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은 윤리인가?
지지난 주 금요일, 나의 휴가 계획을 앞당기게 만든 사건이 생겼다.
할머니의 죽음을 알리는 카톡 메시지에 잠시 멍해졌다.
모든 일을 접어두고 한국으로 가는 항공권을 알아봤다. 어린 아들과 부실한 체력의 소유자인 아내를 데리고 한국으로 이동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15시간의 이동 시간을 몸소 겪은 후에 나는 토요일 저녁이 깊어져서야 할머니 장례식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북적이는 인파를 뒤로하고 할머니의 영정 사진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죽음은 언제나 나에게 소중한 선물이다. 우리는 모두가 죽는다는 사실 앞에 겸손해지며, 현재 내 옆에 있는 가족들과 평번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일깨워주기 때문인다.
할머니의 영정 사진 앞에서 예를 갖춘 후 어두워진 장례식장 밖을 잠시 걸었다.
할머니는 어떤 기억을 가지고 가신 것일까?
만일 사람들의 기억을 다운로드하여 들여다 볼 수 있으면 어떨까?
그렇게 삶과 죽음 사이의 기억들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게 될까?
조용히 할머니를 기억하며 짧은 상상을 해보았다.
기억열람 장치 M.E.M.O 실험 보고서 (Memory Excavation & Manifestation Operator)
실험 목적
21세기 후반, 사망자의 뇌 데이터를 추출하여 기억을 열람할 수 있는 장치 M.E.M.O가 개발되었다. 기억을 추출하는 이 실험은 질문한다.
“기억은 유산인가, 침해인가?”
“망각은 무능인가, 혹은 생존인가?”
실험 장치
M.E.M.O 고인의 생전 뇌파 백업 데이터를 바탕으로 감정 결합형 서사 기억 구조를 시각화함.유족 동의 시 디지털 라이브러리 형태로 공개 가능.기억은 편집 불가.
있는 그대로, 그것이 조건이다.
열람은 유료 또는 무료, 신청 즉시 실시간 스트리밍 제공.
누구나 고인의 삶을 ‘제3자 시점’으로 관람할 수 있음. (단, 감정 피드백 시스템으로 인해 정서적 충격 주의)
나의 아버지는 과묵한 분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공룡같은 분이었다.
내가 M.E.M.O를 통해, 그의 기억을 들여다 보는 순간 나는 아버지의 생을 처음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첫사랑의 설레는 목소리, 고된 육체 노동을 마치고 퇴근하는 길에 떨리는 손, 아들들과 눈을 마주치고도 끝내 말하지 못한 미안함 그리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실수와 후회로 뒤섞인 눈물 한방울의 기억들.
나는 멈칫했다.
이건… 내가 알아도 되는 걸까?
기억은 유산이지만, 때론 유언보다 더 무거운 고백이기도 하다.
나는 잠시 장치를 껐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자신이 이런 식으로 아들들에게 기억되길 바랐을까?”
나는 더 이상 그의 기억을 탐색할 자신이 생기지 않았다.
국민 여배우였던 K의 기억 데이터가 전 세계에 무료 공개되었다.
그녀의 감정, 고뇌, 전성기의 빛과 무대 뒤의 눈물이 생생하게 펼쳐졌다.
팬들은 열광했다. ‘인간 K’의 고뇌에 감동했고, ‘배우 K’의 외로움에 눈물 흘렸다.
그러나 그녀의 딸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엄마는 배우로 기억되고 싶었지, 드라마 대본 옆에 몰래 적어둔 눈물의 메모로 기억되길 바라진 않았을겁니다.”
기억은 콘텐츠가 아니다. 삶은 전시용이 아니다.
기억을 열람하는 것은 과거를 체험하는 일이지만, 그 과거엔 여전히, 누군가의 ‘침묵의 권리’가 남아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이를 먼저 보낸 한 어머니가 있었다.
그녀는 매일, 아이의 기억을 M.E.M.O로 재생했다.
아이의 눈높이, 웃음소리, 넘어졌던 골목, 말문이 트이던 날…
그러나 반복된 열람은 고통의 늪이 되었다.
그녀는 끝내 M.E.M.O 장치를 바닥에 내던졌다.
기억은 사랑의 형식이지만, 반복은 고통을 박제한다.
망각은 잔인한 게 아니라, 살기 위한 본능적 균형이었을지 모른다.
만일 이런 상상들이 실제한다면 미성년자 사망자의 기억은 보호자 동의만으로 공개 가능한 것일까?
중증 치매 환자의 생전 기록이 공개된다면 기억의 주체는 누구일까?
자살자의 기록은 공감인가, 소비인가?
정치인의 과거 기억은 진실의 기록인가, 명예훼손인가?
어쩌면 이 짧은 실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기억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윤리의 시험대이다.
사랑했던 사람을 기억하는 일과, 그 사람의 모든 것을 파헤치는 일은 다르다.
기억을 지킨다는 건, 때로 그 기억을 닫아두는 용기이기도 하다.
기술이 기억을 열 수 있어도, 마음이 준비되지 않으면 열어선 안 된다.
우리를 앞선 가버린 사람들은 말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 침묵을 먼저 존중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M.E.M.O 실험 종료 후, 이 망할 장치를 반납했다.
기억을 다 읽고 나니, 나는 그 사람을 다시 모르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떤 이는 웃으며 말했다.
“아빠가 나 몰래 울었던 날을 봤어요. 이상하게 위로가 됐어요. 나만 아픈 게 아니었구나 싶어서요.”
잊는다는 건, 꼭 지워버리는 일이 아니라, 어떤 사랑을 조용히 내려놓는 일일지도 모른다.
오늘 우리가 조용히 덮은 누군가의 기억도 어쩌면 사랑의 가장 다정한 형태였을지 모른다.
그러니, 잊는 일도 가끔은 용기다.
지지난주, 할머니께서 긴 여행길에 오르셨습니다.
그분을 조심스럽게 기억의 가장 깊은 서랍에 모셔드리는 일이 생각보다 오래 걸렸습니다.
마음이 아직 완전히 정리되지 않아, 엉뚱한 실험은 간소하게 올립니다.
짧은 글로 인사드리는 점, 부디 너그러이 양해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