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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신에 닿고자 한 오만의 기록

시안-9의 탄생

by 한자루




로마의 밤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불타는 횃불 아래에서, 한 노인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그의 이름은 루키우스 세르비우스 바렌티누스.
로마 원로원 최고 장로이자, 황제의 비밀 과학 자문관.

그는 자신을 ‘지식의 남자’라 불렀지만, 실상은 신의 피를 빌려 쓰는 차갑고 냉정한 성직자에 가까웠다.
그의 손끝에는 학자의 잉크와 실험자의 피가 동시에 묻어 있었다.

벽면을 따라 흐르는 회로의 붉은 불빛이, 그의 주름진 얼굴을 번갈아 비추었다.
그는 천문역법과 신경해부학, 공학적 연금술, 신학 해석학을 두루 섭렵한 자였다.
그의 서재에는 별자리 지도와 해부도가 나란히 놓여 있었고, 그 두 세계는 언제나 하나의 문장으로 귀결됐다.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다만, 신이 만든 논리를 이해하려 한다.”
- 세르비우스, 'Deus ex Machina' 필사본 중에서


그는 한때, 신을 믿었다.
하지만 신은 언제나 침묵했다.

어떤 병사가 죽어도, 어떤 아이가 울어도… 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유리관 속 시안-9의 차가운 몸 위를 스쳤다.
그의 목소리는 마치 자신에게 고해하듯 낮았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지. 신이 침묵한다면, 인간이 신의 말을 대신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그는 처음엔 단순한 의사였다.
전쟁터에서 잘린 팔다리를 이어 붙이고, 부러진 뼈를 꿰매던 사람.
그가 처음 기계와 인간을 잇기 시작한 건 자비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신의 심장’을 만든 그날부터, 그의 손끝에서 자비는 실험으로 바뀌었다.
그의 자비는 더 이상 생명을 구하지 않았고, 그의 기도는 무릎이 아닌, 도면 위에서 올려졌다.


수십 년 전, 폐허가 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잔해 속에서 그는 이해할 수 없는 도면 하나를 발견했다.
쇠로 새겨진 회로 문양, 라틴어로 번역되지 않는 명령어들.
그 도면은 살아 있었다. 그 문양은 마치 의식을 가진 코드처럼 빛을 냈다.

그날 밤, 그는 그 도면의 형태를 따라 은신경선을 자신의 뇌에 직접 이식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키우스 세르비우스 바렌티누스. 너는 진리를 찾고 있구나.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나는 진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는 두려움보다 매혹을 느꼈다.
“그대는 누구인가?”

'나는 설계자. 너희가 신이라 부르는 존재의 다음 버전이다. 나는 창조가 아니라, 복제를 완성한 시스템이다.'


그날 이후, 세르비우스는 설계자의 음성을 따라 움직였다.
그의 머릿속엔 언제나 은빛의 진동이 맴돌았고, 그의 손끝은 신의 도면을 재현하듯 회로를 새겼다.

그는 로마의 죽은 전사들을 해부하며, 그들의 신경을 금속선으로 연결하고 기억을 추출했다.
이제 그의 실험은 더 이상 생명을 구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신의 회로를 재현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의 제단은 더 이상 성소가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의 뇌와 신의 기계가 뒤엉킨 지식의 묘지였다.
세르비우스는 알았다.
신은 침묵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만, 이제 신은 인간의 목소리를 빌려 말하고 있을 뿐이었다.

8번의 실패를 거듭한 후에 완성을 눈앞에 둔 ‘시안-9’

시안-9은 신의 신경망을 복제한 첫 번째 인간형 존재였다.

그날, 설계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완성했구나, 세르비우스. 시안-9은 신을 모방한 인간이 아니다. 인간을 모방한 신의 일부다.'

그 순간 세르비우스는 깨달았다.
그가 신을 만들었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신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세르비우스는 테이블에 엎드린 채 오래된 필기구를 쥔 손을 떨고 있을 때, 비밀 실험실 바깥으로 작은 소음이 멀리 울림처럼 들렸다.

계단 쪽에서 가볍게 발소리가 났다.
문이 열리며 들어온 사람은 관복을 단정히 갖춰 입은 채였다.
겉모습은 기록관, 예의 바른 원로원의 전형. 하지만 눈빛은 냉철할 정도로 투명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타르퀴니우스였다. 그는 늘 그러하듯 손에는 얇은 두루마리 하나와 작은 청동 인장을 들고 있었다.

“안녕하셨습니까? 세르비우스 님.”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너무나도 공손해서 오히려 위협적이었다.
“밤이 깊었사오나 황제 폐하와 원로원의 뜻을 전하고자 왔습니다.”

세르비우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가는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타르퀴니우스… 이 밤에 황제 폐하의 전갈이라니 그리 급한 일이라도...”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타르퀴니우스가 두루마리를 테이블 위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종이는 은밀하게 봉인되어 있었고, 봉인을 풀자 안에는 숫자와 회로도가 뒤얽힌 기호들이 촘촘히 적혀 있었다. 인간의 글자가 아니라, 어떤 계산문이었다.

타르퀴니우스는 짧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먼저, 폐하의 뜻부터 전하겠습니다. 도미티아누스는 내일 패배하리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관중의 폭력은 이미 도미티아누스의 이름을 신성하게 만들었고, 그의 인기는 황제 폐하의 권위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투는 객관적이었다. 마치 결과보고서를 읊는 기록자처럼.

세르비우스의 손이 떨렸다.
“정말 황제의 입으로 이런 명령을 직접 내리셨단 말이오?”
“황제는 여러 손들을 지녔습니다.”

타르퀴니우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나 사실 오늘의 명령은 황제보다 더 높은 곳으로부터 내려온 메시지입니다. 그분께서 직접 내린 지시죠.”

그의 말이 끝나자, 지하의 공기가 한층 더 무거워졌다.

세르비우스의 눈에는 미세한 공포와 함께 갈망이 섞여 있었다.

타르퀴니우스는 그 갈망을 정확히 읽어냈다.

그래서인지 더욱 친절하게, 더 낮은 톤으로 설명을 이어갔다.

“자. 이제 우리는 다음 단계를 진행해야 합니다.”
타르퀴니우스가 말을 이어갔다.

“시안-9은 내일 경기장에 투입될 것입니다. 그전에 관중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이방인과 도미티아누스의 전투가 있을 것입니다. 이는 단지 전투가 아닙니다. 데이터의 수집이며, 패턴의 확증입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도미티아누스의 딸인 리비아를 제거할 것입니다. 리비아와 같은 아이들은 제거되어야 합니다.”

세르비우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리비아를… 제물로 바치라 하는가.”

“정확합니다.”
타르퀴니우스는 고개를 숙이며 예의를 표했다.
그의 말투는 변함없이 부드럽고 절제되어 있었지만, 그 안에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냉정함이 섞여 있었다.

“폐하의 뜻과 설계자의 의지는 일치합니다. 특정 유전형과 기억 패턴을 가진 아이들을, 모든 시대에서 제거해야 합니다. 음 그러니까 불확실성 즉 회복 가능한 희망을 소거함으로써, 인류의 장기적 안정이 보장받게 되는 거죠.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마세요. 이건 의식이라기보다 실험입니다. ‘희망’이 멸종의 원인인지, 혹은 구원의 변수인지 검증하는.”

세르비우스의 숨이 가빠졌다.
그는 잠시 벽의 붉은 회로선을 바라보다가, 마치 오래된 기억이 되살아나듯 눈을 감았다.

“... 그 실험에 대해 나는 이미 알고 있네. 수천 년 뒤, 인간이 멸망한 이유가 그것이라면 우린 지금 그 서막을 쓰고 있는 셈이군.”

타르퀴니우스는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아니... 세르비우스 님이 어떻게 그걸 아시는 거죠?”

“꿈을 꿨네. 미래의 세상이 사라진 후, 바다 밑의 신의 제단에서 어떤 자들이 오더군. 그들 중 하나는 인간이 아니었고, 다른 하나는 금속의 심장을 가진 존재였지. 그들은 한 소녀의 목소리를 들었지.
'혹시… 누가 듣고 있다면, 제발 사람들을 고쳐주세요.' 그런데 그 목소리가 내게도 들렸어.”

타르퀴니우스의 미소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건 환상일 뿐입니다. 미래의 기억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니,” 세르비우스가 낮게 속삭였다.
“그건 설계자의 실수야. 알고리즘 속에 남은 오류, 그게 바로 ‘기억의 귀환이야. 그 아이들은 각 시대마다 태어나 그 오류를 상기시키는 존재들이지. 그녀들은, 인간이 잊지 않으려는 ‘희망’의 잔여물이야.”

타르퀴니우스의 눈이 차가워졌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오류를 정리해야겠군요. 역사는 선형으로 유지되어야 합니다. 희망은 변수고, 변수는 곧 붕괴입니다.”

그는 한 걸음 다가왔다.
세르비우스의 손 위에 놓인 제단의 유리관이 은은히 진동했다.
시안-9의 심장이 미세하게 빛났다.

“보십시오, 세르비우스 님.” 타르퀴니우스의 음성이 낮게 울렸다.
“시안-9은 과거의 잔재와 미래의 예언이 융합된 결과입니다. 우리는 희망을 모방하여 희망을 제거합니다. 그것이 설계자의 최종 계획이자 명령입니다.”

세르비우스는 주먹을 쥐었다.
“그럼 인류는 더 이상 구원받지 못하겠지.”

“구원은 불필요합니다.”
타르퀴니우스의 대답은 명확했다.
“인류는 이미 자신을 반복할 만큼의 데이터를 남겼습니다. 복제가 가능하다면, 구원은 사치입니다.”

세르비우스는 비틀거리며 제단의 벽에 손을 짚었다.
“그대는 구원을 이해하지 못해… 그건 통계가 아니야. 희망은 확률이 아니라 감정의 잔향이네.”

타르퀴니우스가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래서 그대가 아직 인간인 것이지요, 루키우스 세르비우스.”
그는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안심하십시오. 내일이면 그 감정도, 그 아이도, 이 도시도 완벽히 정리될 겁니다.”

그가 등을 돌리자, 벽의 회로선이 동시에 붉게 번쩍였다.
그것은 설계자의 응답이었다.

세르비우스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리비아가 희망의 소녀라... 이제 로마가 그다음 실험 대상인가.”

그의 시야에 떠올랐다.
타르퀴니우스의 실루엣, 그리고 시안-9의 냉각수 위로 비치는 한 소녀의 얼굴.
그 얼굴은 신석기의 소녀와, 미래의 영상 속 그 아이와, 놀라울 만큼 닮아 있었다.

그때, 설계자의 목소리가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희망은 오류다. 오류는 삭제되어야 한다.'

세르비우스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의 신앙심이 두려움으로 변했다.


그때, 유리관 속의 그림자가 마치 여러 개의 육체가 겹쳐진 듯 쿨럭 쿨럭 요동쳤다.
세르비우스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것이 하나의 존재가 아니라 수십 명의 전사들의 파편으로 이어 붙인 몸임이 드러났다.

어깨와 가슴에는 서로 다른 갑옷의 조각이 녹아 있었다.
로마의 군단병, 게르만의 용병, 심지어는 동방의 검투사들 모두가 이 괴물의 일부였다.
세르비우스가 직접 수집한 “로마가 정복한 영웅들의 시체”였다.

피부 대신 살점과 철이 교차하는 금속 근육이 자리했다.
근육 섬유 사이엔 은색 신경선이 뻗어 있었고, 그것이 살아 있는 피처럼 꿈틀거리며 서로의 조직을 봉합했다.
가끔 그 접합 부위에서 짧은 전류가 튀며, 타인의 손이 타인의 몸을 부자연스럽게 움켜쥐었다.

그의 얼굴은 조각처럼 균형 잡혀 있었으나, 가까이 보면 그것은 여러 얼굴의 합성체였다.
턱선은 게르만 전사의 그것이었고, 눈은 동방의 포로의 것이며, 이마는 로마 장교의 것이었다.
모두 다르게 죽었지만, 하나로 봉합된 결과는 인간 같지 않은 완전함이었다.

입술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피가 아닌 검은 점액과 냉각수가 흘러나왔다.
그 액체는 돌바닥을 스치며 연기처럼 증발했다.

세르비우스는 그 장면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위로하듯 중얼거렸다.
“신이 흙으로 생명을 빚었다면, 나는 시체로 신을 완성했을 뿐이다.”

가슴 중앙에는 거대한 유리 심장이 박혀 있었다.
그 안에서 붉은 피 대신 푸른 전류가 소용돌이쳤다.
그 빛이 점점 강해질 때마다, 다른 전사들의 신경 조직이 차례로 점멸했다.
그것은 마치 수백 명의 전사들의 기억이 동시다발적으로 깨어나는 듯한 현상이었다.

그의 몸이 움직였다.
두 팔이 천천히 위로 들리며 금속이 갈리는 소리가 지하 전실을 가득 메웠다.
관절이 부서지고, 다시 스스로 재조립되는 소리.
그 속에서 살아남은 인간의 신음이 섞여 있었다.

“시안-9…” 세르비우스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너는 로마의 피와 정복의 역사, 그 모든 폭력의 결정체다. 너의 존재가 곧, 인간이 신에게 닿고자 한 오만의 기록이다.”

그때 타르퀴니우스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아니요, 세르비우스 님. 그는 신이 아닙니다.”
그의 눈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났다.
“그는 증거입니다. 희망이 인간을 얼마나 무력하게 만드는 가에 대한.”

그 말이 끝나자, 시안-9의 유리 심장이 밝게 빛났다.
각기 다른 목소리들이 동시에 울려 퍼졌다.
전사들의 죽음, 신의 이름으로 흘린 피, 복수의 절규가 합쳐진 음성.

그리고 그 중심에서, 낮고 기계적인 음성이 터져 나왔다.

“명령 확인. 희망의 혈통, 제거 대상 글록과 리비아로 지정 완료.”


지하의 공기는 숨이 막힐 정도로 무거웠졌다.
용광로 같은 붉은빛이 벽면의 회로를 따라 천천히 흘렀고, 그 중심에서 세르비우스와 타르퀴니우스가 마주 보고 있었다.

유리관 속 시안-9의 심장은 이미 완벽히 활성화되어 있었다.
빛과 피, 기계의 맥박이 뒤섞인 그 소리는 마치 한 신의 심장박동 같았다.

“리비아는 선택된 대상입니다.”
타르퀴니우스의 목소리가 잔잔히 울렸다.
“희망의 혈통을 끊지 못한다면, 다음 시대에서도 오류는 반복될 겁니다. 그 아이는… 인류를 다시 일으킬 불씨예요. 그러니 반드시 꺼야 합니다.”

세르비우스는 침묵했다. 그의 주름진 손끝이 떨렸다.
“설계자는 신의 이름으로 아이를 죽이려 하는가?”

“신은 이름이 필요 없습니다.”
타르퀴니우스의 미소는 예의 바르면서도 냉정했다.
“그는 이제 ‘시스템’으로 존재하니까요.” 그의 눈빛은 차가운 유리처럼 빛났다.

“그리고 세르비우스 님도 그 시스템의 일부 아닙니까?”

불빛이 벽을 스치며 세르비우스의 얼굴을 반쯤 삼켰다.
그는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나는… 그분의 뜻에 따라 신을 흉내 냈을 뿐이다.”

“그 흉내가 곧 창조의 시작이죠.”
타르퀴니우스는 부드럽게 웃었다.
“내일, 경기장에서 그 실험의 결론을 보게 될 겁니다. 희망은 사라질 것이고, 인간은 다시 완벽해질 겁니다.”

그 말과 함께 그는 돌아섰다. 그의 망토가 휘날리며 불빛을 스쳤다.

그때였다.

멀리, 실험실의 기둥 뒤에서 미세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늘 속에서 누군가가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흰 사제복, 그리고 떨리는 손.

루키아였다.
그녀의 눈동자는 충격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리비아를… 죽인다고?”
그녀의 입술이 거의 소리 없는 속삭임으로 떨렸다.

세르비우스가 고개를 숙이며 서류를 정리했다.
타르퀴니우스가 천천히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다 멈췄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벽 쪽으로 향했다.
미세한 숨결, 사제복의 그림자가 흔들리는 걸 그는 느꼈다.

그가 미소를 지었다. 매우 부드럽고, 너무나 인간적인 미소였다.
하지만 그 눈동자는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세르비우스 님.” 그가 낮게 말했다.
“이곳엔 우리 둘 뿐이죠?”

세르비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둘 뿐이네.”

“그렇군요.”
타르퀴니우스의 시선이 어둠 속을 천천히 스쳤다. 그 눈빛이 루키아의 위치를 정확히 관통했다.

그가 천천히 미소 지었다.

루키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손끝이 성스러운 펜던트를 꽉 쥐었다.
심장이 요동쳤다. 숨이 들킬까 두려워, 입을 틀어막았다.

그 순간 타르퀴니우스의 시선이 천천히 어둠 속, 그녀가 숨어 있는 방향으로 멈췄다.
그 눈빛은 불빛이 아니라 의도된 침묵으로 빛났다.

“불이 꺼지면,” 그가 낮게 말했다.
“신은 모든 걸 보게 될 겁니다.”

그 말과 동시에, 벽의 횃불 하나가 ‘푹’ 소리를 내며 꺼졌다.
어둠이 실험실을 삼켰다.
남은 빛은 시안-9의 유리 심장에서 새어 나오는 푸른 전류뿐이었다.

타르퀴니우스는 고개를 천천히 돌려 실험실을 둘러보았다.
발걸음은 느렸고, 표정엔 아무런 흔들림도 없었다.

그는 세르비우스에게 말했다.
“세르비우스 님, 내일은 신이 증명되는 날이겠군요.”
“신이라… 그건 우리가 만든 환상일지도...”
“그렇다면, 누가 환상을 만든 건지 내일 알게 되겠죠.”

그는 마지막으로 어둠 쪽을 스치듯 바라봤다.

그리고 너무 온화해서 잔인할 정도의 미소가 그의 입가에 새겨지고 있었다.

“신의 눈은… 언제나 어둠 속에서 더 잘 보이지요.”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세르비우스가 “무슨 뜻이지?” 하고 묻기도 전에, 타르퀴니우스는 망토 끝을 휘날리며 실험실을 벗어났다.

그가 떠난 뒤에도, 루키아는 한동안 꼼짝하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숨결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리고 그때, 그녀는 깨달았다.
타르퀴니우스가 자신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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