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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새로운 폭력의 시작

원형 경기장의 눈물

by 한자루


“글록, 꽉 잡으세요.”

알파-3의 목소리가 귀 안쪽을 울렸다.
그리고, 빛이 찢겼다. 순간, 세상이 뒤집히는 듯한 충격이 밀려왔다.

공기 중의 분자들이 뒤엉키며 폭발음처럼 쏟아졌다.
그다음엔 함성이었다. 수천, 아니 수만 명의 목소리가 서로 다른 방향에서 쏟아져 들어왔다.

“GLO-RI-A! GLO-RI-A!”

글록의 시야가 흐릿하게 돌아왔다.
손끝이 떨렸다. 무거운 금속 냄새, 피와 흙이 섞인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그는 반사적으로 왼손을 움켜쥐었다.
두필의 말과 이어진 두꺼운 가죽끈이 손목에 감겨 있었고, 손가락 사이로 피가 배어 나왔다.

말이 이끄는 전차 위에 글록이 서있었다.

피비린내와 먼지, 군중의 함성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GLO-RI-A! GLO-RI-A!”

글록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 여긴, 어디지?”

글록의 시야가 점점 또렷해졌다.
그의 눈앞에는 거대한 돌벽과 붉은 흙으로 덮인 경기장.
태양은 바로 머리 위에서 타올랐고, 로마의 원형 경기장이 한낮의 빛 속에 펼쳐져 있었다.

수만 명의 군중이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피비린내와 뜨거운 먼지, 쇠붙이의 마찰음이 하늘을 울렸다.

“글록, 우리... 로마입니다.”
알파-3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정확히는 서기 2세기. 원형경기장의 중앙입니다. 관광 패키지는 없고, 피비린내 옵션은 무료예요. 그리고... 글록, 당신은 거기에 딱 맞는 검투사의 복장을 하고 있네요.”

글록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붉은색 가죽 흉갑, 녹슨 검, 손목에 묶인 가죽끈. 무릎 아래까지 이어지는 샌들이 땀과 먼지에 젖어 있었다.

그의 왼손엔 피가 섞인 칼이, 오른손엔 방패가 들려 있었다.

“... 이건 너무 비약이 심한 거 아니야? 갑자기 검투사라니... 어이가 없군.”

글록의 앞쪽, 약 150미터 거리에 키 195cm, 체중이 120kg이 넘어 보이는 거구의 남자가 전차 위에 늠늠한 자태로 올라서 있었다.
거대한 팔뚝에 감긴 쇠사슬 끝엔 철퇴가 매달려 있었다. 철퇴가 원을 그릴 때마다 공기가 찢어졌다.
피로 얼룩진 흙먼지가 일며, 경기장의 군중이 열광했다.

“DOMI-TI-ANUS! DOMI-TI-ANUS!”

알파-3가 긴급 분석을 시작했다.
“대전 상대, 도미티아누스, 체중 125kg. 근섬유 밀도 3.8배. 그의 신경 반응 속도는 인간 평균의 4.2배. 제국 검투사 등급 최상위 클래스입니다."

철제 갑옷은 태양빛에 녹아내리는 듯 빛났다.

“DOMI-TI-ANUS! DOMI-TI-ANUS!”

군중은 신을 부르듯 외쳤다.

“로마는 신을 흉내 내고 있었군.”

글록의 음성이 긴장감으로 낮게 울렸다.


도미티아누스가 정중한 태도로 군중 속에 있는 황제에게 고개를 숙여 예의를 표했다.

콜로세움의 모래는 검붉게 물들었고, 군중은 한 덩어리의 괴물처럼 웅성거렸다.
그 중심, 황제 티투스가 황금 의자 위에서 손을 들어 올렸다.

“오늘은 신의 심판이 이뤄질 날이다.”
그의 목소리가 확성기처럼 경기장을 울렸다.
“로마는 신의 손끝에서 피어났고, 피로써 영원할 것이다!”

군중이 폭발했다.
“GLO-RI-A! GLO-RI-A!”

그의 옆에는 흰 망토를 두른 원로원의 최고 장로, 세르비우스가 있었다.
주름진 눈가는 차가웠고, 입가에는 미묘한 미소가 번졌다.

황제의 곁에 선 루키우스 세르비우스 바렌티누스는 마치 다른 시대에서 잘못 떨어진 인간 같았다.

그의 얼굴은 대리석처럼 창백했지만, 미세한 주름마다 냉철한 계산의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왼쪽 뺨에는 오래된 화상의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고, 그 위를 가늘게 흐르는 은빛 신경선이 살짝 빛났다.
마치 인간의 살갗 아래에 기계의 회로가 숨겨진 듯했다.

그의 눈은 검푸른 유리처럼 빛났고, 시선은 늘 상대의 심장보다 반 뼘 아래를 겨눴다.
마치 사람의 말을 듣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약점을 분석하는 듯한 눈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그의 입가의 미소였다.
냉혹하지만, 완벽히 통제된 미소.
죽음조차 실험의 일부로 여기는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신을 관찰하는 자의 미소.

황제의 옆에서 세르비우스가 조용히 속삭였다.
“폐하, 오늘의 피는 신의 증거가 될 것입니다. 피가 끓지 않는다면, 신도 죽은 것이겠지요.”

티투스의 눈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노예 출신 검투사 도미티아누스. 그는 제국의 가장 완벽한 전사이자, 가장 불완전한 인간입니다.”

황제의 시선이 세르비우스로 향했다.
“그자가 왜 특별하지?”

“폐하께서도 아시겠지만 그는 15년간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검투사입니다. 그의 피 속에는 신의 코드가 있습니다.”
원로원의 장로인 세르비우스의 눈이 도미티아누스를 꿰뚫을 듯이 바라봤다.
“제국을 위해 싸웠지만 노예로 떨어진 불운의 전사, 도미티아누스. 그에게 한 가지 선택을 주었습니다.”

황제가 흥미로운 듯 턱을 괴었다.
“그 선택이란?”

“그의 딸을 살리는 것입니다, 폐하.”
세르비우스의 미소는 길게 늘어졌다.
“그가 이기면 둘 다 자유를 얻습니다. 그러나 패하면, 그는 사자 밥이 되고, 딸은 신에게 바쳐질 겁니다.”

황제가 천천히 웃었다.
“좋군. 내가 의도한 것이 그런 것이지. 신도 신선한 피를 좋아할 테니.”
황제 티투스의 시선이 그 소녀와 도미티아누스를 오가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 옆, 군단장 마르쿠스 바로가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에는 불편한 진심이 섞여 있었다.
“폐하, 그 아이를 제물로 삼는 건… 제국의 명예를 더럽힐 수 있습니다.”

황제는 냉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명예보다 중요한 건 신의 권위다, 마르쿠스.”

세르비우스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걱정 마십시오. 이건 단순한 경기 이상의 것이 될 것입니다. 황제 폐하가 명령하신 대로 모든 것이 우리 로마제국이 영원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벤트가 될 것입니다.”


그 아래쪽 한 가냘픈 소녀가 쇠사슬에 묶여있는 그늘 속, 젊은 여사제 루키아가 리비아의 손을 잡고 있었다.
“겁내지 마, 리비아. 네 아버지는 이 싸움에서 이겨서 널 구할 거야.”
“아니요. 아버지는... 죽게 될거에요.”
소녀의 말에 루키아의 손이 떨렸다.
“누가 그런 말을 했니?”
“세르비우스 장로님이 그랬어요. 우리 아버지가 죽어야 로마가 산다고요.”

루키아의 눈이 커졌다.
“아니, 어째서 도미티아누스가 죽어야 로마가 산다는 거지?”
그러나 더 묻기도 전에 병사들이 다가왔다.
루키아는 조용히 리비아의 손을 놓았다.
“기억해. 너는 제물이 아니야. 너는… 로마의 새로운 시작이 될 거야.”


그 시각, 원로원 집행관 타르퀴니우스는 두루마리를 펴고 있었다.
수십 마리의 비둘기가 경기장 위를 날아오르며 함성을 뒤덮었다.
그는 붓을 적시며 중얼거렸다.

“오늘, 신의 실험이 성공할 것이다. 로마는 신의 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옆에서 그의 동료가 냉소했다.
“자네는 기록을 믿나, 타르퀴니우스?”
그는 시선을 들지 않은 채 답했다.
“기록은 믿는 게 아니라, 남기는 거지. 진실은 언제나 승자의 펜으로 쓰인다네.”


황제 티투스가 손을 다시 들어 올렸다.
“검투사 도미티아누스, 나서라!”

콜로세움의 문이 열렸다.
톱니바퀴가 달린 전차가 번개처럼 튀어나왔다.
건강한 말 네 필이 전차를 끌고 있었고, 철퇴가 햇빛을 반사했다.
군중이 함성으로 폭발했다.

“피를 보여라! 피를 보여라!”

황제의 손이 다시 들렸다.
“이방의 전사여! 로마와 신의 심판을 준비하라!”

황제 티투스가 웃음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글록을 내려다 봤다.

글록의 전차는 말 그대로 고물이었다.

검투사들의 시합용 보조 수레를 급조한 듯한 낡은 구조, 바퀴는 삐걱거리고 축대는 기름기가 말라 있었다.

그의 말 두 마리 역시 한눈에 봐도 비교가 되지 않았다.
한 마리는 왼쪽 눈이 탁했고, 다른 한 마리는 다리에 흉터가 남아 있었다.
숨결은 불안했고, 움직임엔 군용 말의 위엄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 위에 선 글록의 손에는 녹슨 칼과 금이 간 나무 방패뿐이었다.


타르퀴니우스의 동료가 낮게 중얼거렸다.
“저 자는, 처음 보는 검투사인 것 같은데... 어디서 온 자인가?”
타르퀴니우스가 대답했다.

"정확한 정보는 없네만 그저 북방의 브리타니아 전선에서 생포된 자라고 하는 것 같군. 로마의 식민 통치에 반란을 일으킨 부족의 잔당이라 들었던 것 같아. 그러나 저 이방인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존재일지도...”

그의 동료가 코웃음을 쳤다.
“그 야만의 땅에서 온 자가 감히 황제 앞에 서다니, 보나마나 산산히 찢겨 군중들의 폭력성을 달래줄 장난감 신세겠군.”

타르퀴니우스는 미묘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럴까? 나는 고대 기록으로 전해오는 ‘로마의 신들은 피를 통해 신의 뜻을 증명한다.’라는 뜻이 오늘 저 이방인의 피로 증명될 것같은 예감이 드는군.”


도미티아누스가 전차 위에서 포효했다.

“신의 이름으로! 로마를 위하여!”

도미티아누스의 전차가 먼저 움직였다. 말발굽이 모래를 찢으며 돌진했다.
바퀴의 톱니가 회전할 때마다 불꽃이 튀었다.

“속도 27m/s. 충돌까지 2.4초. 우리 전차가 좀 느리긴 해도 걱정 마세요. 그 대신 우리는 계산이 빠르잖아요.”

“좋아, 그럼 머리로 싸워야겠군.”

알파의 음성이 즉각 튀어나왔다.
“그런데 로마를 위해 싸우는 거면, 최소한 로마 보험이라도 가입해야 하는거 아닐까요?”
“알파, 지금 농담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
“맞아요. 하지만 이제 곧 죽을지도 모르니까 그럴 때일수록 농담이 필수죠.”

글록은 고삐를 틀었다. 전차가 비틀리며 모래를 일으켰다.
그 사이 도미티아누스의 전차가 바람처럼 글록을 향해 내달렸다.

날카로운 그의 톱니가 글록의 전차를 스쳤다. 불꽃이 튀었다.

“전차가 다시 돌아옵니다. 충돌각도 14도. 회피 불가능.”
“피할 수 없다면 뛰어내려야겠지.”

그는 전차에서 몸을 던졌다. 글록이 뛰어내리는 순간 그의 마차는 도미티아누스 전차의 바퀴 톱니에 산산이 부서졌다.
모래와 전차의 파편이 섞여 하늘로 솟구쳤다.

알파의 목소리가 울렸다.
“적 궤도 분석 완료. 다음 충돌 지점 예측 중…”

도미티아누스의 전차가 글록을 향해 다시 돌진했다.

고양이가 쥐를 쫓은 형상처럼 글록은 있는 힘을 다해 달렸지만 전차의 속도를 감당할 수 없어 보였다.
모래가 공중으로 솟구치고, 말의 발굽이 번개처럼 내리쳤다.

“여전히 속도는 27m/s. 물리적인 속도로는 완전히 불리합니다.”
알파-3의 목소리가 차분했지만, 글록의 눈가에는 땀이 맺혔다.
“그럼 머리를 더 써야겠군.”

그는 오른손의 녹슨 칼을 반쯤 꺾어 손목에 걸었다.
도미티아누스의 전차가 코앞에 다가왔다.
칼날이 번쩍였다. 쇳소리와 함께 전차 바퀴의 바깥쪽 톱니가 스쳤다.
칼이 반쯤 부러지며 불꽃이 터졌다.

“좋아요. 한 번 더 그랬다간 팔이 날아가겠지만요.”
“감사한 조언이군.”

도미티아누스의 전차가 다시 돌진해 왔다.

이번엔 글록이 왼쪽으로 몸을 굽히며 모래 위를 구르듯 회피했다.
톱니가 어깨를 스치며 살점을 베어냈다. 붉은 피가 흙과 섞였다.

알파-3가 외쳤다.
“출혈 14%. 인간 기준으로는 치명적이에요.”
“잊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인간이 아니라고.”
그의 눈이 푸른빛으로 번쩍였다. 그는 왼손으로 피 묻은 모래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도미티아누스의 세 번째 돌진이 다가오자, 그는 그 모래를 전차의 말 쪽으로 던졌다.
말들이 놀라며 방향을 틀었다.

“좋아요. 말의 시각 방해 성공. 하지만 바퀴는 여전히 살벌하네요.”
“그 바퀴가 다음 목표다. 전차가 다시 우리 곁을 지나칠 시간과 위치를 알려줘.”

글록은 부러진 칼끝을 역으로 잡고 달려 나갔다.
도미티아누스의 전차가 지나가는 순간, 글록은 바닥에 몸을 던지며 칼끝을 톱니 축에 꽂았다.
‘쾅!’ 쇠의 비명과 함께 톱니가 끼었다.

말이 비명을 지르며 멈췄다. 전차의 한쪽 축이 뒤틀리며 부서졌다.
도미티아누스의 몸이 전차 위에서 흔들렸다.

“좋아요! 한쪽 바퀴 파괴! 물리 법칙이 우리 편이에요.”
“아니, 이번엔 중력의 편을 좀 빌렸을 뿐이야.”

도미티아누스가 균형을 잃은 채 전차에서 뛰어내렸다.
전차는 회전하며 모래 위를 뒹굴었다. 바퀴가 공중으로 튀어 오르더니, 관중석 아래 벽에 부딪혀 박살이 났다.

그 순간 글록의 몸이 휘청였다. 허벅지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도미티아누스의 쇠사슬이 지나가며 그를 베어간 것이다.

알파-3가 외쳤다.
“근육 손상 22%. 움직임 제한 예상. 이쯤에서 항복 제스처라도 해보실래요?”
“내가 알기로 로마엔 그런 규칙이 없는 걸로 아는데.”
“그럼, 계속하시죠. 인간들은 피를 원하니까요.”

글록은 숨을 고르며 다시 자세를 잡았다.
도미티아누스가 땅에 내려서 있었다. 거대한 그의 키가 글록을 압도하고 있었다.

“전차는 끝났군.”
“그래, 이제 인간 대 인간이지.”

알파-3가 미세하게 웃으며 글록에서 속삭였다.
“글록 당신은 인간이 아니지만요.”
“일단 그건 비밀로 하자.”


도미티아누스가 철퇴를 휘둘렀다. 공기가 갈라졌다.
글록이 방패를 들었지만, 나무 방패는 한 번에 부서졌다. 조각들이 공중으로 흩날렸다.

도미티아누스가 다시 돌진했다.
지면이 울렸다. 쇠사슬이 공중에서 원을 그리며 불을 뿜었다.

글록은 숨을 고르며 낮게 말했다.
“알파, 충돌 궤적 분석. 0.4초 후 오른쪽 하단에서 진입한다.”
“인간 기준으로는 불가능한 반응 속도예요.”
“좋아, 다행이군. 난 인간이 아니니까.”

그는 왼발을 깊게 박았다. 모래가 발뒤꿈치로 뭉개졌다.
철퇴가 내려치자 글록은 한쪽 무릎을 굽히며 손목의 각도를 틀었다.
철퇴가 바닥을 때리기 직전, 그는 전투판의 금속 파편 하나를 손으로 끌어당겼다.

‘쾅!’
파편이 충격을 흡수하듯 튕겨 올라갔다.
글록은 그것을 지렛대처럼 발로 밀어 올렸다.

“지렛대의 법칙. 힘은 크기보다 거리에서 증폭된다. 그게 회전의 수학이지.”

파편이 회전하며 도미티아누스의 무릎을 강타했다.
도미티아누스는 상당한 고통으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좋아요, 17% 충격 전달 성공. 인간이라면 고통을 느꼈을 텐데요.”
“저 친구는 인간이 아닌 것 같아.”

도미티아누스는 곧바로 일어서며 쇠사슬을 회전시켰다.
그 궤적이 빛처럼 일렁였다.
글록은 모래 위를 미끄러지며 몸을 낮췄다.

“관성은 항상 같은 방향으로 작용한다…”
그는 속삭였다.
“그러니까 방향을 바꾸면, 힘이 나를 도와주지.”

그는 발끝으로 모래를 차올렸다. 도미티아누스의 쇠사슬이 모래를 가르며 방향을 잃었다.
그 틈에 글록은 몸을 회전시켜 상대의 팔꿈치 뒤로 파고들었다.
팔꿈치 관절을 지렛대 삼아, 어깨를 꺾었다.

‘드득!’ 뼈와 살이 동시에 비틀리는 소리.

“힘의 전달 경로는 짧을수록 빠르다. 그리고 네 몸은 너무 길어.”

도미티아누스가 이를 악물고 반격했다. 그의 주먹이 글록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두둑... 갈비뼈에서 괴상한 소리가 터졌다. 글록의 몸이 회전하며 모래 위를 굴렀다.

“갈비뼈 두 개 금열. 그래도 그 공식은 꽤 우아했어요.”

"알파-3, 인간들이 한 이야기 중에 이런 게 있어. 끝날 때까진 아직 끝난 게 아니라고."

글록은 흙 위에서 반쯤 일어나며 도미티아누스를 바라봤다.

도미티아누스의 눈동자는 오히려 차분했다.

강한 적을 만날 때마다 더 침착하게 움직이는 것이 그의 장점이었다.

도미티아누스는 바닥에 쇠사슬을 주어 들어 흔들며 글록을 향해 차분히 걸어 나갔다.

글록은 회전하는 쇠사슬을 바라보면 혼자 중얼거렸다.

"반사각은 입사각과 같다.”

그는 근처의 부서진 전차 부품을 집어 들었다. 금속판의 표면이 햇빛을 반사했다.
도미티아누스가 회전하는 쇠사슬을 내리치는 순간, 글록은 금속판을 기울였다.
쇠사슬의 궤적이 반사각을 따라 튕겨져, 옆의 기둥에 부딪히며 도미티아누스의 팔에 얽혔다.

도미티아누스가 잠시 몸을 비틀며 쇠사슬을 끊었다.
그의 눈에서 붉은빛이 번쩍였다.

“좋아요. 그가 화났어요.”
“그래. 화가 난 적은 계산이 흐트러지는 법이지.”

글록은 주위를 스캔했다. 모래, 파편, 부서진 전차 조각. 그의 눈이 미세하게 빛났다.
“마지막이다.”

그는 부서진 바퀴의 중심축을 향해 뛰어들었다.
“알파, 회전 모멘트 계산!”
“지금요? 여긴 경기장이에요, 물리 실험실이 아니고!”
“나도 안다고. 그러니까 지금 해!”

글록이 바퀴 조각을 밟아 회전하며 도미티아누스의 목 뒤로 뛰었다.

몸 전체를 회전 운동량으로 바꿨다. 팔꿈치로 내려찍었다.
‘쾅!’ 도미티아누스의 머리가 뒤로 젖혔다.

거대한 몸이 비틀렸다. 잠시, 균형이 무너졌다.

“무게 중심 붕괴. 1.2초간 완전 방어 불가.”
알파의 목소리가 터졌다.
“지금이야!”

글록은 마지막 힘으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 순간, 도미티아누스의 주먹이 그대로 복부를 강타했다.
피가 역류했다. 글록의 몸이 3미터나 밀려났다.

글록은 무릎을 꿇었다. 숨이 막혔다. 시야가 흔들렸다.

“이젠 끝인가?”
도미티아누스도 숨을 헐떡였지만 웃고 있었다.
“신이든 뭐든, 피를 흘리면 다 인간이지.”

글록은 숨을 내쉬었다. 손끝이 떨렸다. 모래 알갱이가 느리게 굴러가는 게 보였다.

그때, 알파의 음성이 귀를 스쳤다.
“글록, 중력 중심에서 2미터 옆, 부러진 전차축이 있습니다.”
“그렇군. 다시 한번 지렛대의 원리를 사용해 볼 수 있겠어.”
“이번이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과학 시간에 공부한 내용을 최대한 활용해보죠. 물론 지구 중력이 통하는 물리학은 아니었지만 물리학은 신의 언어니까.”

글록이 미세하게 웃었다.
“좋아, 그럼 신의 언어로 대답해볼까.”

그는 부러진 전차축을 붙잡았다. 한쪽 끝은 모래에 박혀 있었고, 다른 한쪽은 피 묻은 쇳덩이였다.

도미티아누스가 돌진했다.
글록은 순간, 축의 중심점을 기준으로 몸을 회전시켰다.
“지렛대 작동. 거리 1.7배, 힘은 세 배.”
알파의 목소리가 빠르게 계산을 읊었다.

‘쾅!’
전차축의 끝이 도미티아누스의 무릎 뒤를 정확히 때렸다.
거대한 몸이 뒤로 휘청이며 균형을 잃었다.

“관절각 붕괴. 중심 이동률 87%. 지금이에요!”
알파의 외침과 함께 글록은 바닥을 박차고 올랐다.
팔의 근육이 폭발하듯 움직였다.

그는 전차축을 지렛대 삼아 몸을 공중으로 날렸다.
도미티아누스의 어깨 위를 넘어 회전하며, 공기 중에서 팔꿈치를 떨어뜨렸다.

“회전 모멘트 3.4! 운동량 보존 적용!”
‘쾅!’
팔꿈치가 도미티아누스의 뒤통수를 정확히 강타했다. 거인의 몸이 굉음과 함께 쓰러졌다.

잠시, 경기장은 정적에 잠겼다. 모래바람만이 두 사람을 감쌌다.

도미티아누스가 천천히 바닥에서 상체만 일으켰다. 이미 눈앞은 희미했다.
그의 눈빛엔 분노도, 자존심도 없었다. 오직 체념.
“이런 싸움은 정말 오랜만이군… 나쁘지 않은 싸움이었어.”
글록이 숨을 고르며 대답했다.
“왜 이렇게까지 싸우는거지?”

도미티아누스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입술이 피로 젖어 있었고, 가슴이 들썩였다.
그는 하늘을 잠시 올려다봤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이었다.

“왜 싸우느냐고…?”
그가 낮게 웃었다.
“누구나 싸움의 이유가 있지. 명예를 위해서라거나, 로마를 위해서라거나.”
그는 숨을 몰아쉬며, 피가 섞인 공기를 삼켰다.
“하지만 나에게는… 단 하나의 이유밖에 없지.”

그의 시선이 관중석 한쪽으로 향했다.
그곳엔, 쇠사슬에 묶인 채 울고 있는 소녀가 있었다.
도미티아누스의 어린 딸 리비아였다.

그의 입가에 피가 번지며 미소가 피어났다.
“내 싸움의 유일한 이유는... 저 아이야. 나의 딸.”
“딸?” 글록이 되묻자, 도미티아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노예였다. 원래 이름조차 없었지. 검투사로 살아남으면 자유를 준다는 말에, 난 수십 번의 겨울을 피 속에서 보냈다. 그때마다 그녀는 내게 말했다. ‘아빠, 꼭 돌아오세요.’ 그 말이 나를 살게 했지.”

그의 눈가에서 피와 눈물이 섞여 흘렀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어. 황제가 약속했지. 내가 또 이기면, 나와 내 딸에게 자유를 준다고.”
그가 미소를 지었다.
“나는 처음으로 싸움이 아니라, 자유를 위해 검을 들었어.”

그의 손이 모래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네가 나를 이겼을 때, 알았지. 진짜 자유는 승리에서 오는 게 아니라, 리비아가 나를 기억해 주는 데서 온다는 걸.”

그가 힘겹게 숨을 내쉬었다.
“내가 패배해도 괜찮다. 하지만 그녀만은… 신의 제물이 되어선 안 된다.”

그의 시야가 점점 더 흐려지고 있었다.
글록은 무심히 말했지만, 그 목소리엔 흔들림이 있었다.
“그녀를 살리는 것이 당신의 소망인가?”
도미티아누스는 마지막 힘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방인. 네 눈엔 내가 야만인으로 보이겠지만, 아버지의 사랑은 문명보다 오래된 법이지.”

그의 시야가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 그는 마지막으로 힘겹게 속삭였다.

“부탁할께… 내 딸을 지켜주겠나?”

그 말과 함께, 그의 머리가 모래 위로 천천히 떨어졌다.
붉은 먼지가 일었다. 알파-3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단지… 딸의 운명을 두려워했을 뿐이에요.”

글록은 그 자리에서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눈이 리비아를 향했다.

어린 소녀의 눈에서 흐른 눈물 한 줄기가, 그의 망막에 정확히 새겨졌다.

그러나 관중의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황제의 손이 천천히 들렸다.
“로마의 신은 인간의 패배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가 손을 내리자, 철창이 열렸다. 사자의 포효가 경기장을 뒤흔들었다.

세 마리의 사자가 어둠 속에서 뛰쳐나왔다.

도미티아누스는 힘없이 피식 웃었다.
“좋다. 신이 원한다면, 신에게 내 피를 주지.”
그는 쓰러진 몸으로 일어서며 철퇴를 다시 쥐었다.

글록이 황제를 향해 외쳤다.
“그만두시요! 이미 싸움은 끝났습니다!”
그러나 황제의 눈빛은 냉정했다.
“로마의 법은 끝을 모른다. 오직 죽음만이 진실이다.”

사자들이 달려들었다. 글록은 움직이지 않았다.
알파가 속삭였다.
“개입하시면 감시국 프로토콜 위반입니다.”
“알파...우린 이미 수없이 개입해버렸어. 이젠 내가 지구인인지 은하인인지 헷갈릴 지경이라고.”
그의 손이 떨렸다.
“이제… 이건 관찰이 아니라 증언이 되어버린거야.”

그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 순간, 도미티아누스가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멈춰라, 이방인.”
그의 얼굴엔 이상하리만큼 평온한 미소가 번졌다.
“내 딸을 지켜줘. 내 딸 리비아를… 그녀만은…”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첫 번째 사자의 포효가 경기장을 찢었다.
피가, 모래 위에 붉게 흩날렸다.

관중은 함성을 질렀고, 황제는 만족스럽게 앉았다.
글록은 차가운 눈으로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기록한다. 인간은 신을 창조했지만, 그 신은 폭력의 배고픔으로 유지된다.”

알파가 낮게 속삭였다.
“당신의 심박수, 비정상적으로 상승 중이에요.”
“그래. 이런 문명을 기록한다는 게… 이런 기분이었군.”

그는 천천히 돌아섰다.
리비아의 울음소리가 메아리처럼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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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