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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뫼비우스의 띠

타임슬립과 데자뷔

by 한자루




글록과 알파-3는 어딘가 익숙한 느낌의 복도 위에 서있었다.

바닥엔 오래전 물에 젖었다가 마른 자국이 불규칙하게 남아 있었다.

천장에는 끊어진 배관들이 뱀처럼 매달려 있었다.
곳곳에 부식된 모니터와 전선이 엉켜 있었고, 일부 구역은 이미 무너져 내린 흔적이 보였다.

글록은 발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여기... 왠지 전에 왔던 곳 같은데?”

알파-3가 앞장서 조명을 높였다. 빛이 벽을 따라 번져나가며 공간을 더 깊이 드러냈다.

그때였다.

빛줄기 끝, 긴 복도의 정중앙에 굳게 닫힌 문이 보였다.

“글록, 저도 왠지 이곳이 익숙한 느낌인데요. 마치 데자뷔를 체험하는 기분입니다. 그리고 안에서 아직도 살아 있는, ‘기록되지 않은 무엇’이 포착되고 있습니다. 신호가 일정하지 않지만... 기억과 공명의 형태로 감지돼요.”

글록은 잠시 침묵하다가 조용히 말했다.

“뭔가 기억이 날 것 같은 기분인데 잘 기억이 나질 않는군. 그런데 여긴 어디지?”

“분석 결과 여기는 버뮤다 삼각지역의 해저 실험실로 나타납니다. 일단 들어가 보시죠. 인간의 흔적이라도 남아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알파-3는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복도는 마치 폐허 위에 세워진 시간의 터널 같았다.
이따금 떨어지는 천장 파편 소리, 스멀스멀 피어나는 짙은 녹냄새, 벽을 따라 퍼진 균열...
모든 것이 멈춰 있었고, 동시에 무언가를 기다리는 느낌이었다.

“조심해요, 글록. 이곳은 구조적으로 매우 불안정합니다. 내장 센서에 따르면 천장 위쪽 잔해가 언제든지...”

"알파-3.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방금 전 네가 한 말도 전에 똑같이 들었던 느낌이야."

"기분 탓이 아닐까요..."

철컥!
알파-3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글록은 눈앞의 손잡이를 돌려 미닫이문을 열었다.
녹슨 경첩이 비명을 지르듯 울었다.

그 너머로, 어둠이 부서진 형광등 아래에 얼룩져 있었다.

글록과 알파-3는 잠시 말없이 그 안을 응시했다.

빛이 거의 닿지 않는 방 안, 바닥 한가운데 무언가가 있었다.

“저건...”

알파-3가 조심스레 앞으로 나섰다.
낮게 깔린 조명에 실루엣이 드러났다.

그것은 앉은 자세로 정지해 있었고, 한 손엔 금속 케이블이 감겨 있었다.

처음엔 마치 오랜 세월 동안 움직임을 멈춘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다가가자, 그 형체의 정체가 드러났다.


“AI 구조체네요. 슈트형 모델입니다. M1-R 시리즈. 고대 도시 방어용 모델로 분류되어 있죠. 마지막 사용 연도는… 2073년.”

글록은 눈앞의 슈트형 AI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다가갔다.
알파-3도 한 걸음 뒤에서 주시하고 있었다.

AI는 거의 기능을 멈춘 듯 보였지만, 유리 패널의 중앙엔
희미한 문장이 반복적으로 깜빡이고 있었다.


전송 대기 중…
기록을 열람하시겠습니까?


글록이 고개를 끄덕이자, AI의 가슴부에서 조그만 포터블 장치 하나가 튀어나왔다.
그 순간, AI의 내부에서 짧은 음성이 나왔다. 전기장 간섭으로 노이즈가 뒤섞였지만, 확실히 인간의 목소리였다.


만약 이걸 보고 있다면... 당신은 이번에도 또 실패한 거야.
당신이 그 소녀를 지키지 못했다는 것.
하지만 여전히 기회는 있어. 그러니 이제라도 기억해.
유일한 길은... 그 소녀를 따라가는 거야... 인류가 사라진 이유가 궁금하다면, 잊지 마...
소녀를 구하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야. 길이 열리면 그 길을 따라가서 소녀를 구해.

하지만 조심해. 소녀 곁에 맴도는 수많은 목소리들을.
그 목소리들은 얼굴을 바꾸고, 시대를 바꾸며, 끝내 인류를 멸망으로 몰아넣을 것이다.
그것을 막는 것이 당신의 임무야. 그리고 그 목소리들을... 절대 믿지 마...지지지직


그 말을 마지막으로 AI는 움직임을 멈췄다.

정적. 쓸려간 숨결처럼 사라져 버린 소리. 공기가, 아니 시간 자체가 얼어붙은 듯했다.

금속 케이블에 감긴 슈트형 AI는 아무 말 없이 멈췄다.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글록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바로 그 순간, 글록은 모든 것이 명료하게 기억나기 시작했다.

“... 기억났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뇌리에 꽂히는 힘이 있었다.
그 한 마디에 알파-3가 고개를 돌렸다.

“기억이요?”

글록은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술을 달싹였다. 말하듯, 되뇌듯.

“소녀가... 있었지. 이름은... 그래. 리아!”

그 이름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장면들이 터졌다.

늑대들의 거친 숨소리와 누런 송곳니, 장로의 푸르스름한 막대기, 눈을 질끈 감은 어린 리아. 그녀가 허공으로 떠올라 최후의 에너지를 방사하던 순간 그리고... 늦었다는 절망.

“그래... 우린... 실패했었지...”
글록은 말끝을 흐렸다.
그 목소리는 건조했지만, 그 속에는 짐처럼 무거운 죄책감이 담겨 있었다.

알파-3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게 말이죠... 저도 그 장면이 떠오르는 것 같아요. 혹시 우리는 루프에 갇힌 게 아닐까요?”

“루프? 루프든 운명이든, 확실한 건 하나야. 그 아이가 열쇠라는 것.”

알파-3는 잠시 상황을 분석하며 메모리 속에 데이터를 탐색하고 있었다.

조명이 깜빡였다.
멀리서, 자동문 하나가 스르륵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 어린 소녀의 웃음소리가 퍼졌다.

'쉿!' 글록이 긴장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그 웃음소리는 마치 환청이었던 것처럼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글록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그래 이번엔, 절대로 놓치지 않을게.”

천천히, 둘은 소녀의 웃음소리가 들렸던 자동문을 향해 한 걸음씩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그 순간. 구조물 중심에 있는 원형 홀 바닥이 강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글록! 공간 왜곡 반응! 루프 유사 패턴 감지!”

알파-3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시공간 흐름이… 벡터를 스스로 조정하고 있어요! 물러나세요!”

그러나 이미 늦었다.

슈욱...

진동이 아니라, 흡입이었다.
바닥 중심이 움푹 꺼지며 공간 자체가 뒤틀렸다.
중력은 아래로 향하지 않았다.
몸이 뒤로, 옆으로, 안쪽으로, 위로 동시에 끌려갔다.

“알파!”
글록이 소리쳤다. 동시에 그의 발밑이 사라졌다.

“중력 기준점 붕괴! 끌려들어 갑니다... 아... 아아... 악!”

알파-3가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시야가 부서졌다. 앞, 뒤, 위, 아래가 사라졌다.
의미를 가진 모든 방향이 녹아내렸다.

글록의 시야가 뒤엉키며 눈앞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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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