, 모든 문이 닫히고, 모든 관계가 침묵하고, 모든 기억이 나를 지워버린다.

그러니 나는, 이제부터 나를 살게 할 말을 고르기로 했다.

작지만 진심을 담은 말. 때로는 거짓이어도 괜찮은 말. 하지만 나를 존재하게 하는 말.

“아빠가 예전엔 인기 많았다고?”
그래, 그건 좀 부풀려진 진실이다.
그러나 그 말 덕분에, 난 아직도 내 자리에 앉아 있으니까.

이제 실험은 끝났다.
이건 단지 거짓말의 실험이 아니라, 말로 만든 나라는 존재에 대한 탐구였다.

그리고 나는 내일도, 또 다른 말 하나로 하루를 시작할 것이다.

그 말이 현실이 된다면 이번엔, 조금 더 잘 살아보고 싶다.


진짜 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당신이 자주 하는 거짓말을 보라.
혹시 오늘 말한 거짓말이 내일 진짜가 된다면, 우리는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침묵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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