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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밤, 숲을 뒤흔드는 포식자의 냄새

운명의 방아쇠

by 한자루




빛이 사라졌다.

아니, 빛이 너무 많아져서 ‘없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모든 색이 하얗게 뒤엉키고, 모든 감각이 서로를 집어삼켰다.

글록은 입을 벌렸지만,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자신이 존재한다는 감각은 남아 있었지만,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짧은 데이터 전송음이 그의 청각 안쪽에 울렸다.

'기록 중지. 시공간 오차 발생. 다음 관측 지점...'

그리고 모든 것이 꺼졌다.


촤악...

무언가 진득한 진흙이 글록의 몸을 삼켰다.
글록은 눈을 떴다. 아니, 떠졌다고 해야 할까.
눈꺼풀이 낯선 공기 속에서 저절로 들렸다.

“크윽…”

숨을 들이마시는 순간, 비릿하고 짙은 습지의 내음이 코를 찔렀다.
부식된 나뭇잎, 축축한 흙, 살아 있는 날 것 그대로의 냄새.
어디선가 멀리서 우는 새소리가 들렸다. 낯선 리듬, 낯선 종.
공기에는 석유도, 금속도, 인공 성분도 없었다. ‘완전히 정제되지 않은 자연’ 그 자체였다.

글록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온몸이 수백 년 된 진흙과 낙엽에 눌린 채 움푹 꺼져 있었다.
다행히 생체 신호는 안정 상태로 돌아오고 있었다.

“알파-3, 어떻게 된 거지?”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글록은 정신의 일부를 집중해 신경 공유 채널을 열었다.
잠시 후 알파-3 와 연결된 감각 공명 회로인 다차원 신호망으로 알파-3의 목소리가 들렸다.

“글... 록...신호... 확인... 중...”

그는 고개를 돌렸다.

습지의 가장자리, 쓰러진 나무 등걸 위에 무언가 반쯤 묻혀 있었다.
알파-3의 표면은 진흙과 이끼로 덮여 있었고, 외형 보호막이 일시 해제된 상태였다.

“... 손상률 28%. 감각 모듈 재부팅 중. 시각 피드백 연결 시도... 완료.”

알파-3의 왼쪽 광학 센서에 희미하게 파란빛이 돌아왔다.

글록은 나무 등걸에 등을 기댄 채,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의 손 아래로는 살아 있는 나무껍질이 느껴졌고, 입 안은 젖은 흙과 이끼의 맛으로 가득하다.

“여긴... 지구가 아닌 것 같은데...?”

“표면은 점토성 진흙. 식물 잔해 41%, 발효 상태. 탄소 연대 추정 중...”

글록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단 한 줄기 바람만이 갈대 사이를 스쳤다.

그는 주변을 둘러봤다. 희미한 안개가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해는 떠 있었지만 흐린 구름 뒤에서 빛을 퍼뜨리지 못했다.
이곳은 조용했다.

“글록. 이곳은 지구가 맞습니다. 여긴 북반구 중위도, 숲과 습지 인접 지역. 해발 230m. 평균 기온 14도. 시간 좌표 역산 완료... 우린 지금... 기원전 8,700년경 지구에 서있습니다.”

“그럼 인류가 말하는 신석기란 말인가?”

“정확히는, 초기 정착 농경 전환기. 이 시대 인간들은 아직 ‘미래’라는 단어를 가지지 않았어요. 대신 씨앗, 불, 가족, 기억 같은 단어들을 품고 살아갑니다.”

글록은 조심스레 손을 들어 근처 나무의 껍질을 만졌다.

살아 있는 감촉. 땅 냄새. 낙엽. 수분. 공기, 모든 것이 낯설게 익숙했다.

“공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 276ppm. 산업 이전 수준. 무기 없음. 건축 구조 없음. 금속 신호 없음. 플라스틱 없음. 오염도 제로. 지구, 원시 회복 상태.”

글록은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알파-3가 글록 근처로 날아오며 말했다.
“글록, 누군가 우리를 이곳으로 보낸 겁니다.”

“보냈다고? 누가? 그리고 왜?”

“글쎄요. 하지만 신호 패턴은 분명했어요. ‘소녀를 따라가라.’ 바로 그겁니다.”

글록은 진흙에서 몸을 일으키며 이를 악물었다.
“소녀라... 인류 멸종의 원인이 한 아이와 연결돼 있다는 말인가?”

알파-3가 낮게 웅얼거리듯 답했다.

“원인일 수도 있고, 단순한 상징일 수도 있죠. 기억하세요, 글록. 메시지는 ‘너는 실패했다.’로 시작했잖습니까. 우리가 여기서 마주하게 될 그 소녀는... 인류 멸망의 원인을 기록할 때 반드시 짚어야 할 ‘축’이 될 겁니다.”

숲 너머에서 알 수 없는 새가 울어댔다.
글록은 짙은 흙냄새 속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이 시대가, 지구인들의 운명을 가르는 첫 번째 선택이 일어난 자리라는 뜻이겠군.”

알파-3가 잠시 멈췄다가, 특유의 건조한 어조로 덧붙였다.
“선택의 결과가 무엇이든, 우리 임무는 변하지 않습니다. 기록하고... 보관하는 것. 다만 개인적으로는, 희망 적인 시나리오가 자료 정리에 덜 피곤할 것 같긴하네요.”

글록은 난감한 표정이 되어 물었다.

“알파-3, 그럼 이제 우리가 뭘 해야 하지?”

“당장은 숨 쉬고, 조심하고, 살아남는 것부터요, 글록. 그리고...”

알파-3의 말이 잠깐 멎었다.

“지금, 발밑에... 그다지 당신을 좋아하지 않는 생명체가 접근 중입니다.”

“뭐?”

“뱀입니다. 혀로 공기를 맛보는 중이죠. 독성 지수 0.87, 물리면 꽤 고통스러울 겁니다.”

글록이 반사적으로 뒤를 돌았을 때, 진한 갈색 비늘을 가진 뱀이 낮게 고개를 들며 몸을 말고 있었다.

“움직이지 마세요. 고대 파충류는 움직이는 걸 더 민감하게 인식합니다. 아니면 그냥 뛰시든지요. 다만...”

툭. 알파-3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뱀이 글록의 팔을 향해 독니를 드런낸 채 튀어 올랐다.

순간, 글록의 몸 주위 공기가 미세하게 떨리며, 뱀의 이빨이 그의 팔에 닿기도 전에 무언가 투명한 막에 부딪쳐 튕겨나갔다.

뱀은 지면에 떨어져 혼란스럽게 숲으로 기어들어갔다.

“와... 글록. 방금 그거 마이크로필드 반응 맞죠? 저도 감시국 비밀 병기 기록에서만 보던 건데... 생체 신호가 위험선 이상으로 치솟으면 자동으로 공기 분자를 압축해서 벽으로 만든다는... 최신 무기라기보단 최신 보험이란 말이 더 적합할 것 같네요.”

"알파-3, 마이크로필드에 대해 알고 있었던 거야?”

“이론만요. 솔직히 말해, 저도 ‘이건 그냥 연구소에서 나온 괴담’쯤으로 치부했거든요. 근데 방금 보니까... 글록, 당신은 지금 공식적으로 ‘보험금 청구 1호 고객’이 되신 것 같은데요.”

알파-3는 덧붙였다.
“그리고 참고로, 방금 그 녀석은 이 시대 인간들이 ‘죽음의 실타래’라고 부르던 존재입니다. 이 지역 전설에 따르면, 한 번 물리면 사흘 밤낮을 울부짖다 숨이 끊긴다고 하더군요. 고통스러운 죽음... 어쨌든 잘 피하셨습니다.”

글록은 한숨을 쉬었다.

“이런, 시작부터 별로 마음에 안 드는군.”

“글록, 미안하지만 이건 아직 시작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환경분석 데이터를 보니 앞으로 늑대 같은 야생 무리, 낯선 부족, 그리고 당신이 방금 겪은 뱀보다 훨씬 더 집요한 생명체들이 기다리고 있죠. 아, 그리고 참고로... 인간도 그 리스트에 포함해서요."


글록과 알파-3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서 짙푸른 숲을 바라보았다.

새소리, 곤충 소리, 짐승의 울음. 도시의 배경음이 제거된 세계는 이렇게 시끄러웠다.

글록은 몸을 돌리며 짧게 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다친데도 없는 것 같고 걷는 데도 지장 없는 것 같군. 일단 여길 좀 벗어나자고.”

알파-3가 곧바로 응답했다.
“지형 스캔 완료. 반경 800미터 지점에서 연기 흔적 발견. 자연 발화가 아니라, 인위적 화기 사용으로 보입니다.”

글록은 숨을 고르며 탐사복의 접합부를 눌렀다.
순간 매끈한 외피가 갈라지듯 변형되며 표면의 질감이 거칠게 일어났다.
광택은 사라지고, 탐사복의 외피는 나무껍질 같은 패턴으로 뒤덮였다.
흙빛과 잎사귀 빛이 섞이며, 멀리서 보면 숲속에 섞여 사는 떠돌이처럼 보였다.

알파-3가 부드럽게 중얼거렸다.
“위장 모듈 작동률 82%. 비주얼만 놓고 보면 꽤 근사합니다. 다만... 가까이서 보면 여전히 너무 깨끗하죠. 흙칠을 권장합니다.”

글록은 무표정하게 땅바닥의 진흙을 움켜 위장 모듈이 작동된 탐사복 위에 문질렀다.
순식간에 표면의 인공적 질감이 흐려지고, 이끼 냄새가 옷에 배어들었다.
그는 근처 나무껍질을 찢어 허리에 둘렀고, 제법 튼튼한 나뭇가지를 꺽어 지팡이처럼 손에 쥐었다.
마침내 멀리서 본다면, 숲을 떠도는 원시 부족의 낯선 방랑자와 크게 다르지 않게 보였다.

그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제 관찰하러 가볼까. 인간들의 시선에 띄지 않도록 안전 거리를 유지해줘.”

알파-3가 부드럽게 떠오르며 길 안내를 시작했다.


짙푸른 숲을 헤치고 내려가자, 바람에 섞인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짙은 흙냄새와 다른, 탄화된 곡식 줄기의 향. 불의 흔적이었다.

알파-3가 낮게 속삭였다.
“연기 방향 확인. 북북서 800미터. 화기 사용 흔적. 취사 64%, 의례적 화덕 사용 21%, 농경지 잡초 태우기 15%.”

글록은 숨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농업 흔적이라...”

언덕 위에서 몸을 낮춘 채 그는 처음으로 이 시대 사람들의 정착지를 보았다.

아래, 작은 강 옆에 움막들이 늘어서 있었다.
움막 주변에는 곧게 세운 허술한 나무 울타리가 있었고, 그 안쪽엔 풀 대신 낮게 자란 곡식 줄기들이 보였다.
곡식더미를 덮은 항아리들이 움막 사이에 줄지어 있었고, 불빛은 그 곁의 화덕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이들이 항아리 근처에서 흙을 파헤치며 놀고 있었고, 개 몇 마리가 그 옆에 앉아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그 개들은 더 이상 야생이 아니었다.
짧은 꼬리를 흔들며 아이 옆에 바짝 붙어 있었고, 낯선 기척이 스치면 곧바로 울타리 너머를 경계했다.

알파-3가 감탄하듯 말했다.
“저 개들은 단순한 동반자가 아닙니다. 곡식 항아리와 아이들을 지키는 감시자 역할을 하고 있군요.
농업 사회 초기에 나타나는 전형적 패턴... 교과서에서만 보던 장면입니다.”

그 순간, 개 두 마리가 동시에 고개를 들어 언덕 쪽을 노려봤다.
짖음은 낮고 깊었으며, 마치 경고처럼 울려 퍼졌다.

글록은 즉시 몸을 엎드렸다.
“발각된 건가?”

알파-3가 빠르게 답했다.
“아직은 방향 탐지일 뿐이지만 오래 머물면 위험합니다. 이들은 항아리를 생명과 동일시합니다. 낯선 기척은 ‘도둑’으로 인식될 확률이 87%.”

글록은 짧게 숨을 고르며 눈을 돌렸다.
울타리 너머 불빛 속에서, 아이 하나가 항아리 뚜껑에 앉아 작은 손으로 곡식을 만지고 있었다.
그것은 그저 장난 같았지만, 글록은 직감적으로 알았다.
이 작은 곡식 더미가 이 시대 사람들에게는 목숨줄이라는 것을.

“우린 인류 역사에 영향을 미치면 안돼. 지금은 물러난다.”

알파-3가 고개를 끄덕이듯 부드럽게 낮게 떠올랐다.
개들의 짖음은 잠시 이어지다 이내 멎었다.


밤이 숲을 삼키자, 불빛 너머는 전부 칠흑이었다.
움막의 불은 흔들렸고, 바람에 실려온 냄새가 바뀌었다.
핏내. 젖은 털 냄새. 포식자의 냄새. 마을의 개들이 동시에 멈춰 섰다.

'으르르르르릉...'
개들의 등이 솟구치고, 송곳니가 드러났다.

글록은 언덕 위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아래 마을은 얇은 울타리 하나에 의지한 채, 한 줌의 불빛에 갇혀 있었다.

알파-3의 레이더 안테나가 빠르게 움직였다.
“탐지 완료. 열 감지 신호 아홉. 평균 체중 60킬로. 늑대 무리입니다. 바람이 마을 쪽으로 불고 있어요. 인간 냄새, 곡식 냄새, 개 냄새… 전부 유인 중.”

숲 속이 흔들렸다. 어둠 사이로 노란 눈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처음엔 두 개, 곧 여섯 개, 그 뒤로 더 많아졌다. 낮게 깔린 으르렁거림이 땅을 타고 전해졌다.

“그들은 항아리를 노리는 게 아니야.” 글록이 낮게 중얼거렸다.
알파-3가 응답했다.
“맞아요. 아이들과 개들이 오늘 밤 만찬 메뉴겠지요.”

개들이 울타리 앞에서 광분하듯 짖었다.
그 소리는 더 이상 단순한 경계가 아니었다.
절박한 경고. 그리고 공포였다.

움막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누군가는 불씨를 움켜쥐고, 누군가는 삐걱거리는 돌도끼를 들었다.
하지만 불은 약했고, 무기는 조잡했다. 울타리는 바람에도 흔들릴 만큼 허술했다.

늑대 무리가 동시에 움직였다. 풀숲이 갈라지고, 어둠이 덩어리째 튀어나왔다.
한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하늘을 찢었다.

알파-3가 날카롭게 속삭였다.
“글록! 우린 인류 역사에 관여하면 안 됩니다. 아시죠? 우린 지켜보기만 해야 합니다!”

글록의 숨이 거칠게 흔들렸다. 손은 이미 허리춤으로 가 있었다.

은하 감시국이 그에게 남겨둔 비상 장치가 있었다.

본래는 접촉 키트의 일부, ‘관찰 중 절대 쓰지 말라’는 규정이 붙은 물건.

하지만 지금, 아이들의 울음과 개들의 비명 앞에서, 글록은 손을 떼지 못했다.
개들의 짖음이 비명으로 바뀌고, 첫 번째 늑대가 울타리를 뛰어넘는 순간, 하늘 위에서 뭔가 짧은 빛이 반짝였다.

그 순간 글록은 알지 못했다.

자신의 손이 쥔 것이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앞으로 수많은 운명을 바꾸게 될 방아쇠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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