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내 인생 스포 당했습니다.

세월의 책 : 펼치지 말았어야 할 그 책

by 한자루




토요일 아침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침대 머리맡의 핸드폰이 울렸다.

“삐빅― 건강검진 예약 D-7일!”


아, 그랬다.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종합검진 시즌.
작년엔 ‘지방간 초기’라는 살벌하면서도 뭔가 애매한 진단을 받고, 그날 이후 “기름진 음식과 이별하자”는 결심을 했었지만…

어젯밤, 나는 치즈돈까스를 ‘드링킹’하고 있었다. 한 손엔 튀김, 한 손엔 콜라, 입속은 기름진 행복.

문득, 핸드폰 알림을 본 내 안에서 어떤 복합 감정이 피어났다.

“나는 왜 항상 이렇게 후회하면서 살지?”

“내가 뭘 잘못했길래 매번 같은 패턴이 반복되지?”

“혹시... 내 인생이 처음부터 이렇게 정해져 있었던 건 아닐까?”

그렇다.
아마 이건 건강검진 예약 알림이라기보다, 삶의 ‘리마인드 알람’이었을지도 모른다.
내 인생에 대해 미리 써놓은 책이 있고, 그대로 읽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만약, 한 권의 책처럼, 출생부터 사망까지 줄줄이 인쇄된 책이 있다면?

소위 말하는 ‘세월의 책’ 같은 것 말이다.
그걸 살짝 펼쳐보는 건 죄일까? 아니지. 내 인생인데. 스포일러가 아니라 예습이지.

그렇게 나는 쇼파에 누워 포테이토칩을 입에 넣다가 멈췄다

치즈돈까스가 위에서 소화되고, 엉뚱한 생각이 위에서 올라오던 그 순간, 내 머릿속 안쪽에서 무언가 '철컥'하고 열리는 소리가 났다.

말릴 틈도 없이 엉뚱한 상상 실험이 발동하고 있었다.


눈앞에,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내 두뇌가 펼쳐 놓은 상상 속 한가운데 커다란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회색빛 석조 건물, 고풍스러운 돔 천장, 자동문 대신 손잡이를 돌려야 열리는 구식 도서관이었다.

도서관 위엔 이런 간판이 걸려 있었다.

운명열람실 B동 (※ A동은 폐쇄 중 – 과거 집착자 과밀로 인한 임시 폐관)

현관문을 열자, 안쪽은 깜짝 놀랄 만큼 조용하고 서늘했다.

높은 천장, 먼지 낀 책장들이 사방에 둘러서 있었고, 책장 사이엔 오래된 목제 사다리가 구불구불 걸쳐 있었다.

중앙 홀에는 단 한 권의 책이 놓여 있었다.
금속제 거치대 위에 두 손 크기보다 훨씬 더 커다란, 한눈에도 ‘중년 남자의 중량감’을 품은 책이었다.

표지는 고동색 가죽. 모서리는 해지고, 곳곳에 커피 자국 같은 얼룩이 퍼져 있었다.
제목은 단순했다.

[정부장, 1973 ~ 2049]

가장자리에 꽂힌 책갈피들은 내가 과거에 세웠다가 실패한 결심들의 흔적이었다.
‘다이어트 계획표’, ‘영어단어장 1일차’, ‘내일부터 일찍 일어나기’, ‘육아 다짐 노트(공란)’

책 위엔 팻말 하나가 비스듬히 기대어 있었다.

※ 열람은 자유. 단, 수정 시 벌금 100만 원. (현실 스트레스로 청구됨)


나는 조심스럽게 책 위에 손을 얹었다.
표면은 따뜻했고, 묘하게 심장이 그 박자에 맞춰 뛰는 것 같았다.

그리고, 첫 장을 넘겼다. 실험이 시작되었다.



실험 개요

실험명 : '세월의 책' 열람 시 인간의 자유의지 변화에 대한 관찰
장소 : 피실험자의 상상 속 ‘운명열람실 B동’
피실험자 : 본인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소지한 중년 남성)
실험장치 : 세월의 책 (피실험자의 생애가 과거부터 미래까지 기술된 일기 형식의 도서)


실험 관찰 01- 정부장의 지난 세월


책을 펼치자, 한때 내 이름이 적힌 연습장처럼 낡고 묵은 공기 냄새가 피어올랐다.
무작위로 펼친 페이지는 뜻밖에도 너무도 평범했다.
“1985년 3월 12일. 봄소풍. 신발에 개똥 밟음. 아무도 안 알려줌. 하루종일 냄새남.”

나는 웃음 반, 놀람 반으로 책장을 넘겼다.
어릴 적 일기는 다 사라져 없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누가 훔쳐본 것도 아니고, 내가 직접 쓴 것도 아닌데 어째서…
그날 신었던 운동화의 감촉, 코를 막고 놀리던 친구의 표정까지 선명하게 떠올랐다.

다음 페이지.
“1988년 7월. 기말고사 성적표를 몰래 수정해서 엄마에게 보여줌.”

‘……이건, 어떻게 알았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말할 수 없는 비밀이었다. 그리고 심지어, 나 자신조차 잊고 있던 일이었다.
하지만 이 책은 마치 CCTV라도 달려 있었던 것처럼, 내 기억 속 잔상보다 더 정확하게 내 감정을 재현해내고 있었다.

한 장, 또 한 장 넘길수록 나의 삶은 상자 속에서 꺼내어지는 필름처럼 펼쳐졌다.
첫 실연, 대학 낙방, 군 입대 전날 밤의 울렁거림, 아버지 장례식에서의 허공만 바라보던 시선.
잊으려 했던 것, 숨기려 했던 것, 사랑했던 것까지 모조리 페이지마다 살아 있었다.

그중 몇 장에는 마치 낙서처럼 삐딱하게 써진 글귀도 있었다.

“2020년 4월. 다이어트 실패. 작심삼일 중 작심 이틀 반.”

그건 분명히, 내가 나를 조롱할 때 쓰던 말버릇이었다.

그렇게 킥킥 웃으며 읽다가 보니 어느덧 2025년 7월에 멈췄다.

오늘날짜... '쇼파에 누워 포테이토칩을 먹다 말고 멍하니 상상을 시작함.'

그 순간 깨달았다. 이 책은 단순한 연대기나 연표가 아니었다.
‘나만이 기억하는 나’보다 더 나를 잘 아는, 나의 거울이었다.

이쯤 되자 이 책이 장난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내 과거가 이렇게 정확하다면… 과연 미래는?

나는 책장을 덮지 못했다.

이 책이 진짜라면, 이제 다음 페이지는…내가 아직 모르는 ‘내일’이 적혀 있을 테니까.

내 손끝은, 점점 더 밝은 빛이 퍼지는 다음 장을 향해 미끄러졌다.
마치 무언가가 속삭이듯, “한 장만 더 보면 되잖아.” 라고 유혹하는 것 같았다.


실험 관찰 02 – 가까운 미래


그 다음 장. 날짜는… ‘내일.’
나는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켰다. 화면에 떠 있는 오늘의 날짜를 확인했다. 분명 내일 날짜다.

2025년 7월 26일. 오전 9시 43분.
정부장, 치즈돈까스에 맥주 2캔 마신 걸 후회 중.
아내는 이미 알아차림.
그러나 아내는 아무 말 없이 웃음. 오히려 그 웃음이 다소 불길함.


나는 책을 보며 멍해졌고, 동시에 위장 속에 돈까스가 다시 한 번 내 위를 찌르는 것 같았다.

순간, 식은땀이 났다.
그건 그저 한 문장이 아니라, 내 인생이 한 줄 요약된 회한의 알림장 같았다.

그런데 다음 줄이 더 심각했다.

오후 1시 10분.
아들이 물음. ‘아빠, 나 커서 뭐 될까?
정부장, 아무렇지 않은 척 ‘글쎄, 아직은 모르지’라 답하지만, 한참 후, 화장실에서 혼자 거울을 보다 말없이 한숨. 뭐가 되든 이 녀석 대학까지는 버텨야 할텐데...


아이의 질문은 장난처럼 던졌지만, 그 말이 자꾸 머리에 남아 맴도는, 중년 아빠의 한숨.

나는 책장을 덮었다.

책이 맞는지 확인하려던 건데, 그 짧은 예고편만으로도 내 마음이 이미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그날 밤, 혼자 거실에서 아이 사진을 보며 작은 한숨을 삼킨 것도, 세월의 책에 이미 적힌 대로였다.

예언은 충격이 아니라, 검증이었다. 책은, 나보다 내 미래를 먼저 알고 있었다.


실험 관찰 03 – 미래 거부 시도

좋다. 하지만 이대로 정해진 미래의 운명에 나를 맡길 순없다.

어떻게든 미래를 바꿔보고 싶었다. 세월의 책에서 다시 오늘 발생할 미래를 읽는다.

2025년 7월 28일. 오후 9시 13분.
정부장, 발마사지기 사용 중 강도 3단계로 설정.
기기 진동으로 소파 다리 흔들림.
컵받침 위 물컵 쓰러짐.
거실 바닥 젖음.
아내, 물자국 위를 지나며 미끄러짐.
정부장, 기기 전원 끄며 중얼.
"이건… 내 잘못은 아니잖아."


나는 이걸 피할 것이다.

우선 발마사지기를 박스째 창고로 이동시킨다. 소파 옆 컵받침과 물이 담긴 유리잔에서 물을 제거해서 치워버린다. 거실 바닥에 슬리퍼 배치한다. 이제 준비는 끝났다.

오후 8시 50분.
모든 위험 요소를 제거했고, 나는 의기양양했다.

그런데 8시 57분. 아내가 쇼핑백을 들고 들어왔다.
“당신 발바닥 계속 아프다며? 이거 신제품이래. 일단 써봐. 반품도 가능하다니까 써보고 이야기해줘. 별로면 내일 반품해야하니까.”

쇼핑백 안에는 최신형 발마사지기가 들어 있었다. 박스째 치워둔 구형은 창고에 있었지만, 신형은 새로이 ‘운명처럼’ 등장한 변수였다.

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말했다.
“그럼… 딱 5분만.”

책 속 문장이 스쳤다.
“정부장, 강도 3단계로 설정.”
그래서 나는 1단계로만 설정했다. 3분 뒤, 아들이 다가와 말했다.

“아빠, 이거 뭐야?” 아들의 손에는 앙증맞은 리모컨이 들려있었다.
그리고 이것 저것 누르기 시작했다.

‘삐빅— 3단계 진동 시작.’ 진동이 소파 다리를 타고 전달됐다.

그 순간 나는 그제야 컵받침 위 유리컵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는 걸 봤다.

‘아, 이건… 내가 안 치운 게 아니고, 아내가 다시 놓은 거구나…’

컵은 흔들리더니 쓰러졌고, 바닥엔 물이 퍼졌다.

9시 13분. 아내가 조용히 거실을 지나가다가 “앗” 하는 소리와 함께 미끄러졌다.

나는 발마사지기를 끄며 중얼거렸다.
“이건… 내 잘못은 아니잖아.”

나는 발마사지기를 끄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정말 내 잘못이 아닌 걸까?
어쩌면 내가 움직이기를 포기한 순간, 운명은 웃으며 되돌아오는지도 모른다.
이대로 가만히 두면, 아이의 미래도, 내 노후도, 똑같은 패턴 속에 갇힐 테니까.

자 이제 나의 반격의 시간이다. 나는 선택을 바꿨지만, 패턴은 내 주변을 통해 되돌아왔다.
운명은, 내 선택뿐 아니라,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의 경로까지 예측하는 방정식이었다.

이번에는 운명에 한방 맞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실험 관찰 04 – 유통기한과의 양자적 딜레마

2025년 7월 29일. 오전 8시 15분.
정부장, 아침에 커피 타려다 우유 상태 확인 안 하고 붓는다.
결과: 시큼한 맛. 입 헹구며 욕설.
우유통 흔들어보며, “이거 어제 산 거 맞지 않았냐?” 중얼거림.
냉장고 안에 날짜가 어중간한 우유 2통 발견. 가족 전원 침묵.

책장을 덮었다.
어쩌면 이건 대단한 사건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침에 찝찝한 우유를 한 모금 마셨을 때의 존재론적 모욕감은 겪어본 자만이 안다.

나는 냉장고 문 앞에 섰다. 그 안엔 반쯤 비어 있는 우유 두 통이 있었다.

하나는 지난주 장봐온 것, 다른 하나는 어제 아내가 사온 것 같은 모양. 하지만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

책에는 ‘확인 안 하고 붓는다’고 적혀 있었다. 나는 이번엔 확인하려다 말았다.

왜냐하면, 그 순간 이 우유는 양자물리학에서 말하는 ‘신선함’과 ‘상함’이 동시에 존재하는 중첩 상태이기 때문이다.

나는 우유를 그대로 두고, 대신 물을 끓였다. 티백 하나를 넣고, 조용히 녹차를 마시기로 했다.

내 안에서 무언가가 속삭였다.

“우유는 오늘, 실현되지 않았다.”

아내가 주방으로 나와 물었다.
“오늘은 우유 안 마셔?”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오늘은… 관측하지 않기로 했어. 아니 오늘은 녹차를 마셔보려고.”

아내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양자물리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관측하지 않은 우유는 상하지 않았다.
나는 그 상태를 보류함으로써, 미래의 찝찝함을 회피했다.

결정은 곧 실현이다. 그러나 때로 결정하지 않음이야말로, 유일한 개입이다.

우유는 그날 하루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으로 냉장고 속에 잠들어 있었다.

내 아침도, 망가지지 않았다.


나는 다시 운명열람실 B동으로 돌아왔다. 책은 여전히 중앙 거치대 위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책의 마지막 몇 장은 잉크가 번져 흐릿하게 보였다.

그 위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 페이지는 열렸습니다. 이 문장은 당신이 상한 우유를 피한 흔적입니다.”

나는 책장을 덮었다. 이번엔, 처음으로 두려움 없이.

책은 내 생을 기록하는 문서가 아니라, 내가 어디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지 비추는 거울이라는 걸


실험 관찰 05 – 아내의 세월의 책


며칠 동안 나는 내 책을 펴지 않았다.
피곤했거나, 무서웠거나, 아니면 그냥 자꾸 뭘 시키는 가족들 덕분이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내 책만 있을 리 없잖아? 그럼 아내 책도 있겠네?”

이건 과학적인 호기심이지, 궁상맞은 미련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만들었다.

“이건... 관계에 대한 실험이다. 타인의 운명 안에서 나는 어떤 인물로 기록돼 있을까?”

과학은 늘 타인의 희생으로 진보해왔다.
나는 과학적 양심에 따라, 몰래 아내 책을 꺼냈다.


“2012년 6월 12일.

남편이 결혼기념일을 까먹음.
본인은 ‘오늘 뭐 특별한 날이었나?’라고 물었고, 나는 '없어, 별거 아냐'라고 말함. 그리고… 세탁기 문을 쾅 닫음.”


나는 그 문장을 읽고 세탁기 문 소리가 10년 만에 리플레이되는 기분을 느꼈다.

다음 페이지

“2015년. 8월. 시댁 식사 자리에서 남편이 ‘우리 마누라는 원래 요리는 잘 못해요’라고 말함. 다들 웃었지만, 나는 안 웃었음. 대신 숟가락을 조금 더 세게 내려놨음.”


그때는 분위기 살리려던 유쾌한 농담이었는데. 그게 책에까지 기록될 줄은 몰랐다.

다음 페이지.

점점 무서워졌다. 그런데 멈출수가 없었다.

“2020년 3월. 아이가 고열로 밤새 앓았던 날. 남편은 거실에서 코 고며 잤고, 나는 혼자 아이 머리를 식히며 '이 사람은 정말 내 인생에 함께 있는 걸까?' 생각함.”


그 페이지를 넘기고 나서 손에 식은땀이 맺혔다. 나는... 그날 아팠던 건 아이가 아니라 나였다는 걸 이제서야 깨달았다.

다음 장에는 이런 메모가 적혀 있었다.

“이 사람은 나를 사랑하긴 하는 것 같다. 다만 기억력과 표현력, 눈치는 거의 유통기한 지난 요구르트 수준이다.”


나는 억울함보다 적확한 비유에 박수를 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리고 양심의 가책을 느낀 나는 한장만 더 보자고 속삭이며 페이지를 넘겼다.

“2025년 7월 27일. 이 사람은 요즘 종종 멍하니 있다.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말은 안 하지만, 나는 느낀다. 이 사람은 지금, 드디어 자기 이야기를 다시 쓰고 싶어 하는 중이다.”


그 문장을 보고 나는 책을 덮었다. 아내는 알고 있었다. 내가 내 책을 보고 있다는 것도.
내가 지워졌던 시간을 돌아보고 있다는 것도.

말이 현실이 되는 세상에서 진짜 조심해야 할 건, 내가 누군가의 현실을 바꿔버리는 그 말이다.

운명은 나의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남겨지는가의 총합이다.

이제 나는 책을 덮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이렇게 다짐했다.

“내일의 문장은 조금 더 조심해서 써야겠다.”

나는 아내의 세월의 책장을 덮으며 나의 상상실험도 덮어버렸다.

더 이상 나의 미래, 아내의 감정과 미래를 읽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날 밤 나는 오래도록 깨어 있었다.
책이 알려준 내 미래는, 기적도 없고 비극도 없는, 그저 그런 인생이었다.
하지만 그 ‘그저 그런 인생’이 이제는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아들의 방으로 걸어갔다. 자는 얼굴을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물었다.

“너는… 네 책을 읽고 싶을까?”

물론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평화롭게 숨을 쉬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우리는 알 수 없기에, 살아갈 수 있다.

미래가 백지인 이유는 그 안에 무한한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아직 아무도 쓰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묻는다.

당신이라면, 세월의 책을 읽겠는가? 읽는 순간, 그것은 여전히 ‘당신의 삶’일 수 있을까?

아니면, 모르는 채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진짜 나’의 삶일까?


물리학자 라플라스는 말했다.
“만약 어떤 지성이 이 우주의 모든 입자와 위치, 속도를 안다면, 그는 과거와 미래를 완벽하게 계산할 수 있다.”

즉, 세상은 하나의 거대한 당구대.
모든 사건은 이전의 사건에 의해 ‘쿵쿵’ 튕겨 나오는 정해진 운명.
우리가 느끼는 선택이란, 사실상 착각이라는 것이다.

내가 어제 치즈돈까스를 먹은 것도 사실 빅뱅 당시 우주 원자의 미세한 진동 때문일 수 있다.

하지만…양자역학이 그 논리를 살짝 비틀었다. 전자 하나의 위치조차 확률로만 예측되는 세상.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열기 전까지는 죽지도, 살지도 않은 중첩 상태.

만약 내 세월의 책이 1분마다 다시 쓰이는 무한 루프라면?
내가 페이지를 열람하는 순간조차, 새로운 결과가 확률적으로 생겨난다면?

이쯤에서 이런 생각이 든다.

미래란, 쓰인 것이 아니라... 계속 써지고 있는 것 아닐까?


읽는 순간, 그것은 여전히 ‘당신의 삶’일 수 있을까?
아니면, 모르는 채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진짜 나’의 삶일까?
그래서 나는 다시 묻는다.
당신이라면, 그 책을 읽겠는가?
나는?
글쎄… 우유 유통기한부터 확인하고 나서 생각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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